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존재하는가?
“나의 도는 하나로 일관된다”는 공자님의 말씀은 나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내가 무슨 큰 도라도 깨우쳤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라, 나의 삶과 학문을 관통하는 하나의 일관된 관심은 있었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그것은 곧 고등학교 시절부터 나의 관심을 사로잡아 온 신에 대한 관심이다. 심도학사에서 운영하는 30여개의 프로그램 가운데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런 제목을 붙이고 보니, 새삼스럽게 그런 문제를 다룬다는 생각이 생뚱맞다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신의 문제는 생각할 때마다 언제나 새롭다. 70대 후반의 나이지만, 나에게도 신의 문제는 여전히 새롭다.
사람들은 죽을 때가 되면 신을 찾는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삶을 살면서 신의 존재에 대해 한 번도 생각 안 해 본 사람이 과연 있을까? 나 역시 고등학교 시절부터 신의 문제로 ‘속알이’ 하다가, 그 일을 거의 ‘업’으로 삼고 평생을 보내게 되었다. 그간 신을 둘러싸고 제기하게 된 나의 문제의식에 두 가지 큰 변화가 있었다. 하나는 유신론, 무신론을 논하기 전에 신에 대한 모종의 관념이 전제되지 않는 논의는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나에게는 당연한 말이지만, 돌이켜 보면 나는 이러한 사실을 무시한 채 가끔 신의 존재 여부를 놓고 열띤 논쟁을 벌인 기억이 난다. 나는 물론 내가 성장해온 개신교 교회에서 주입된 신관, 그것도 주일학교나 중고등부 반사로부터 들은 신관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채 논의했다고 생각하니, 새삼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다. 그러한 신의 존재를 방어하느라 시간을 허비했다는 생각마저 드니, 나의 어리석음을 이제 와서 자책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회상해보면, 니체를 들먹이면서 무신론을 주장했던 나의 한 친구가 생각나고, 그가 나보다 훨씬 ‘조숙’했고 옳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신의 존재를 둘러싼 나의 관심에 또 하나의 의미 있는 전환은 나의 대학시절 폴 틸리히(Tillich)라는 신학자를 알게 되면서 찾아왔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라는 말을 접했을 당시 내가 경험했던 충격과 해방감은 지금도 새롭다. 틸리히에 따르면, 신과 신앙이라는 단어가 현대인들에게 거의 무의미하게 될 정도가 흔해빠진 용어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새로운 개념과 이해를 가지고 문제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신앙이란 우리 모두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가지고 사는 ‘궁극적 관심’이고, 신은 모든 부차적 관심에 우선하는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관심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무신론자는 실제상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틸리히의 생각이다.
이러한 관점은 내가 나중에 성 토마스 아퀴나스나 중세 스콜라 철학의 신관을 접하면서 더 심화되었다. 신은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선(summon bonum, 힌두에서는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는’, 다시 말해 至高善인 해탈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신관에 따르면, 신은 최고의 선(good, 좋은 것)이고 가치이며,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엉뚱한 것을 선과 행복이라고 착각하면서 ‘우상’을 신으로 섬기는 어리석은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은 이러한 신관이 나에게 상식이 되다 시피 했지만, 이러한 관념은 젊은 시절 한 동안 나의 정신적 도피처가 되었다. 요즈음은 거기에 한 마디 더 보태서, 신은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선과 행복의 원천이고 의미(meaning)의 토대라는 신관을 사람들에게 말하기도 한다. 여하튼 우리가 신을 궁극적 관심사로 이해한다면, 죽음에 임박해서 신을 찾는 사람은, 나는(혹은, 당신은) 평생 무엇을 나의 신, 즉 궁극적 관심사로 삼고 살아 왔는지를 성찰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물음으로 삶을 정리하고 가면, 그런대로 의미가 있는 삶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의 신관은 그 후로 이런 식의 신관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궁극적 관심이라는 개념이 지닌 주관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인 함의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좀 더 합리적이고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보편적인 신관을 모색하는 ‘무모한’ 도전에 나의 남은 시간을 보내기로 작정하고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그 일에 매달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어느 매체를 통해 접하게 된 프란시스 교황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친다. “우리를 성장하게 해주지 않는 신앙은 그 자체로 성장해야 할 믿음이다. 질문하지 않는 신앙은 질문을 받아야 할 신앙이다. 잠든 우리를 깨우지 않는 신앙은 깨어나야 할 신앙이다. 우리를 뒤 흔들지 않는 신앙은 뒤 흔들려야 할 신앙이다. 머릿속에만 머물고 미온적인 신앙은 ‘신앙’이라는 개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