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밤 7시 서울 종로구 익선동골목 레스토랑 오마래에서 ‘노촌 이구영 추모음악회’가 열렸다.
일제와 분단사의 고통을 한몸에 안고 현대사 격랑을 헤쳐온 이구영(1920~2006)은 신영복에게 감옥에서 한학과 서예를 가르친 스승으로 유명하다.
이구영은 충북 제천에서 조선의 문장가 월사 이정귀의 후손이자 의병활동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한학을 배우다 청년시절 상경해 기독교청년회(YMCA) 청년회 학교 중등부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에서 잠시 수학한데 이어 황한의학원에서 한의학을 공부하면서 사회주의를 접한 뒤 항일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고향의 친구들과 함께 ‘월악동지회’를 조직해 독서 토론을 하면서 항일 운동을 시작해 서울 영등포에서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경기도 포천군 백운동을 근거지로 조직한 빨치산 활동에도 가담했다. 일제 치하였던 1944년엔 독서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8개월간 옥살이를 하며 고문을 당했다.
이구영은 한국전쟁 때에는 서울에서 토지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패주하는 인민군과 함께 월북했다. 이어 평북 강계의 피난지에 세워진 병원에서 환자들을 치료하고 회복된 환자들을 가르쳤으며, 휴전 후에는 도서관에서 일하다가, 중앙당에 소환되어 대남 공작원 교육을 받고 1958년 7월 남파되었다가 체포되었다. 이구영은 접선에 실패하고 부산의 여인숙에 숨어있던중 일제 시대 그를 잡아 고문했던 형사에게 발각돼 체포됐다.
이구영은 22년간 감옥에 있다가 1980년 출소했다. 이어 이문학회를 설립해 한학을 가츠쳤고, 호서의병사적과 의병운동사적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사망 전 소장하고있던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충북 제천의 의병도서관에 기증했다. 감옥에서 이구영에게 서예를 배운 심지연 교수는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격랑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온 노촌 이구영 선생의 팔십년 이야기>라는 책에서 노촌의 파란만장한 삶을 조명한 바 있다.
» 감옥에서 한학과 서예를 가르쳤던 신영복과 마주한 노촌 이구영. 사진 <케이비에스>의 <인물현대사> 갈무리
이날 추모음악회가 열린 오마래는 이구영이 생전에 살던 집으로, 지금은 외손자 이식열씨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이다. 또한 이구영의 제자들이 여전히 이문학회 주최의 서당을 운영하는 곳이다. 오마래에선 매주 월요일 저녁 7~9시엔 고교교사인 배기표 선생님의 지도로 <장자> 원문을 읽고, 매주 목요일 저녁 7~9시엔 김영복 케이옥션 고문의 지도로 <자치통감>을 읽는다. 둘은 모두 이구영 생전에 한학을 배운 제자들이다. 김영복 고문은 <케이비에스>의 <진기명기>에 출연해 명품들을 감정하고 있고, 배기표 선생님은 신영복을 따르는 이들이 만든 <더불어숲> 상임이사이기도 하다.
제사는 이문학회 공부방에서 봉행됐다. 이 공부방은 더불어숲의 산파였던 고 이승혁이 ‘더불어숲’이란 1인 출판사를 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 방엔 방엔 이구영이 쓴 서예 글씨 강건중정(剛健中正·강직하고 건전하고 중립하고 공정할 것)과 금성옥진(金聲玉振· 지혜와 덕을 조화롭게 갖추라), 신영복이 쓴 춘풍추상(春風秋霜·남을 대할 때에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하고, 자신에게는 가을 서리처럼 엄격하게 한다) 등 세점의 편액이 걸려 있었다.
이날 추모 음악회에선 제자들이 제사를 지낸뒤 음악회가 이어졌다. 찬조 출연한 음악회엔 가수 김광석이 자신의 노래와 고 김광석의 구슬픈 곡조를 이어불러 참석자들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또 이구영의 제자인 허만석 전 여행사 대표는 스승을 눈물로 회고하며 섹스폰을 연주했다. 이어 소프라노 섹스폰 윤맹전, 기타를 곁들인 김상현의 노래, 권혜진의 노래 공연이 이어졌다.
이구영의 제자들은 10여년간 기일에 제사만 지내다가 지난해부터 기일에 맞춰 추모음악회를 하고 있다. 이날 음악회엔 이문학회 회원인 윤창원 서울디지털대 교수, 이성용 유브레인 대표와 더불어숲 회원들과 더불어이승혁의 정한진 대표 등 50여명이 함께 했다. 조붕구 코막중공업 대표는 추모제 참석자들에게 먹거리 제공을 자청하기도 했다.
» 노촌이구영추모음악회에서 스승을 회고하는 제자들. 오른쪽부터 더부어이승혁의 정한진 대표, 이문학회 훈장인 배기표 교사와 김영복 케이옥션 고문
추모제가 무르익자 고인에 대한 추모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오랫동안 스승을 가깝게 모신 제자들의 회고담들은 아직도 다 드러나지않은 ’현대사 인물’에 대한 퍼즐 조각을 맞추었다. 제자들은 남에서 두딸을 두고 월북한 뒤 남쪽의 가족들과 헤어진 뒤 이산의 아픔을 안고 살았고, 북에서 다시 아내와 아들 딸을 두고 남하해 다시 북의 가족과 이산의 아픔을 겪으며 북의 가족들이 고통을 겪을 것을 두려워해 전향하지 않은 이구영의 안타까운 삶을 이야기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스승의 아픔을 알기에 허만석과 이승엽 등 제자들이 스승의 생전에 연길까지 가서 북의 가족과 접촉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김영복 고문은 “노촌 선생님은 어려서 독선생을 아예 모셔와 집에서 한학을 공부했는데, 혼자 공부할 수가 없어서 동네 아이들을 데려와 함께 배웠다”며 “당시는 정해진 범위를 다 암송하면 나가서 놀 수 있었는데 노촌 선생님은 영민해서 스무번 정도 읽으면 다 외워 늘 일찍 혼자 나가놀곤했는데, 훗날 그 때 머리가 둔해 100번씩 읽고서야 외웠던 친구들이 더 오래도록 글귀를 기억하는 것을 보고, 공부란 빠르게 하기보다는 그렇게 우직하게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다”고 말했다. 김 고문은 또 “노촌 선생님은 평생 ’민중’을 이야기했지만, 자신은 양반의 자제로서 귀족적인 면모를 감출 수 없었다”며 “많이 가진 집의 자제로서 어려서부터 보고 배운 바가 있어서 이재에도 밝았고, 미래를 읽는 눈도 있었다”고 말했다.이구영은 해방 공간에서 지나치게 원칙주의자였던 박헌영에게는 비판적이었고, 중도 좌파인 여운형을 지지했다고한다. 배기표 교사는 “노촌선생님은 책에 나와있지않은, 옛어른들로부터 전해들은 숱한 이야기를 해주곤했다”면서 “형가가 진시황을 암살하려던 대목을 이야기할때는 마치 눈앞에서 그 일이 벌어지는듯 생생하게 말하곤 했다”고 전했다.
» 노촌 이구영의 외손자인 이식열 오마래 대표가 인삿말을 하고 있다.
» 노래를 부르는 싱어송 라이터 김광석
이구영의 외손자 이식렬 오마래 대표는 이구영의 출소후 한집에 모시고 살면서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해주었다. 그는 “외할아버지는 15살때 부모님 몰래 하천부지를 개간해 과수원을 만들어 마을의 못사는 사람들이 벌어먹고 살 수 있게 도왔다”면서 “훗날 박정희가 새마을운동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헌마을운동을 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이구영의 호 노촌은 충주호를 만들 당시 수몰됐던 고향마을이 이름이다. 그는 또 “외할아버지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는 땅들은 있었지만,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부유했다고 볼 수 없는 반면 안동김씨인 외할머니가 부자여서 시집을 오면서 귀한 그림과 도자기들을 가져와 홍제동 집에 살때까지 있었는데, 사찰을 나온 형사가 그 귀중품들을 자기 마음대로 들고나가면 외할머니가 부르르 떨곤했다”고 말했다. 대학 91학번인 그는 “외할아버지에게 ‘왜 사회주의자가 됐느냐’고 물었더니, ‘일본놈들 잡으려고 그랬지’라고 답했다”며 “한번은 김일성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미쳤지. 전쟁을 일으켜 그많은 사람을 죽게했으니’라고 답했다”고 전했다. 그는 “외할아버지는 일제 시대 때 어깨를 뒤로 꺽어 공중에 매달아놓고, 물고문을 하고, 손톱 밑을 날카로운 것으로 찌르고, 성기까지 찌르는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면서 “남한에서 잡혔을 때 다시 그런 고문을 당하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담요에서 밤새 실을 뽑아 목을 맸으나 실들이 끊어지는 바람에 자살에 실패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제자들은 조선의 마지막 선비였던 이구영이 한 가장 큰 욕은 ‘사람 못될 놈’이었다고 입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