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영원한가 등의 10가지 질문에 대해 석가모니는 언제나 침묵을 지켰다. 이를 참다못한 제자의 힐난에 석가모니가 말씀했다.]
“나는 내내 10가지 질문에 대해 ‘세계는 영원하다’는 등으로 말하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그런 말과 질문은 …
범행의 근본이 아니어서 지혜로 나아가지 못하고, 깨달음으로 나아가지 못하며, 열반으로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
이것이 바로 설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설하지 않고 설해야 할 것은 설한다고 하는 것이다.”
(『중아함경』 권60 「전유경(箭喩經)」, 대정장1, 805쪽)
편력행자 왓차고따(Vacchagotta)가 세존(=석가모니)에게 여쭈었다.
“아뜨만은 존재합니까?” 세존은 대답 않고 침묵했다.
또 여쭈었다. “아뜨만은 존재하지 않습니까?” 세존은 대답 않고 침묵했다.
(『상윳따 니까야』 44.10)
유익하지 않은 질문에 대한 석가모니의 침묵
석가모니는 바라문교에서 말하는 아뜨만의 존재 유무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이에 대해서 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전 호에서 말했다. 또한 현 단계의 연구 수준에 의하면, 불교 초기 경전에 나오는 아뜨만의 개념이 바라문교의 아뜨만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도 밝혔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석가모니가 “아뜨만은 있는가, 없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침묵을 지키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이욕(離欲, 탐욕을 여읨)과 정각(正覺, 바른 깨달음)과 열반 등으로 이끌지 않는 무익한’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이것을 무기(無記)라고 한다.
다음의 10가지 질문에 대한 무기가 대표적이다. ❶세계는 영원한가? ❷세계는 영원하지 않는가? ❸세계는 끝이 있는가? ❹세계는 끝이 없는가? ❺영혼(jīva)과 신체는 하나인가? ❻영혼과 신체는 별개인가? ❼여래
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❽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가? ❾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가? ❿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
석가모니 당시 말룽끼야뿟따(Māluṅkyaputta, 鬘童子)라는 출가 제자가 있었다. 당시의 강대국인 꼬살라국의 재무장관 아들이기도 했던 그는 출가후 위의 10가지 질문에 석가모니가 대답하지 않는 것을 참지 못했고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심 끝에 석가모니를 찾아가, 10가지 질문에 대해 정확히 알고 계신다면 진실을 말해 주시고, 모른다면 모른다고 말씀해 주기를 요청했다. 이 요청에 응하지 않으면 석가모니를 버리고 떠날 결심을 했다.
이에 대해 석가모니는 유명한 ‘독화살의 비유’를 들어 말룽끼야뿟따의 눈을 뜨게 한다. 어떤 사람이 독화살을 맞았다. 그가 매우 심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그 친족들은 그의 이익과 안온을 위해 곧 의사를 부르려고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렇게 고집하면 어떻게 될까? ‘아직 이 독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나는 먼저 화살을 쏜 사람의 성과 이름과 신분을 알아야겠다. 그 사람의 키와 살결은 어떤지, 얼굴빛은 흰지 검은지, 혹은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지, 어디에 사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리고 활과 화살의 종류가 무엇인지 판명되기 전에는 독화살을 뽑지 않겠다. 또한 화살촉을 만든 사람의 성과 이름과 신분도 알아야 한다. …’ 결국 그 사람은 자신의 의문을 풀기도 전에 목숨이 끊어질 것이다. 위의 10가지 질문은 독화살을 맞은 사람이 이것부터 풀어야 독화살을 뽑겠다고 우기는 의문과 같다. 지혜로 나아가는 질문이 아니며, 깨달음과 열반으로 나아가는 질문이 아니기 때문에 석가모니는 이에 대해 대답을 않고 침묵을 지킨 것이라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급한 것은 독화살을 뽑는 것이고, 그것이 현명하고 지혜로운 일이다. 그렇다면 독화살을 뽑는 것과 같은 중요한 질문은 무엇일까? 괴로움과 그 발생 원인, 그리고 그 소멸과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것이다. 석가모니는 이에 관해서만 줄곧 설하신다. 설사 10가지 질문을 풀은 자라 해도 그는 생노병사와 슬픔과 근심과 번민 등 괴로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설하지 않은 것은 설하지 않은 그대로 받아 지니고, 설한 것은 설한 대로 받아 지닐 것을 권한다.
단순히 지적 호기심만을 채우려는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해 석가모니는 언제나 침묵을 유지했다. 이것은 서양철학과는 다른, 불교의 주요한 특색으로 거론된다. 불교의 시작은 누구라도 괴로움이 있다는 사실이요, 그 끝은 모두가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인 열반에 이르는 것이다. 수행·정진해서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산을 넘어 영원한 평안의 세계에 눈뜰 것을 석가모니는 언제나 기대하신다.
‘영취산에서 석가모니는 아직도 설법 중이다’는 말이 있다. 그 설법이 들리는가? 『율장』 「대품」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자에게 죽지 않는 불사(不死)의 문은 열렸다.”
아뜨만의 유무에 대한 석가모니의 침묵, 그리고 무아의 의미
지혜와 이욕(離欲)과 정각과 열반으로 이끌지 않는 무익한 질문에 대해 침묵을 지킨 석가모니. 그 석가모니가 아뜨만의 존재 유무를 묻는 질문에도 침묵을 지켰다. 편력행자 왓차고따가 “아뜨만은 존재합니까?” 하고 물었을 때, 석가모니는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곧이어 “아뜨만은 존재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는데도 여전히 침묵을 지키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석가모니가 가장 중시했던 것이 괴로움의 영원한 소멸인 열반이라는점,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무익한 질문에는 침묵하고 열반에 유익한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을 전적으로 설했다는 점, 그런데 아뜨만의 존재 유무를 묻는 질문에도 침묵했다는 점을 종합적으로 고찰해 본다면, 아뜨만, 더구나 바라문교에서 말하는 형이상학적 실체로서의 아뜨만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열반에 이르는 데 중요하지 않다고 석가모니는 통찰했음을 알 수 있다.
앞의 10가지 질문에서도 그러하지만, 무익한 질문에 대한 침묵은 그 질문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겠다는 석가모니 의중의 표현이다. 따라서 초기의 불교는 바라문교의 아뜨만이 존재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대해 긍정·부정의 어떤 입장도 세우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초기 경전에 나오는 ‘안-아뜨만(an-ātman)’의 의미는 어떻게 새겨야 할까? ‘안-아뜨만(an-ātman)’은 명사를 부정하는 접두사 ‘안(an)’이 아뜨만 앞에 붙은 것으로, ‘아뜨만은 없다’로도 ‘아뜨만이 아니다’로도 새길 수 있다. ‘아뜨만은 없다’의 한자 표현이 ‘무아(無我)’이고, ‘아뜨만이 아니다’의 그것은 ‘비아(非我)’이다.
이 중 무아는 완전히 아뜨만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지만, 비아는 그렇지 않다. ‘A는 아뜨만이 아니다’라고 할 경우, 그것은 아뜨만의 존재 자체는 부정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아뜨만의 유무에 대해 어느 쪽도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도 볼 수 있으며, 심지어는 아뜨만의 존재를 부정했다고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신(神)이 아니다”라고 할 경우, 말한 사람이 신의 존재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한 이 말의 의미는 달라진다. 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사람이 이 말을 했다면, 이 말은 신의 존재 자체는 긍정한 것이다.
그러나 신의 존재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사람이나 그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도 이 말을 할 수 있다. 자신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또는 긍정·부정 그 어느 쪽도 아니지만, 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는 신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럴 경우, 이 말은 “그는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신이 아니다”를 의미한다. 하지만 신의 존재 유무에 관한 한, 이 말에는 말한 사람의 기존 생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비아는 아뜨만 존재의 긍정으로도, 부정으로도, 긍정·부정의 어느 쪽에도 서지 않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적어도 초기 불교에서 ‘안-아뜨만’의 ‘아뜨만’이 바라문교의 아뜨만과 관련된 경우, ‘안-아뜨만’은 ‘아뜨만이 아니다’, 즉 ‘비아(非我)’로 새기되, 바라문교적 아뜨만의 존재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합당하다.
누차 말했듯이 불교에서 중요한 문제는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 즉 열반이다. 불교에서는 괴로움이 일어나는 근본 원인은 갈애(渴愛)와 무명(無明)에 있다고 본다. 사제설(四諦說)에서는 갈애를 그 근본 원인으로, 12지연기설(十二支緣起說)에서는 무명을 그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갈애란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끝없는 애착’을 말하고, 무명은 진리에 대한 어리석음을 뜻한다. 무명에 의해 갈애가 생겨난다고 이해되고 있다.
갈애와 무명을 달리 표현한 것이 탐(貪, 탐욕·) 진(瞋, 화·분노·) 치(癡, 어리석음) 3독이다. 탐과 진은 갈애의 다른 표현이고, 치는 무명의 다른 표현이다. 탐이 갈애에 속하고 치가 곧 무명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문제는 진인데, 화는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일어난다. 이와 같이 화는 욕망때문에 일어나므로 갈애에 속하게 된다.
갈애와 무명에 물든 행동과 말과 생각에는 괴로움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갈애와 무명이 없는 행동과 말과 생각을 할 때 우리는 열반을향하게 된다. 갈애와 무명에 동반하여 집착이 일어나는데, 이 집착 중에
가장 강력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집착이다. 나에대한 집착을 아집(我執)이라 하고, 나의 것에 대한 집착을 아소집(我所執)이라 한다. 아집과 아소집이 있는 한, 열반은 없다.
원래 불교에서 ‘안-아뜨만’을 내세운 것은 아집과 아소집이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보고, 이 집착을 소멸시키기 위해서였다는 학설이 있다.
쉽게 말해 ‘안-아뜨만’을 일반인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대로 ‘무아’라고한다면, 원래의 무아(無我)설은 ‘나’라고 생각되고 있는 어느 것도 진실로는 ‘나가 아니다’라는 것에 눈뜨게 함으로써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집착을 소멸시키기 위해서 가르친 것이라는 말이다. 내가 나라고 할 수 있으려면 어떤 요건을 갖추어야 할까? 우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동일한 사람이라야 ‘나’라고 할 수 있다. 바라문교에서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아뜨만을 상정하여 이 요건을 충족시킨다. 즉, 내면의 아뜨만은 불변이며 이 아뜨만이 바로 나라고 한 것이다. 불교는 형이상학적 세계를 중시하지 않는다. 괴로움의 소멸, 즉 열반은 형이상학적 세계와 관련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신 직접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현실 세계를 중시한다. 현실 세계에 대한 무명·갈애·집착 등에 의해 괴로움은 일어나고, 그러한 무명 등이 소멸될 때 괴로움은 소멸된다고 보는 까닭이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괴롭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현실 세계이지 형이상학적 세계가 아니다. 게다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인한 괴로움은 아뜨만을 모르기 때문에생겨난 것이 아니다. 사랑은 여러 조건에 의해 생겼다가 사라진다는 진실에 대한 뼈저린 자각이 없어서(=무명) 상대를 끝없이 소유하려 하고(=탐욕)집착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무명과 탐욕과 집착이 소멸할 때괴로움도 소멸하는 것이지, 아뜨만이 있다거나 없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괴로움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불교의 입장에서는 내가 나라고 할 수 있는 동일성도 현실 세계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직접 인식 가능한 현실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나라고 여기고 있을까? 내 몸(色)과 정신(受·想·行·識)이야말로 나라고 할만하다. 그렇다면 내 몸과 정신이 늘 동일하다면, 나는 나일 수 있다. 어제는 철수의 몸과 생각이었다가 오늘은 순이의 몸과 생각이라면 나라고 할수 없을 것 아닌가.
그런데 내 몸과 정신은 연기(緣起)의 소산물이다. 조건에 의해 생겨났다가 조건이 다하면 소멸하는, 무상한 존재일 뿐이다. 이 몸도 언젠가는사라지고, 기쁨도 잠깐이며 영원한 미움도 없다. 이것은 누구나 스스로생생하게 인식할 수 있고 자각할 수 있는 사실이다. 내 몸도 정신도 이렇게 동일성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나’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을 ‘나’ 또는 ‘나의 것’이라고 오인해서 집착해서는 안 된다.
초기 경전에 무수히 나오는 “색은 무아(無我, 안-아뜨만)이고, 무아인 것 그것은 내가 아니고, 나의 것이 아니다”, “수·상·행·식은 무아이고, 무아인 것 그것은 내가 아니고, 나의 것이 아니다”는 구절은 내 몸과 정신이 내가 아니며 나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몸을 색(色)이라고 표현하며, 정신은 수·상·행·식의 네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수(受)는 좋고 싫다는 등의 느낌, 상(想)은 이미지와 개념을 형성하고 언설을 일으키는 작용, 행(行)은 의지, 식(識)은 마음 그 자체를 가리킨다. 그리고 색·수·상·행·식을 통틀어 부를때는 ‘오온(五蘊)’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결국 오온은 육체와 정신을 다섯으로 세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색이 육체이며 나머지 넷은 정신에 해당한다. 애초의 무아설은 이렇게 바라문교적인 아뜨만을 도입하지 않고, 나라고 생각하는 내 몸과 정신이 실상은 ‘나’와 ‘나의 것’이 아님을 자각시켜서,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설해진 것으로볼 수 있다. 그러했기 때문에, 직전 호에서 살펴보았듯이 초기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아뜨만은 바라문교의 아뜨만 개념과는 다르게 ‘병에도 걸리지 않고 자기 뜻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전능자’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우리들이 가장 원하는 바를 갖춘 것을 ‘아뜨만’이라 규정한 다음,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그 어느 것도 실은 이 아뜨만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하여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집착에서벗어나는 지혜를 얻게 하려 한 것이 아닐까?
요컨대 ‘나’와 ‘나의 것’이라 불리는 것은 수많은 인연(=조건)들에 의해 형성되었다가 인연이 다하면 소멸하는 무상한 것이어서, 본인의 뜻대로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각성시켜, 본인의 몸과 생각과 소유물에 대한 집착을 여의게 하기 위한 것이 무아설의 본래 취지였다고 추정하게 된다. 아무리 몸이 건강하고 오래 살고 싶어 해도 때가 되면 병이 들고 세상을 떠난다. 늘 행복한 생각만 들기를 바라지만 불현듯 고민과 불만이 고개를 든다. 이 모든 것이 본인이 쌓아 온 인연의 힘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니, 본인이 원하는 대로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집착은 버리는 것이 좋다. 그런 집착 없이 그저 순간순간 최선을 다할 때 열반은 멀지 않는 곳에있다.
장휘옥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하여 석사 과정
졸업. 이후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 대학원에서 화엄 사상으로 석사・박사 학위를 받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불교학개론 강의실 1, 2』, 『무문관 참구』(공저), 『새처럼
자유롭게 사자처럼 거침없이』 등 10여 권의 책을 썼으며, 『중국불교사』 등을 번역했다.
김사업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한 뒤, 유식 사상을 전공으로
석사・박사 학위 취득. 일본에 유학하여 교토대학(京都大學) 대학원에서 불교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수업』,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공저), 『무문관 참구』(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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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휘옥ㆍ김사업 두 사람은 전문 수행자의 길을 걷기 위해 2001년 함께 대학 강단을 떠나 남해안의 오곡도로 들어갔다. 이후 세계의 고승들을 찾아다니면서 수행했으며, 2003년부터는 간화선 수행에만 전념하여 일본 임제종 대본산 향악사의 다이호(大峰) 방장 스님 지도로 1,000여 회에 이르는 독참을 통해 피나는 선문답을 나누며 수행해 왔다. 간화선 수행 전문도량 ‘오곡도 명상수련원’(www.ogokdo.net)에서 수행・지도하고 있다.
장휘옥, 김사업 bulkwanger@naver.com
이글은 <월간 불광> 8월호에 실린 것으로, 장휘옥 김사업 두 수행자가 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