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보이지 않으니, 미래도 보이지 않을 것이란 생각은 분명히 편견이다. 1급 시각장애인으로서 대학 총사령탑에 오른 이재서(65·사진) 총신대 신임 총장이 그 증인이다. ‘전맹’ 출신의 총장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처음으로 알려졌다.
총신대는 1만9천여개의 교회가 모인 국내 최대 기독교단인 장로회 합동 소속의 신학교로, 교직원 300여명·학생 4천여명의 세계 최대 규모 신학교다. 지난 10여년 총신대는 총장 등의 비리 의혹으로 심각한 내홍을 겪었다. 총신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등으로 25년간 재직하고 지난 2월 정년퇴임했던 그는 구성원들의 부름에 기꺼이 되돌아왔다. 그는 후보 19명의 예비선거에서 내내 1위를 하고 마침내 지난달 13일 재단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총장에 당선됐다. 비신학 전공자로도 처음인 이 총장을 22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만났다.
‘1급 전맹’ 첫 총장 뽑혀 세계적 ‘화제’
전임자 비리 등으로 10여년 ‘내홍’
정년퇴직뒤 19명 후보 경선 ‘승리’
1977년 온종일 1인 시위 끝에 ‘입학’
미국 유학 석·박사 따고 모교 재직
“교회 교단에도 차별있지만 버텨야”
“눈을 못 맞춰서 죄송합니다.” 첫 만남의 악수에서부터 자신의 눈을 소재로 유머를 던질만큼 그는 여유만만했다. 난마처럼 얽혀있는 학내 사태를 어떻게 풀어갈지에 대해서도 “저는 눈에 뵈는 게 없지 않습니까”라는 농담으로 자신감을 내보였다. 그의 미국 유학 시절을 비롯해 36년간 그림자처럼 지켜온 부인 한점숙씨도 남편의 그런 농담에 이골이 난듯 웃음으로 함께했다.
하지만 이 총장의 자신감은 그저 농담만은 아니다. 그는 대학생 때 장애인을 섬기는 밀알선교단을 만들어 40년간 전세계 21개 나라 100여개 센터를 둔 세계밀알연합으로 키워냄으로써 능력을 보여줬다. 위기에 봉착한 총신대 구성원들로서는 그만한 해결사가 없었던 셈이다.
“저는 한눈팔 일은 없을 겁니다.” 전임 총장들이 비리 등으로 신임을 받지 못했기에 그는 투명하고, 공정하고, 소통하면 머지 않아 학교를 정상으로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는 자신에겐 ‘또 하나의 과제가 있다’고 했다. 장애인도 얼마든지 총장 임무를 잘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전체 장애인의 희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후천적 시각장애는 물론 가난과 차별까지 ‘역경’을 이겨낸 이재서 총장은 22일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며 인내를 강조했다.
그가 앞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은 15살 때였다. 어린 시절 앓았던 열병이 원인이었다. 전남 순천(승주)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한 형편 탓에 4남매 모두 초등학교만 다닌 뒤 농사를 지어야 했다. 그는 라디오도 없던 시절 부모 형제들이 일하러 나가면 온종일 홀로 지냈다. “울고 아파하고 죽으려고 마음 먹는 것밖에는 아무 방법이 없었어요. 극복할 길이 없어서, 그냥 견딜 수밖에 없었지요. 학교까지 날마다 5키로미터를 걸어다녔던 기억을 떠올려,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 싸우던 일, 재밌게 놀던 일들을 온종일 회상할 뿐이었지요.”
뒤늦게 서울맹학교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장애로 불편함보다는 가난이 더 힘들었다. 그러나 같은 장애를 지닌 교우들과 함께 한 그 시절이 유일하게 차별을 겪지 않은 시절이었다고 했다. 그뒤 총신대를 다니고, 미국 유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따고, 모교의 교수가 되어서도 학생 면접권조차 박탈 당하는 차별과 편견 속에 살아왔기 때문이다.
21살 때인 1973년 여의도광장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설교를 듣고 회의론자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그이지만,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차별은 여전했다. 그 가운데도 가장 고통스러웠던 건 1977년 2월의 추운 어느날 총신대 본관에서 입학원서를 받아달라며 온종일 서서 애원하던 일이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시각장애인이 어떻게 대학 공부를 한다는 것이냐”며 수령을 거부하던 직원은 학장과 통화한 뒤 ‘수업을 못 따라가면 언제든 정학이나 퇴학을 당해도 좋다’고 약속을 한다면 받아주겠다고 했다. 앞을 보지 못한 것도 서러웠지만, 그런 차별과 수모는 차마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총장은 “그 수모를 견뎌낸 것이 가장 잘한 일었다”고도 했다. 그때 너무도 자존심이 짓밝혀 죽고 싶었지만, 그때 뿌리치고 돌아와버렸다면 오늘의 자신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시절엔 시각장애인을 위한 도움이 부족해 전공과목 책을 점자로 옮기는 동안 한 학기가 끝나버리곤 했단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은 공부를 제대로 따라갈 수 없을 것이란 그런 편견을 확신으로 만들 수는 없었기에 그는 이를 악물고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는 그래서 자신과 같은 장애를 지니거나 역경으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늘 ‘인내의 중요성’을 이렇게 상기시킨다. “세상이 끝난 것같지만, 이게 끝이 아니에요. 현실적으로 어려움에 부딪치면 그게 전부인 것처럼 보여, 미래가 없다는 절박감에 자포자기 하기도 하지만, 오늘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니 좀 더 참고 기다려봐야 해요. 견뎌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