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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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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이라고 부르지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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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에서는 세속의 이름 대신 법명을 부른다. 속명을 쓰는 경우는 좀처럼 드물다. 그러나 수행자도 대한민국의 국민이기 때문에 법률을 따라야 한다.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에는 어김없이 ‘법인 스님’ 대신 ‘오형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관공서나 병원 등지에서 ‘오형만 씨’라고 부르면 좀 낯설고 어색하다. 간혹 수행자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치게 강한 스님들은 그런 경우에 속명을 부르면 화를 내기도 한다(쯧쯧!).

 

속명과 법명을 달리 쓰는 일이 신경이 쓰이는 스님들은 간혹 속명을 법명으로 개명하기도 한다.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긴 불교학자이고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셨던 지관 스님이 그랬다. 내 도반 동출 스님의 경우는 좀 특이하다. 속명이 ‘이동출’인데 그 분의 스승께서 법명도 ‘동출’로 지었다. 동출 스님은 개명 신청 없이 저절로 주민등록증과 승려증의 이름이 같다. 감각이 돋보이는 법명도 있다. 무불 스님은 속성이 나 씨이다. 그래서 속성과 법명을 이어서 부르면 ‘나무불’이 된다. 나무 아미타불, 나무 관세음 보살은 우리에게 익숙한 호칭인데, ‘나무’는 당신을 믿고 의지하고 존경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나무불 스님의 경우는 수행하여 깨닫지 않아도 그 스님의 법명을 부르는 사람에게 부처의 반열로 귀의를 받는 셈이다. 그럼, 나는 속성이 오 씨이니 법명을 ‘법인’에서 ‘마이’로 개명할까? 그러면 ‘오마이 스님’이 된다. 오마이뉴스에서 좋아할지 모르겠다.


일이 있어 저자거리에 나가면 다소 황당한 경우를 경험한다. 병원과 백화점 같은 대형 매장이다. 십 여년 전, 심장에 이상이 있는 것 같아 인천에 있는 그 계통의 병원에서 이틀 간 검진을 받았다. 병원에서 주는 복장으로 옷을 갈아 입었다. 각각의 장소에서 검진을 받는데 간호사들의 한결 같은 호칭은 ‘아버님’이었다. “아버님, 엑스레이 촬영하겠습니다. 아버님, 숨을 크게 들이쉬고 멈추세요. 네네, 아버님 아주 잘하고 계십니다” 요새 스마트폰 문자로 표현하자면 ㅋㅋㅋ... 이다. 옆에 있는 내 세속의 누이는 애써 웃음을 참는다. 검진실의 사람들은 승복을 입지 않고 환자복을 입은 내 형색을 보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승복 복장을 확인한 접수실의 사람들도 한결 같이 내게 아버님으로 불렀다. 그 때 크게? 깨달았다. 아! 내 나이가 이제 아버님 반열에 들었구나. 얼마 전에 휴대전화를 새로이 구입하고자 해남읍에 있는 비교적 큰 매장에 들어갔다. 그 곳에서도 내게 “아버님, 필요한 게 있으세요?”라고 호칭한다. 자꾸 아버님, 아버님, 부르기에 웃으면서 아버님 호칭이 좀 그렇지 않느냐고 물었다. 매장의 직원이 하는 말, “아버님, 뭐가 이상한가요?” ㅎㅎㅎ ... 그냥 고객님이라고 불러 달라고 하니, “네, 알겠습니다. 아버님.” 이런 경우는 어떤 이모티콘을 써야 하나? 여튼 꽈당!이다. 그 때 씁쓸하게 웃고 말았지만 느낌도 씁쓸했다.

 

위에서 내로 온 지시에 따라 정해진 매뉴얼로 움직이는 세상이구나. 자본이 중심이 된 세상에서는 본인들이 자주적으로 생각하고 말할 수 없는구나. 그리고 공적인 공간에서 그런 호칭을 사용하여 가족이라는 틀로 묶으려는 속내가 보여 씁쓸했다. 나는 아무 곳에서나 인정과 다정으로 묶으려는 그런 의도가 불편하다. 내 딸 같아서, 내 가족처럼, 이라는 호칭을 분위기와 맥락에 맞지 않게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으면 한다. (아버님, 어머님, 이모, 언니, 동생의 호칭이 정다운 곳도 있다. 내가 사는, 농협이 있는 삼산면에서는 직원과 고객이 서로 알고지내는 마을 분위기인지라 그런 호칭이 자연스럽다. 공사를 구분하면서도 다정스럽다. 맥락과 분위기가 이해되고 동의되면 그런 호칭은 친밀감을 준다).


절집에서 간혹 존칭이 주는 웃음꺼리도 생긴다. 오래 전 계룡산 신원사라는 절에 살고 있을 때다. 아침에 유선 전화 벨이 울렸다. 나이 든 목소리의 남자분이 거두절미하고 대뜸 사장님 좀 바꿔 달라고 한다. 그래서 “전화 잘못 하셨습니다. 여기 사장님은 안 계십니다.” 했더니, “ 아, 거기 신원사 절 아닌가유?” 한다. “네, 신원사 맞습니다” “신원사 맞구만유, 그러니께 신원사 사장님 좀 바꿔주시유” 그 절의 책임자인 ‘주지’라는 직책과 호칭을 모르니 나름대로 예우하여 사장님을 찾은 것이다.


내게 부여하는 호칭 때문에 적잖이 당황한 일도 있다. 어느 도심 절에서 창사 10주년을 기념하여 법문을 해달라고 해서 법회 날짜에 맞춰 갔다. 그런데 그 절 인근에 현수막을 보고 정말이지 온몸에 이가 스며든 듯 몸에 반응이 왔다. “ 00사 창사 10주년 법인 큰스님 초청법회” 그 때 세속 나이가 42세였다. ‘큰’이라는 수식어는 이렇게 허세와 과욕을 벗고 겸손과 정직을 구현해야 할 산중에도 스며들었다. 그 뒤부터 어느 곳에서 법문이나 강의 요청이 오면 먼저 큰스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도록 당부한다. 지혜 있는 사람은 크게 보이고, 화려하게 보이고, 그럴 듯 하게 보이려는 호칭의 속내를 알아차려야 한다. 그리고 그런 과장과 허세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근자에서 세속에서 호칭에 시비와 논란이 일고 있다. 도련님, 아가씨, 시아주버님 등 가족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인 것 같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문화에서 나온 호칭이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올바른 호칭은 단순히 호명의 차원이 아니라 존중과 평등의 관계 정립이 된다. 호칭은 때로는 아첨, 굴신, 모멸감을 안겨준다. 일제 강점기 시절, 독일 출신의 선교사 엘리자베스 요한 쉐핑(1880~1934, 한국명 서서평)은 무시 당하고 고난 받는 사람들에게 먼저 이름부터 지어주었다. 개똥이, 돌쇠, 삼월이, 언년이 대신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며 그들의 존엄과 자긍심을 심어 주었다. 명실상부(名實相符)라 했다. 이름이 정당해야 관계가 아름다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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