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각스님이 타이완 불광산사 성운스님이 보내온 글씨 앞에 서있다.
서울 강남구 광평로31길 56 광수산 기슭에 조계종 6천여명의 비구니 스님들의 중심인 전국비구니회관 법룡사가 있다. 강남 요지에 멋들어지게 지어진 지 17년된 곳이지만 지금껏 일요법회도 없고, 비구니스님들의 회의처로 명맥을 이어왔다. 그런데 이곳이 달라지고 있다. 지난달 13일 4년임기의 전국비구니회장에 본각(67)스님이 취임하면서부터다. 25일 법륭사에 들어서자 한쪽 실내 벽면을 가득 채원 ‘일회용품 줄이기 스님들이 앞장서요’란 대형포스터가 먼저 눈을 사로잡는다. 취임식날 이제 비구니스님들이라도 절대 일회용품을 쓰지말라며 도시락통과 젖가락 2천여개를 제작해 선물한 본각 스님이다. 말만 하지 말고 나부터 달라져보자는 본각 스님으로 시작되는 개혁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본각 스님은 태생부터 ’전통적’이다. 본각스님네 6남매는 큰스님 천제 스님이 중학교 2학년때 성철 스님(1912~1993)의 맏상좌로 출가한 것을 시작으로 성철 스님의 권유로 6형제 모두가 출가한 전설의 집안이다. 6남매중 2남은 성철스님이 주석한 해인사로 출가했고, 4녀는 성철스님과 각별했던 비구니계의 대부 ‘인홍스님(1908~1997)과 그 상좌들에게 출가했다. 6형제의 막내로 불과 3살이던 본각스님이 맡겨진 곳은 인천에서 주로 고아들을 키우던 부용암 육년스님이었다.
인천 용화선원을 창설한 선지식 전강 스님과 도봉산의 무애도인 춘성스님과 충남 덕숭산 수덕사 혜안 스님은 안거가 끝나고 나면 부용암에 모여 휴식을 즐겼는데, 그 때 전강 스님으로부터 ‘본각’이란 법명을 받았다고 한다. ‘본각’(本覺)은 ‘본래 깨달아있다’는 뜻이다. 즉 수행을 해야 붓다가 되는 것이 아니고 본래부터 붓다라는 의미다.
그는 어려서부터 짖굿은데가 있었다고 한다. 어른스님들이 찾아헤매면 늘 부용암 밤나무 위에 숨어있으면서, ‘한번만 위를 쳐다보면 금새 찾을 수 있는 것을 왜 아래에서만 찾고있는지 인간의 시야가 얼마나 좁으냐’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어른스님들에게 떼를 써 다시 머리를 기르고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고, 그것도 대학 때 서양철학을 전공한 것만 봐도 남다른 구석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세상 구경을 할만큼 한 뒤 그는 26살 때 다시 삭발을 하고, 성철스님에게 화두를 받기 위해 밤새 3천배를 한 이후 수행자로서 더 이상 한눈을 팔지않았다. 일본 유학까지 마치고 중앙승가대 교수직을 26년이나 했지만, 그는 교수가 아니라 수행자임을 한시도 잊지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번에 전국비구니회장 선거에 출마하자 “이제 정치승으로 나선 것이냐”는 물음에 “정치하는 회장이 아니라 수행하는 회장이 되어보이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그러면서 그는 회의 때만 오던 역대 회장들과 달리 이곳에서 먹고자며 머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10여명의 비구니스님들이 상주하는 여법한 사찰의 훈기가 감돌면서, 서울에 와도 숙식할 곳 하나 없던 전국의 비구니 스님들이 머물 장소로 재탄생하고 있다. 또한 일요법회 등을 통해 지역민들과 함께하는 본격적인 사찰로 거듭날 준비를 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가 가꾸었던 경기도 고양 금륜사의 신도들은 ‘우리 스님이 비구니회장이 됐다’고 좋아했다가 ‘우리 스님을 비구니회에 뺏겨버렸다’며 울상을 짖게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본각스님은 금륜사는 사직이지만 비구니회는 공직이며 개인적 희생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본각스님은 “이곳에 전세계에서 비구니 출가를 원하는 교육하는 국제교육기관을 만들고, 지역 여성들을 위한 어린이집도 만들고, 나아가 노숙자를 돕는 일도 해야한다”고 말했다.그는 “비구니스님들이라도 더 이상 정의의 문제에 눈을 감아서도 안된다”고도 강조했다. 그는 많은 일을 벌일 태세이면서도 법륭사 공동체에 함께 사는 이들에게 ‘이왕 사는 한세상 재밌게 살아보자’며 끊임없이 긍정의 기운을 방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