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무료하게 느껴지는 어느 날, 큰절 대흥사에서 템플스테이를 담당하는 행원화 보살님이 청년 한 분과 함께 왔다. 행원화 보살님은 뭔가 의미 있는 차담을 원하는 사람들은 내게 모시고 온다. 청년은 대안학교에서 공부했고, 지금은 철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자발적으로 과를 선택을 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요즘 세상에 밥이 안 된다는 철학을 하겠다니, 참 신통한 청년일세’ 내심 반가워서 좋은 차를 내면서 이런저런 가벼운 애기부터 꺼냈다. 청년의 관심 분야가 남다르고 사유와 성찰이 공부의 기본이니, 말이 통할 수 있는 바탕은 되겠다 싶어 먼저 돌발적 질문으로 수작을 건냈다.
나) 그대는 중국의 만리장성과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가 본 적이 있는가?
청년) 가보지는 못했으나 사진과 영상으로 많이 보았습니다.
나) 그래, 그럼 만리장성과 피라미드를 볼 때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청년) (청년, 한 참 뜸들인다) 글쎄요, 별다른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나) 철학과 학생이니 지금이라도 ‘별다른’ 생각을 해야 하네. 자! ‘엄청 크다,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관광객이 많이 가겠구나’ 누구나 하는 상투적인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을 해보게
청년) 별다른 생각이 쉽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스님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나) 이런! 이 사람아, 자네는 나의 이런 질문에 빠르게 답이 나와야 하네. 그리고 나에게 답을 가르쳐 달라고? 내가 말하면 자네는 내 말을 ‘정답’으로 생각할 셈인가? 지금 자네는 철학과 학생으로서 치명적인 실수를 한걸세. 왜 그런가? 자네는 늘 누군가의 답을 기다리기 전에 먼저 자네가 먼저 ‘질문’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청년) 알겠습니다. 그런데 스님이 말씀 하시는 질문이라는 게 뭡니까?
나) 그 질문이란, 많은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네. 지금 눈을 감고 만리장성과 피라미드를 다시 상상해 보게. 완성된 ‘지금’의 건축물을 보지 말고 ‘당시’ 건축하고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상상해 보게나. 뭐가 보이는가? 어떤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청년) (점점 얼굴 표정이 매우 심각하게 굳어진다)... 아! 그렇군요. 그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 막강한 권력자에게 강제로 징발을 당했고, 부실한 식사를 하면서 관리들에게 채찍을 맞아가며 힘들게 노역을 하고, 공사하는 과정에서 사고로 많이 죽기도 했겠네요.
나) 그렇지. 그 희생자들을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려주지도 않고 대충 매장했다고 하네. 자 노역한 사람들의 고통을 보았으니 이제 누구의 고통이 보이는가?
청년) 네, 강제로 징발된 사람들의 아내와 자식들, 부모님들이 보입니다. 얼마나 그립고 슬펐을까요? 무엇 때문에 그 많은 죄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끌려와서 희생되어야만 했을까요?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 왜 그런 건축물을 만들어야 했을까요? 진시왕은 성 공사장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나) 그렇다네. 나는 거대한 성과 무덤을 볼 때마다 위대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 않네. 그 속에서 인간의 절규가 들리는 듯 하네. 층층히 쌓아올린 견고한 성벽을 보면서 인간들의 어리석음과 폭력이 보이네. 가슴에 한없는 슬픔과 분노가 솟구치네.
청년) 이제 조금은 알겠습니다. 인문학에서 말하는 ‘상상’과 ‘질문’이 무얼 말하는지 알겠습니다.
나) 그런가? 잘 들어주고 말해주니 내가 고맙네. 이제 만리장성과 피라미드가 다른 모습으로 보일걸세. 모든 사물과 현상은 그것이 생성하기까지 숱한 연결망을 가지고 있네. 그 연결을 집요하고 치밀하게 추적하고 해석하는 작업이 철학공부가 아닐까. 참 의미있는 찻자리였네. 오늘 대화에 맞는 시 한 구절 읽어 주겠네. 당나라 말기 두목지가 20대에 지은 <아방궁부> 이네.
육국(六國)이 멸망하고(···) 아방궁이 생겨났다(···)
다섯 걸음마다 전각이요 열 걸음마다 누각일세
<중략>
대들보 받친 기둥은 남쪽 밭의 농부 수보다 많았고
서까래는 배 짜는 여인보다 많았으며
못대가리 번쩍이는 것은 곳간의 낱알보다 많았고(···)
악기의 요란한 소리는 길거리 사람들 말소리보다 많았다네(···)
※이 글은 <참여사회>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