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골 가는 길
조 선장 아내의 아버지
1988년 10월 25일 아침이다. 졸린 눈을 비비며 문을 나서는데 싱그러운 바다냄새가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신기하게도 밤새 무거워졌던 몸뚱이가 날아갈듯 가벼워졌다. 나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폈다. 그때 바람이 다가와 내 몸을 감싸 안았다. 바람은 내 뺨과 목을 휘감고 어루만지며 반가워했다. 사람이 몹시 그리웠던 모양이다. 바람결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온몸에 사랑의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햇살도 내 얼굴을 콕콕 찌르며 반가워했다. 나는 얼굴에 묻은 햇살로 세수를 했다. 그랬더니 손바닥에서 햇살 냄새가 났다.
장군바위 꼭대기에 갈매기 한 마리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갈매기는 날갯짓을 했다. 갈매기도 나를 알아보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얼른 방으로 들어가 카메라를 들고 나왔다. 그런데 고새 갈매기가 날아가 버렸다. 내가 자기를 반겨주지 않고 돌아섰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냥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할 걸 그랬다. 사진도 못 찍고 괜히 갈매기한테 미움만 샀다.
조 선장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아침 인사를 건넸다. 조 선장이 그렇게 인사하는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사실 나는 어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조 선장의 코 고는 소리는 거의 굴착기 수준이었다. 코를 골 때마다 창문이 흔들렸는데 그것이 꼭 바람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침을 대충 해먹고 조 선장과 함께 길을 나섰다. 조 선장 아내의 아버지를 추모하며 고개 넘어 물골까지 갔다 오기로 했다. 계단이 짧은 듯 길게 느껴졌다. 앞서가는 조 선장의 넓은 등에서 외로움이 느껴졌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갈매기 소리가 저리도 요란한데 섬은 고요하기만 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 고요가 아니라 소리가 제대로 들리는 것이 고요였다. 중간쯤 올라가는데 가파른 곳이 나타났다. 대략 육, 칠십도 되는 급경사였다. 갑자기 강력 접착제를 밟은 것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한순간에 온몸이 저려왔다. 밑에서 올려다볼 때와는 달리 꽤 높게 느껴졌다. 다시 고개를 돌리고 숨을 고르는데 불쑥 두려움이 나타났다. 잘못하면 떨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 고소공포증이 있었나?
살짝 고개를 돌리니 바람에 살랑대는 마른 풀들이 보였다. 나는 그 풀들을 잡초라고 생각 했다. 하지만 잡초라고 하기에는 꽤나 늠름한 모습이었다. 그때 아주 자그마한 꽃들이 눈에 들어왔다. 땅에 납작하게 붙어있는 모습이 여간 대견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사나운 바람과 싸우려 하지 않고 스스로 몸을 낮춘 저 모습, 그것은 굴복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저렇게 꽃을 피운 거겠지. 조 선장은 이 고즈넉한 섬에서 어떻게 혼자 사나 싶었다. 가만있자, 그렇다면 늠름한 저 풀들도 잡초가 아니겠군. 척박한 땅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생명들! 이름 없는 풀이라 하여 어찌 함부로 잡초라고 하는가. 내가 아주 큰 잘못을 했다. 저 풀은 이름이 없는 잡초가 아니라 내가 그 풀의 이름을 모르는 것이다.
조 선장이 쩔쩔매는 나를 내려다보며 밧줄을 던졌다. 그제야 움직이지 않던 발이 떨어졌다. 밧줄을 잡고 올라와보니 한 평 남짓 되는 평지가 나왔다. 그곳은 바람도 덜 불고 아늑하기까지 했다. 나는 그 자리를 작업실로 점찍어두었다. 다시 왼쪽으로 꺾어 올라와보니 넓은 바다와 동도의 헬기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동도를 바라보며 조 선장과 나란히 앉았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이 옛날에 제 장인이 물 길러 다니던 길이래요.”
이어진 길을 바라보니 비탈 쪽으로 난간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어떤 것은 많이 훼손되었고 어떤 것은 쓰러질 듯 서 있었다. 하지만 그 하나하나가 모두 고귀하게 보였다. 이렇게라도 계단과 난간을 만들어 길을 낸 사람은 조 선장 아내의 아버지였다.
그는 1965년부터 물골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그러나 파도치는 날이 잦아서 물골 반대편에 있는, 현재의 조 선장 집이 있는 터에다가 토담집을 짓고 생활을 했다. 물이 필요하면 배를 타고 돌아서 물을 길어왔다. 하지만 배를 띄울 수 없는 날엔 비탈을 오르내려야 했다. 1981년에는 아예 주민등록의 주소를 독도로 옮기고 최초의 독도주민이 되었다. 그는 본격적인 독도생활을 하기 위하여 배가 닿을 수 있는 조그만 선착장을 만들었다. 어느 정도 모양새가 갖추어지자 1984년에는 뜻을 같이한 사람들과 함께 계단을 만들기 시작했다. 계단이 완성되면 위험하게 비탈을 오르내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태풍이 몰려왔다. 1987년 여름, 그가 애써 일궈놓은 생활터전은 태풍에 휩쓸려 박살이 나고 말았다. 절망을 딛고, 그는 복구에 필요한 자재를 구하러 뭍으로 나갔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뇌출혈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언덕 아래에서 파도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풍경이 좀 다르긴 하지만 영화 ‘빠삐용’의 마지막 장면이 잠시 스쳐지나갔다. 빠삐용은 악마의 섬을 탈출해 자유를 찾아가지만 나는 거꾸로 도시를 탈출해서 독도에 온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까 정말 내가 새로운 세상에 와있는 것 같기도 했다.
다시 조 선장이 앞장을 서고 내가 뒤따랐다. 갈매기들이 난간 위에 앉아서 우리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독도의 어떤 물고기는 사람을 봐도 피하지 않는다던데 갈매기도 그런 것 같았다. 몇몇 갈매기들이 공중에 떠있는 상태에서 나를 살펴보았다. 갈매기 눈은 무섭게 보이기도 했지만, 오래 쳐다보니까 다정하게 보이기도 했다. 난간 아래로는 마른풀들이 나부끼고, 먼 바다에는 배 두 척이 한가로이 지나가고 있었다.
사막을 걸어가는 것이 힘든 것은 나무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네 인생길에도 사람이 없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독도엔 나무도 없고 사람도 없으니, 독도에서 혼자 산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힘들 것 같다. 고갯마루를 지나자 탕건봉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탕건처럼 생긴 바위다. 오른쪽으로는 서도에서 가장 높다는 봉우리가 보였다.
“조 선장, 저 뾰족한 봉우리 이름이 뭐야?”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조 선장이 모르면 누가 알아?”
“아직까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말에 걸음을 멈추고 다시 한 번 봉우리를 쳐다보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를 맞이하는 봉우리인데, 어찌 봉우리 이름이 없단 말인가? 저 봉우리가 우리에게 날마다 아침햇살의 기운을 전해줄 텐데 이름이 없다니…
나는 봉우리에 오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산행을 할 때도 봉우리는 그냥 바라보고 지나간다. 왠지 봉우리는 올라서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서도의 봉우리는 뾰족해서 오르기가 어렵다. 참 다행이다. 아무도 그 봉우리에 오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겨레와 내 나라를 지켜주는 고귀한 봉우리다.
물골
앞서가던 조 선장이 갑자기 배낭을 내려놓더니 이리저리 날뛰고 있었다. 마치 굶주린 고양이가 쥐를 좆는 것 같았다. 그때 토끼 한 마리가 보였다. 날뛰던 조 선장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꼬꾸라졌다. 그 앞으로 토끼 한 마리가 정신없이 도망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옷을 털며 일어나는 조 선장에게 괜찮으냐고 물으니, 저녁거리를 놓쳤다며 무척 아쉬워했다.
독도에 토끼가 살고 있었다는 걸 알고 나니 새로운 동무가 생긴 것처럼 반가웠다. 그런데 이런 메마른 곳에 뭘 먹을 것이 있다고… 하필, 그때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어린 토끼가 눈에 들어왔다. 주위에는 토끼털이 어질러져 있었다. 하늘을 바라보니 솔개 한 마리가 유유히 떠있었다. 그렇다면 저 솔개의 먹이가 되려고 살고 있었단 말인가? 하긴 조 선장도 토끼를 잡으려고 했었지. 그 순간 어디에선가 갈매기들이 몰려왔다. 솔개를 쫓아내기 위해서였다. 공중에서 빙빙 돌고 있던 솔개가 약을 올리며 더 높이 날았다. 갈매기들은 흥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소리를 지르며 공격을 했다. 끼룩끼룩 소리가 독도 하늘을 덮었다. 이윽고 힘을 뽐내던 솔개가 물러나고 말았다. 고갯마루를 지나자 뿌리를 내린 몇몇 작은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드문드문 어린 나무들도 보였다. 조 선장이 투덜대며 말을 했다.
“토끼 놈들만 아니었으면 제법 많이 자랐을 텐데…”
“토끼들이 왜?”
“고놈들이 저 어린 나무들을 죄다 갉아먹는다, 아닙니까.”
그 얘길 듣고 나는 멈칫했다. 토끼를 반가운 동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원수로 여겨야 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하긴 오늘의 동지가 하제는 적이 되기도 하지. 서도 길은 동도 길보다 많이 메마른 편이다.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아서인지 흙모래가 많이 쌓여 미끄러웠다. 이따금씩 돌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느 산길 같으면 낙엽들이 수북할 텐데 이 길은 마른풀과 돌들만 눈에 보였다. 물골로 이어지는 계단 길도 만만치 않았다. 오히려 조 선장 집 쪽에서 올라오는 길보다 더 미끄러웠다.
계단을 다 내려와 왼쪽으로 꺾어지니 조그만 굴이 보였다. 그 굴속에 샘이 있었다. 나는 독도에 살고 있지도 않으면서, 독도에 샘이 있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게다가 ‘물골’이라는 말도 예뻐서 얼른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와 보니 내가 생각했던 샘이 아니었다. 나는 물골이라 하여 물이 굉장히 많이 나오는 줄 알았다. 샘물을 떠 마셔보았다. 짭짜름한 물맛이 운동선수들이 즐겨 마시는 이온음료 같기도 했다. 물이 얼마나 귀했으면 물골이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 선장 아내의 아버지는, 처음에 이곳에다 움막을 치고 살았던 모양이다. 아마도 샘이 있다는 걸 알았기에 그리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파도가 높은 날에는 바닷물이 샘까지 밀려왔다. 그런 날은 아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고개 너머(지금 조 선장이 살고 있는 집)로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바닷물이 샘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가 쌓았다는 작은 방파제를 바라보면서 그때의 상황을 그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사명감 없이는 독도에서 살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이 샘을 발견한 사람은 독도수비대를 이끌던 홍순칠 대장이었다. 그는 울릉도 청년들을 모아 독도의용수비대를 창설하여 3년 8개월(1953년4월20일-1956년12월30일) 동안 독도를 지켰다. 만약 독도의용수비대가 없었더라면 독도는 온전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물골 쪽은 조 선장 집이 있는 쪽보다 해를 덜 받았다. 그런 까닭 때문인지 서늘함이 느껴졌다. 그렇지 않아도 가끔 귀신 소리가 난다고 조 선장이 말했던 터라 음산하기까지 했다. 맑은 바닷물 속으로 이상한 물체가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녹슨 폭탄이었다. 조 선장이 말했다.
“오래 전에 미국비행기가 투하한 거래요.”
“미국 공군이 독도를 폭격연습장으로 썼다더니, 그게 사실이었군.”
1948년 6월 어느 날, 미 공군기가 독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우리 어부들을 향해 폭탄을 투하했다. 많은 어부들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그 당시 미국은 실수로 폭격했다고 말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고 있다. 미국은 또 얘기 했다. 배 11척에 사람 14명이 죽었다고. 살아나온 어부들이 말했다. 배 32척에 적어도 150명 이상이 죽었다고. 오늘날까지 미국은 그것에 대한 정식 사과가 없다. 사과는커녕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잊힌 사건이 되고 말았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 두 나라와 우호관계를 맺고 있지만 한국과 일본이 대립할 경우 어떻게 반응을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에 대한 일본과 미국의 생각은 독도에서 선명하게 나타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료를 위하여 연합국과 일본은 평화조약을 맺는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미국은 노골적으로 일본 편에 선다. 미국은 평화조약의 1차 초안에서 5차 초안까지는 독도를 한국영토로 명문화 했는데 6차 초안부터는 독도를 삭제시킨다. 무슨 거래가 오고간 것이 틀림없다. 아마, 미국이 독도를 폭격연습장으로 사용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바람에 평화롭게 고기잡이 하던 우리 어부들만 희생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미국의 속내는 알 수가 없다. 평화롭게 고기잡이하던 우리 어부들한테 폭탄을 쏟아 부은 걸 생각해보라. 독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처참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평화롭게 고기잡이하던 우리 어부들이 폭탄에 희생되는 것을. 가족들 마음이야 오죽하겠냐마는 나라의 자존심도 말이 아니다. 독도에 귀신이 있다는 것은, 그때 희생된 원혼들의 넋이 아직도 독도를 떠나지 못하고 있음이다.
아리랑고개
가득 채운 물통을 메고 다시 조 선장 집으로 향했다. 내려왔던 길이 올라가는 길이 되었다. 물 무게 때문일까, 갑자기 길이 멀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길을 낸 사람이 있었으니 고마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리 뜻이 훌륭해도 길이 없으면 뜻한 바를 이루기가 어렵다. 공기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듯, 지금껏 살면서 길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고 살았다.
중간쯤 오르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뚝~’ 하고 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돌들은 예고도 없이 떨어졌다. 위에서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돌 하나가 내 얼굴을 살짝 비껴갔다. 맞았다면 정말 큰 사고로 이어질 뻔했다. 안전모를 쓰지 않고 온 것이 조금은 불안했다. 하지만 앞서 간 조 선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나마 ‘낙석’ 이라고 소리쳐주는 게 고마울 뿐이었다. 돌 떨어지는 소리를 듣다 보면 독도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라의 고통을 혼자서 감내하며 조용히 흘리는 눈물, 그 눈물이 돌이 되어 구르는 거라고 생각했다.
고갯마루에 앉아 쉬면서 흩어져있는 돌 몇 개를 주워 모았다. 정성들여 아주 조그만 탑을 쌓았다. 바람이 불면 금방 무너질 탑이지만 그래도 탑은 탑이었다. 우리 민족의 가슴에도 아리랑 고개가 있을 터인데 지금도 있을지 모르겠다. 있다면 그 아리랑 고개에 통일의 탑을 쌓아 보자. 하지만 그 돌탑은 왜 그리도 잘 무너지는지. 왕이 무너트리고 백성들이 쌓는 것 같다. 무너지면 또 쌓고, 무너지면 또 쌓고……. 아, 얼마나 더 무너지고 얼마나 더 쌓아야 우리는 하나가 될까? 따로 가지 말고 함께 가면 되는 것을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그때였다. 눈앞으로 노래 하나가 지나갔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노래, 그 노래는 아리랑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노래가 금방 사라졌다. 좀 더 자세히 봐야하는 건데… 하지만 다행히 내 마음에 노래의 무늬가 희미하게 찍혀있었다.
이 길을 툭 떼어다가 지리산에 갖다놓으면 예쁜 오솔길이 되겠지만, 안타깝게도 독도에서는 메마른 길이다. 그렇지만 이 길은 오랜 세월 소금바람에 절여진 길이다. 겉으로는 물 길러 다니는 길이지만 길 밑으로는 독도의 꿈이 흐르고 있다. 바람에 흩날리는 마른 풀들, 얼핏 보기에는 외로워 보이지만 독도의 꿈은 그렇지 않다. 하나 되는 바다를 꿈꾸고 있기에. 나는 믿는다. 언젠가 독도의 사랑으로 이 나라가 하나가 된다는 것을.
독도에서 산다는 것
계단 아래로 조 선장 집이 보인다. 다 왔다고 생각하니 등에 진 물통이 더 무거워지는 것 같다. 몸을 옆으로 돌려 더듬더듬 내려갔다. 그까짓 십 리터짜리 물통 하나 메고 엄살떠는 내 꼴이 우습기만 하다. 간밤에 마신 술이 아직도 내 몸속을 돌아다니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배낭에서 느껴지는 내 허영의 무게가 솔직히 창피했다. 복잡한 도시에서 품었던 꿈이라는 게 적막한 독도에서는 별것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혹시, 내가 꿈을 부풀려서 살아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렇다면 나는 아주 보잘것없는 놈이다. 소에 물을 먹여 근수를 늘리는 악덕업자와 뭐가 다른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는 내 꿈을 사랑한 적도 없는 것 같았다. 그때 더듬거리던 발이 멈추었다.
‘가만있자, 그런데 내 꿈이 뭐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꿈이 뭔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꿈도 없으면서 꿈이 있는 척 살아왔던 것 아닌가. 이건 아주 중요한 일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나는 정말 뻔뻔스러운 놈이다. 나는 계단에 주저앉아서 지금까지 헛살았다고 생각했다.
‘혹시, 꿈을 잃어버렸거나 잊고 살은 게 아닐까?’
그때 조 선장 목소리가 들렸다.
“힘듭니까?”
“아니야, 바다 보고 있는 거야.”
뜻하지 않게 내가 꿈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것만으로도 독도에 온 보람은 있는 것이었다. 앞서 내려가는 조 선장의 뒷모습을 보니, 독도에서 산다는 것은 정말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 일 학년 때는 독도에서 로빈슨 크루소처럼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는데 막상 살아보니 그건 어림도 없는 얘기다. 며칠 다녀가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계속 살아보라고 하면, 솔직히 나는 살지 못할 것 같다. 조 선장 아내의 아버지는 단순히 생업의 문제로 독도에 살았던 것 같지는 않다. 틀림없이 어떤 꿈이 있었을 것이다. 주민등록의 주소를 독도로 옮기고 그곳의 주민으로 살아온 조 선장 아내의 아버지! 그가 꿈꾸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독도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준 그의 꿈은 오로지 독도를 지키겠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1987년 9월 23일에 그가 세상을 떠나자 언론사들은 그제야 독도 소식을 전했다. 그해 10월 4일자 신문 사설을 보면 최종덕 씨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그 사설을 읽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호칭을 ‘최 씨’라고 하는 대목이다. 처음에 딱 한번 최종덕 씨라고 하다가 중간쯤에서부터는 ‘최 씨’로 쓰고 있다. 기사를 쓰는 무슨 규정이라도 있는 건지, 아니면 기자 마음대로 그렇게 쓴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왠지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국회의원이었다면 최종덕 의원이나 최 의원이라고 했을 것이고, 박사라면 최종덕 박사나 최 박사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최종덕 씨는 그냥 ‘최 씨’로 쓰고 있다. 큰 인물도 아니고 보잘 것 없는 어부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인가? 그렇다면 차라리 ‘최 어부’라고 쓸 일이지 잘 쓴 글에 스스로 재를 뿌린 셈이 되었다. 최종덕 씨를 제대로 알고 기사를 썼더라면 결코 ‘최 씨’라는 표현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최 씨’라고 하는 바람에 국민들은 최종덕 씨의 숭고한 독도사랑을, 그냥 ‘독도에 ’최 씨‘가 살았었구나.’로 기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도 며칠을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만약에, 김좌진 장군에 관한 기사였다면 어떻게 썼을까? ‘김좌진 장군은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당연히 이렇게 썼을 것이다. 결코, ‘김 씨는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라고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애국자와 애국지사는 다르다. 입으로만 나라를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애국자고, 몸을 던져서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이 애국지사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김좌진 장군처럼 최종덕 씨도 애국지사이다. 김좌진 장군처럼 독립운동을 한 건 아니지만, 최종덕 씨도 온몸을 바쳐 독도를 지켰다.
독도에 사람이 살고 있는 것과 살고 있지 않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만약에 최종덕 씨가 독도에 살지 않았다면, 일본은 무인도라는 핑계로 더 쉽게 독도에 접근했을 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독도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최종덕 씨가 독도에서 살아온 걸 가지고, 생업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생업만을 위해서 독도에 살았다면 오히려 그렇게 오랫동안 버티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랏일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 가운데 애국자나 애국지사가 있는지 알아보자. 아니, 나랏일 하는 사람들한테 직접 물어보자. 그대들은 애국자입니까, 애국지사입니까? 헛기침만 하고 다니는 그대들이여, 그대들은 솔직히 애국자도 못되는 거 아닙니까?
조 선장
조 선장이 아랫방 아궁이에서 불을 피우고 있었다.
“불 냄새가 좋네.”
“이 방 구들장을 제가 놓았는데 한번 불을 때면 일주일 동안 식지 않아요.”
“일주일 동안?”
“정말이래요.”
자랑삼아 얘기하는 조 선장 얼굴에 불빛이 아른거렸다.
“그런데 이 땔감들은 어디서 구해?”
나는 아궁이 속에서 타고 있는 나무를 가리키며 물었다.
“글쎄, 이놈들이 심심하면 어디서 흘러 들어와요.”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실제로 그런 나무들이 화장실 옆에 널브러져 있었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조 선장 옆자리에 잘 마른 혹돔 대가리가 놓여있었다. 벌건 숯불을 긁어모은 조 선장이 석쇠를 걸쳐 놓고 그 위에 혹돔 대가리를 올려놓았다. 어느새 별이 떠오르고 독도의 밤은 그렇게 익어갔다. 숙소 앞마당에 앉아서 조 선장과 함께 술을 마셨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기에 조 선장에게 취하지 않는 까닭을 물었다. 조 선장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을 보니 별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쏟아지는 별빛을 비라고 생각하니까 내 마음이 별비에 젖는 것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 별비를 그냥 흘려버리다니 참 아깝네.”
“흘려버리다니요, 받아 모아야지요. 저 별비를 받아서 한 모금하면 마음이 잘 비워집니다.”
나는 그 말이 너무 좋아서 큰 술잔에 별비를 섞어 조 선장과 나누어 마셨다. 별빛 가득한 술이 목을 지나 마음에 닿으니 마음속에서 빛이 일었다. 그 순간, 조 선장 마음이 훤히 보였다. 천진난만한 마음이었다. 수염이 덥수룩한 조 선장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조 선장은 어쩌다 독도까지 들어온 거야?”
“운명이래요.”
“그렇지, 생각하면 모든 게 다 운명이지. 내가 조 선장을 만난 것도 그렇고.”
“맞아요, 저도 제 아내를 울릉도에서 만났지요.”
“그럼 조 선장도 울릉도사람이네?”
“아니래요. 저는 동해사람 이래요.”
“그럼 독도엔 어인 일로?”
“울릉도에서 통신병으로 근무를 했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 만난 거지요.”
“그러니까, 독도는 어쩌다 들어오게 되었냐니까?”
“그게 말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 장인이 독도에 살고 계시더라고요.”
“아하, 그런 인연이 있었네.”
한 사발 들이키는 조 선장을 바라보니 또 한 사람의 애국지사를 보는 것 같았다.
파도가 잠드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꽃잎처럼 부드러운 밤바람에 별빛 흐르는 소리가 물위로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때 눈앞을 지나가는 노래가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 노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늘 낮에 잠깐 보았던 노래였다. 순간, 내가 독도에서 만나야 할 노래가 바로 저 노래라고 생각했다. 딱 한번 뒤돌아본 그 노래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자취를 감춰버리고 말았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기억할 수 있었다. 그 노래의 생김생김을. 내 마음에 노래가 잉태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황홀경에 빠지면 저절로 눈물이 나온다. 그렇지 않아도 눈물이 많은데 노래까지 잉태했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 하랴. 낙원이라는 곳이 이런 곳이구나. 별빛 쏟아지는 독도에서 나는 그렇게 황홀한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세월이 많이 흘렀다. 조 선장과의 추억도 어느 새 31년 전 일이다. 그 때가 참 많이 그립다. 언젠가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는데 독도가 나왔다. 그동안 독도도 많이 변해 있었다. 선착장도 넓어지고 집과 물골 가는 계단도 예쁘게 단장이 되어 있었고 김성도(73)씨 부부가 독도주민으로 그 곳에 살고 있었다. 2013년 4월 22일 오후, 나는 쓸쓸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 조 선장이 병마와 싸우다가 세상을 떴다는 소식이었다.
낙엽 대신 돌멩이가 흩어져 있는 길
가파른 이 고갯길을 오늘도 넘는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뚝뚝 소리는
돌 구르는 소린가 눈물 소린가
아, 물골 가는 길이 왜 이리 힘드냐.
금빛 물결 바람 타고 들려오는 노래
날 저무는 이 마음을 다듬어 주는구나.
저 멀리 붉게 타는 노을 바라보며
갈매기는 오늘도 천국이란다.
아, 외로운 가슴에 별빛 쏟아지네.
<물골 가는 길 1988>
이 글을 <홀로 아리앙>의 작사작곡가 한돌님이 <월간 풍경소리 10월호>에 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