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환경운동의 선구자인 북산 최완택 목사가 지난 13일 밤 76세로 세상을 떠났다. 짧지 않은 5-6년의 투병 탓에 잊혀 진 듯했으나 이별을 아쉬워하며 장례식장을 찾은 이들이 많았다. 그로부터 배운 ‘자유혼’과 산(자연)에 대한 사랑이 가슴속 깊게 각인된 결과였다.
황해도 해주 태생인 그는 목사와 장로를 부모로 둔 기독교집안에서 성장했다. 후일 경기도 연천에 거주하면서 새벽기차로 매일 거의 3시간 걸리는 기독교학교인 대광고까지 통학했고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입학한 것도 집안 내력과 무관치 않다. 캄캄한 밤에 귀가하는 소년 최완택을 초롱불 밝혀들고 기다렸던 부친에게서 하늘사랑을 느꼈다고한다. 그러나 그는 대학시절부터 99마리 양이 머무는 기존 교회 틀에 안주하지않았다. 그는 틀을 떠나 홀로 하느님을 찾고자 애썼다. 목산회(木山會)를 꾸려 동료, 후학들과 함께 산행을 즐긴 것도 산을 또다른 교회라 여긴 때문이었다.
언젠가 목산회 등산을 갔다가 지천에 깔린 도토리를 줍다가 하산시간까지 놓친 적이 있다. 그렇게 비지땀을 흘리며 주워온 도토리를 보자 북산은 모두 다시 산에 뿌리라며 호통을 쳤다. 왜 산에 와서까지 욕심을 부리느냐는 것이었다. 도토리를 먹고 살 산생명과도 공명하며 매주 산에 오르던 북산을 기리며 우리는 장례식장에서 ‘오! 자유, 나는 자유하리라’는 노래를 북산에 오른듯 힘껏 불렀다.
북산의 자유는 방종이나 무책임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회적 소임과 교회적 책임이 언제든 그의 자유 속에 녹아있었다. 경제성장으로 독재를 가리던 유신시대 때 그는 한국공해문제연구소를 창립해 공해문제를 최초로 이슈화 시켰다. 고인은 숱한 위협과 경고를 받았으나 당시로서 생소했던 공해 피해를 올곧게 드러냈다. 지금은 환경, 생태문제가 이/저곳서 연구되나 이 주제를 공론화시킨 첫 주자가 바로 그였다. 그 연구소가 현재의 기독교환경운동연대로 발전했다.
그는 서울 구로동 민들레교회에서 30년간 목회하면서 매주 10여쪽의 ‘민들레 교회 이야기’라는 주보를 손글씨로 썼다. 산을 오르내리며 얻은 지혜로 불처럼 뿜어낸 설교와 그의 친구 이현주와 ‘부르고 답하는’ 이야기가 담긴 그 ‘민들레편지’를 받은 수백 명이 다시 수천 명에게 돌려보면서 북산의 향기가 민들레홀씨처럼 조용히 퍼져갔다.
북산은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의 유언에도 등장한다. 평생 교회 종지기로 가난하게 살면서 어린이를 위한 동화를 썼던 그는 인세를 모아 적지 않은 돈을 남겼다. 권정생 어린이 재단이 만들어진 것도 이런 삶의 결과였다. 권정생은 죽음 이후의 삶을 누구보다 앞서 최완택 목사에게 맡겼다. 술 먹고 객기를 부리는 일이 많으나 심성이 가장 깨끗한 사람이라 보았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유하며 진실했던 사람이 긴 세월 고통을 겪다가 세상을 떠났다. 자유 했기에 세상과 맞서 싸운 적도 많았다. 진실했기에 세상으로부터 배반당한 적도 있었다. 이렇듯 고되기도 했던 북산을 하늘이 두 팔 벌려 감싸 안을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