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대사를 희롱한 스님
» 추사 김정희와 초의선사의 상
1801년, 강진에 유배 온 다산 정약용 선생은 한동안 이쪽저쪽을 못 드나들어 몸과 마음이 병이 들었다. 외로운 심사에 고적한 밤을 견디지 못하고 온몸이 감전된 듯 이부자리를 걷어차고 술로 불난 가슴을 달래야 했다. 먹은 음식은 수시로 체했다. 그래서 차를 멋스런 풍류로 대하기보다 몸의 체증을 내리는 약으로 삼았다. 당시 다산의 살림살이는 ‘이쪽’만 있었다. ‘저쪽’이 없거나 빈약했다. 그는 혼자 있었고, 침묵해야 했고, 혐소한 공간에 정좌했다. 그의 시간은 치떨리게 조용했고, 그 시간이 무서워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렇게 이쪽이라는 한쪽에 갇힌 삶은 답답했다. 저쪽이 필요했다. 누군가와 같이 있고 싶고, 말을 하고 싶고, 생각을 나누고 싶었다. 저쪽이라는 한쪽이 절실했다.
유배생활이 한해 두해 이르자 다산의 남루한 처소에 저쪽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다산의 강진 유배 생활은 18년이다. 신유년(1801) 겨울에 강진 동문 밖 술집에서 처음 몸을 눕혔다. 동천여사라고 다산이 칭한 곳이다. 을축년(1805)에는 고성사 보은산방에서 지냈고, 병인년(1806)가을에는 제자 이학래(이청)의 집에서 살았다. 그리고 무진년(1808) 봄에 현재의 다산초당이 있는 곳에서 살았다. 처음에는 강진 사람들은 몹시도 다산을 꺼렸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이 땅의 부모들은 자식의 교육에는 마음이 약하고 또한 모질다. 중인 계급의 아들들이 하나 둘 배우고자 모여들었다. 평생 다산을 스승으로 섬겼던 강진 고을 아전의 아들인 십오세 된 황상이 배움을 청했다. 손병조, 황경, 황지초, 이학래 등 동천여사에서 맺은 읍중제자들이 배움을 청했다. 드디어 사람의 얼굴을 보고, 말을 하고, 가르치고, 함께 소풍을 갈 ‘저쪽’이 생긴 것이다. 다산에게 저쪽은 다름 아닌 사람들이었다. 다산초당의 18제자들과 삶의 ‘이쪽저쪽’을 왔다갔다 했다. 조금이나마 삶의 울체가 트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독특한 저쪽의 편에 속하는 한쪽이 있었다. 바로 강진 고을 옆 동네 해남 대둔사(대흥사)의 승려들이었다. 혜장, 초의, 색성 등과 유교와 불교, 시/서/화/차로 가르치고 배우고 나누는, 이쪽저쪽이 자유로이 넘나드는 화엄세계가 남도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평생의 지기였던 초의와 추사의 우정은 이미 널리 알려진 터, 그리고 24년 연상인 다산이 초의를 얼마나 아꼈는지 어느 정도 알 만한 사람들은 알 것이다. 다산은 수십 항목에 달하는 증언(贈言)을 따로 써서 한 권의 책으로 묶어줄 정도로 초의를 사랑했고 독려했다. 또한 차를 청하는 명문에 해당하는 몇 편의 걸명소(乞茗疏) 중에서 다산의 글이 있는데, 그 상대는 백련사의 혜장 선사였다. 십년 연하인 혜장과 다산이 나눈 편지와 시는 그들이 얼마나 이쪽저쪽을 드나들며 벅찬 가슴을 나누었는지 역력하다.
그런 대둔사 스님들 가운데 다산이 좋아했던 ‘은봉’이라는 스님이 있다. 널리 알려진 스님이 아니다. 은봉 스님은 강진읍 뒷 편에 있는 고성사의 서기승이었다고 한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총무나 재무 소임에 해당하는 사판승인 셈이다. 1805년 다산의 평생 제자 황상이 시공부에 매진하기 위해 고성사에 몸을 틀었다. 그 때 고성사의 서기 은봉 스님이 시에 호기심을 보이자 황상이 시작법을 알려준다. 시작법을 들은 은봉 스님이 그날 밤 쑥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이 지은 시 한 편을 황상에게 내밀었다. 그 시를 보고 황상은 놀랐다. 아니 이렇게 훌륭할 수가? 황상은 은봉 스님의 시를 사의재(강진읍내 주막집 옆에 지은 다산의 교육장)의 스승에게 보냈다. 황상의 편지와 함께 은봉의 시를 본 다산은 흥분했다. 다산이 황상에게 보낸 답장을 보자.
내가 물었지. 안목이 없고 보면 다른 사람의 곱고 미운 것을 모를 뿐 아니라, 자기의 좋고 나쁜 점도 스스로 알 수 없는 법이라고 말이다. 은봉은 평생 서기승으로 자처했을 뿐이다. 나 또한 그렇게 대접했었다. 오늘에야 비로소 그 시재(詩才)를 보았구나. 네가 모름지기 지성으로 이끌어서 몇 달 안에 시승(詩僧)이란 이름을 얻을 수 있게 해주렴. 꼭 그래야 한다. (이상과 이하 번역은 정민 교수)
다시 보내 온 은봉의 시에 다산은, 은봉의 시재는 사람을 정말 놀라게 한다면 이렇게 말한다. “내가 10년을 관각(館閣 조선시대 홍문관·예문관·규장각을 통틀어 이른 말)에서 노닐었다만, 이처럼 발전이 빠른 사람은 본 적이 없다... ... 이 같은 시재는 실로 처음 본다” 그러나 다산의 이런 일방적이라 할 수 있는 관심과 애정에 은봉 스님은 시 짓는 일에 그리 열정을 쏟지 않는다. 그래서 다산의 조바심과 서운함도 컸다. 이런 은봉의 마음을 나는 짐작할 수 있다. 왜 그랬을까? 당대의 최고 학자에게 인정과 칭찬을 한 몸에 받았는데도 왜 은봉 스님은 문학에 열의가 보이지 않았을까? 아마도 불교와 선가의 풍토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깨달음에 분별과 논리가 외려 장애가 될 수도 있다는 선가의 불립문자(不立文字) 가풍이 시에 심드렁했을 수도 있다. 지금도 절집에는 언어와 논리에 대한 불신이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다.
지금 겨우 시 한 편만이 남아 있는 은봉의 자취가 놀랍게도 다산의 명저 <목민심서>에 남아 있다. 그 글은 임진왜란 당시 구국의 큰스님이 불린 서산대사의 글을 멋지게 패러디 한 것이다. 살펴 보자.
서산대사 휴정이 축원문을 지어 승려들에게 아침저녁으로 외우게 했다. 만덕사(지금의 강진 백련사) 승려 근은(은봉)은 병을 앓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서산대사께서 축원문을 지었는데, <삼전축원문 三殿祝願文> <제궁축원문 諸宮祝願文> <백료축원문 百僚祝願文> 같은 것이 다 이것입니다. 도내의 방백은 지위가 더욱 높아 산에 사는 중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주 합하께서 선정을 행하시는 것도 축원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지요. 소승이 이렇게 고쳐보았습니다. ‘도내의 방백께선 절에 오지 마시옵고, 성주 합하께옵서도 짚신 공물을 줄여주게 하옵소서’ ”듣는 자가 모두 웃엇다. 이 말이 비록 웃자고 한 말이지만 백성들의 마음을 볼 수가 있다“ -목민심서, 권6, ‘호전육조 戶典六條’ 중 ‘평부 平賦’
자못 은봉 스님의 역설적인 발설이 통쾌하다. 이 패러디를 읽고 보니 나는 은봉 스님이 왜 시 짓는 일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는지 짐작이 간다. - 대체 시를 짓는 일이 뭐하자는 거야, 그리고 부처님 전에 그런 축원하라고 지시가 내려 오는데, 그런 축원은 또 뭐하자거야, 내게는 실로 시 짓는 일이나 성스러운 축원의 글들이 어줍잖고 어설프기만 해. 내 곁의 사람들이 저리 힘들고 초라하게 살고 있는데 말이여. - 아마 은봉은 이런 심사였을 것이다.
선대의 서산 대사가 후대의 은봉의 이 패러디 글을 보았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분명한 것은 은봉에게 할(할- 고함 쳐서 깨침을 이끄는 방법)이나 방(몽둥이질로 깨침을 이끄는 방법)을 사용하지 못했을 것이란 나의 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