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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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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씨름서 승리가 전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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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jpg» <내말 사용 설명서> 책 안의 삽화


어떻게 말하는게 최선일까. 말은 비단보다 곱기도 하고, 칼보다 날카로운 비수이기도하다. 청소년들이 사용하는 험한 말 속에는 그들의 욕구불만과 스트레스가 담겨있지만, 반드시 그렇치만도 않다. 잘못 길들여진 말버릇이 되풀이되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돌멩이를 던져 수많은 개구리들을 괴롭히는 경우도 많다.
 

 말-.jpg 평화도서관 지킴이이자 30여곳에 ‘꼬마평화도서관’을 열고있는 변택주 작가가 <내발 사용 설명서>(그림 차상미)를 냈다. 원더박스출판사가 청소년자기돌봄 시리즈 첫권으로 낸 이 책은 ‘십대를 위한 생각하는 말하기’란 부제가 달렸다.
 “말을 가꾼다는 건 나를 정성껏 돌보는 일아야. 말을 잘 쓰면 쓸수록 내가 더 소중해지거든”
 

 표지글에서 아이들의 심성에 푸르름을 살려주는 말씨를 뿌리려는 변작가의 마음이 느껴진다. 이 책은 말 문제로 고민이 많은 열다섯살 벼리와 말실수 때문에 이불킥하는 도서관 할아버지의 문답식으로 되어있다. 아마도 도서관 할아버지는 변 작가 자신일 것이다.
 이 책이 청소년들을 겨냥했지만, 좋은 대화법이 필요한 것은 청소년들만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특히 사회적 갈등 해소와 평화를 위해서도 절실하다. 요즘은 다른 정파 간, 나라 간에도 오가는 말들이 워낙 험해서 그야말로 누가 누가 더 비수를 깊게 찌를까라는 ‘말폭탄’ 게임을 벌이는 듯하다.


 작가는 ‘애써 어렵게 말하려들지말고 쉬운 말을 쓰라’거나 ‘말을 할 때는 서로 눈을 맞춰가며 하라’, ‘말 잘하는 비결은 듣기에 있다’, ‘잘 물어봐야 좋은 답이 나온다’는 등의 가장 상식적인 대화 비결로부터 아이들을 ‘말’속으로 이끈다.
 


 그는 권장할 사항과 해서는 안되는 금지사항을 구분지었다. 대화를 할 때는 서두르지 말고, 미워하는 마음이 들 때는 말을 좀 쉬고, 너무 부담스런 친구와는 꼭 사이 좋게 지내지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준다. 그러나 어떤 친구에게도 혐오표현, 즉 약자나 소수자를 비하하고 멸시하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분명히 한다.


 특히 그는 반대의견을 헐뜯기로 오해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학급회의나 학생회에서 작은 문제가 하나라도 있으면 두고두고 비판하는 애가 꼭 한둘이 있어. 오래전 얘기까지 끄집어내서는 쟤는 저번에 저랬고, 얘는 이번에 이랬다면서 깐족대서 듣기 싫어 죽겠다’는 벼리의 물음에 도서관아저씨는 “비평과 비난(헐뜯기)를 구분해야한다”며 이렇게 답한다.
 “회의를 하면서 어떤 사안이 다른 뜻이 담겼으면 좋겠다거나 담아 낸 뜻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다고 비평하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야. 그러나 비난, 헐뜯기는 ‘남이 저지른 허물을 드러내거나 꼬집어 나쁘게 말하는 것’을 일컫는 말로 사람을 겨누는 화살이야. 그러니까 어떤 문제를 다룰 때 쟁점만 놓고 애기하면 비판이나 비평이 되고, 쟁점 소용돌이 안에 서 있는 사람까지 싸잡아 꼬집는 것은 비난, 헐뜯기라고 해야 돼. 어떤 문제를 놓고 회의를 할 때도 마찬가지야. 어떤 사람이 말하는 결이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을 몰아세우거나 미워해서는 안 돼. 뜻이 다를 뿐인데 그 사람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야.”


변1-.jpg» 강연을 하는 변택주 작가



 또한 작가는 ‘갈등이 있다고 함께 살 수 없다’는 근본주의적 성향이 누그러트릴 수 있는 물꼬를 열어준다. 그는 “갈등을 푼다고 하면 그 안에 담긴 문제가 싹 사라지기를 바라는데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서로 다른 생각을 바꿔 놓을 수는 없기 때문에 갈등 요소가 아주 없어지지는 않는다”며 “바뀌지 않을 것을 두고 뒤엉켜 물도 뜯기보다는 물꼬를 틀어 어울려 살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즉 ‘어찌 보면 잘되지 않는 게 당연할 수도 있는거니까, 너무 잘 풀리라라 기대한 탓에 힘이 빠지지 않도록 마음을 잘 살피는게 좋다’는 것이다.


 벼리와 도서관할아버지의 대화 중엔 ‘반말을 해도 될까, 존댓말을 써야 할까’란 요즘 논쟁중인 사안도 담겨 있다. 도서관할아버지는 2002년 우리나라 축구 국가대표팀이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루도록 이끈 히딩크 감독의 사례를 들려준다. 히딩크는 부임하자마자 선수들을 모아 놓고 경기장 안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니까 선후배 가릴 것 없이 말을 놓고 서로 이름을 부르자고 했다고 한다. 막내 이천수가 최고참 홍명보에게 “명보, 여기!”하며 부를 수 있게 했다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1-.jpg» <내말 사용 설명서> 책 안의 삽화


 “무엇보다 팀워크가 앞서야 하고 그때 그때 상황에 맞게 전술을 펼쳐야 하는데, 선배랍시고 이래라 저래라 하고 후배는 이를 고스란히 따르기만 한다면 현장에 맞는 팀플레가 나올 수 없다는 거지. 히딩크 감독은 감독이 하라는 대로만 하지 말고 제 생각과 다르다면 언제든 따질 건 따지라고 했대. 높낮이 없이 팀이 나아질 수 있는 쪽으로 나아가자는 얘기지.”
 변 작가는 “서로 ‘해라’를 하면 ‘합시오’하는 것보다 무척 가까운 느낌이 들고 속내를 털어놓기가 한결 쉬어지기도 하지만 힘 있는 쪽이 힘 없는 쪽이 허리를 숙이도록 만든 말버릇이어서 마뜩치않다”며 위아래가 아니라 거리감에 따라 반발과 존댓말을 쓰는 프랑스의 사례를 들어 반말을 쓰든 존댓말을 쓰든 서로 평등하게 하도록 이끌었다.
 또 변 작가는 뭔가를 가르치려 들기보다는 가리키라고 한다. 뭘 안다고 생각하면 바득바득 우기기 쉬워 바람직한 쪽으로 의견을 모으기가 어려우므로 모름을 지키며 겸솔해져야 서로 힘을 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대미는 말솜씨로 여진이 차지하고 있던 강동 6주를 받아낸 고려의 서희 장군 이야기다. 그런데 변 작가는 서희장군이 아니라 상대 외교가 소손녕을 ‘외교 천재’라고 치켜세운다. 역사에선 서희의 맞수인 소손녕이 서희의 담판에 휘둘려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와서도 오히려 강동 6주를 내주고도 모자라 적지 않은 예물까지 실어서 보낸 어리숙한 사람으로 그려졌지만 소손녕은 그런 바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비에스-.png» <EBS다큐프라임> 갈무리.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 모습


 “소손녕이 고려를 쳐들어온 까닭은 가장 큰 맞수인 송나라와 고려가 맺은 동맹을 깨는 데 있었어. 송나라와 패권을 다툴 때 고려가 뒤를 치지 못하도록 하려는 데에 전쟁 목적이 있었던 거지. 첫 싸움에서 고려 선봉대를 간단하게 제압한 소손녕은 80만 대군이 고려를 휩쓸기 전에 항복하라고 고려 조정을 윽박질렀어. 하지만 안융진에서 벌인 전투는 거란에게 불리한 쪽으로 흐르고 있었지. 사실 거란으로서는 전쟁을 오래 끌어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었어. 전쟁이 길어지면 군대를 먹일 식량을 현지에서 대야 하잖아. 그런데 고려 조정에서는 이미 한 차례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식량을 가져가게 했고, 여차하면 남은 식량을 모두 없애 버리고 도망칠 계획도 궁리하고 있었거든, 쫄쫄 굶는 군대로는 제대로 싸우기는 커녕 살아서 돌아갈 일도 막막했겠지. 역사 연구자들 말로는, 소손녕이 끌고 온 군사가 80만 대군이 아니라 6만 명이 채 되지 않았을 거래. 소손녕은 이 사실을 들키면 어쩌나 조마조마하지 않았을까.”
 따라서 소손녕은 진게 아니라 서희와 더불어 서로를 살리는 게임을 봐야한다는 것이며, 전장이 아닌 외교무대, 협상에서 패배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개인간 뿐 아니라 국제 관계에서도 때론 앞에서 이기고 뒤로 지거나 앞에서 지고, 뒤로 이기는 경우도 있고, 지는 것이 이기고, 이기는 것이 지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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