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野壇法席]
이런 물음 저런 대답
“저에게 주어지는 일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어요.”
어느덧 11월입니다. 올해는 주말마다 일정이 잡혀 있어서 선생님 찾아뵙는 일이 쉽지 않네요. 전 같았으면 조바심이 났을 텐데 이제는 제법 기다릴 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만나 뵙고 싶다’는 마음 잘 품고 있으면 필요한 때에 그런 순간이 찾아오리라 믿고 기다립니다.
달마다 선생님께서 보내주시는 글을 통해 많은 위로와 가르침을 받고 조금씩 바탕이 든든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더없이 큰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지난달에는 (풍경소리에 실린 선생님 글을 읽는데)“이런 물음 저런 대답”이라는 꼭지 제목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고마운 제목이라 여겨지며 괜히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선생님께 여쭙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진 데 대하여 ‘잘 여쭈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없지 않았는데 “이런 물음 저런 대답”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마음이 놓이는 거예요. “네가 하는 게 아니라 너를 통해서 하는 것이다.” 선생님께서 늘 해주시는 말씀인데 아직도 제가 이러고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여쭙든, 딱히 구체적인 질문의 형태로 정리하지 못하더라도 그달에 필요한 말씀 저를 통해서 들려주시리라 생각하니 절로 편안해집니다.
요즘은 제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저에게 주어지는 일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어요. 그 일들이 하기 싫은 일이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함께 하는 동료들에게도 의미 있는 일이라 여겨져 기쁜 마음으로 하고는 있지만 정해진 시간 정해진 체력으로 감당해내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내 몸을 좀 더 잘 보살필 수 있어야겠다 여기며 몸에 집중하여 기도드리던 차에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내 몸에 필요한 에너지를 어디에서 보충할 수 있을지, 그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저에게 ‘감사함’이라는 말씀을 주신 거예요.
저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대하여 감사할 일들이 하나하나 떠올랐습니다. 매일 밤늦게 일하느라 제대로 돌봐주지 못했던 딸들이 언니 동생 서로 챙기며 저희들 손으로 밥 차려 먹고 저녁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 너무 고맙고 저의 빈자리 메워주며 참빛학교에서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남편이 고마웠어요. 우리 반 아이들, 동료 교사들… 여러 환경들, 여건들… 모두 온전히 만족스럽진 않아도 그 모든 것 속에 보석처럼 빛나고 있는 ‘고마움’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노라니 그들을 통해서 부어주시는 (한님의)무한 사랑이 느껴지고 그 사랑이 제 몸에 새로운 에너지를 공급해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을 감당해주고 있는 내 몸이, 세포 하나하나가 고맙게 여겨졌습니다. 그렇게 내 몸의 부분들 특히 아프고 힘든 부분들에 집중하여 고마움을 전하다보니 그 부분의 세포들이 활짝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셨듯이 모든 것을 통하여 무한히 쏟아주시는 사랑의 에너지를 알아차리고 활짝 열어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진정한 ‘감사함’인 걸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내가 애써서 해야 할 덕목이 아니라 사랑의 에너지에 나를 연결시켜 충전하는 것? 그래서 많은 분들이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분주한 삶 속에서 수시로 넘어질 때마다 선생님의 다독여주심을 기억하며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한님께서 그렇게 저를 이끌어주시듯, 오빠도 다른 모든 분들도 사랑으로 이끌어주고 계심을, 그렇게 그들 각자가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굳게 믿고 제 걸음을 걸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입동 지나 추워진 날씨에 선생님 건강을 기원하며 두 손을 모읍니다. (2019. 11. 11, 가행)
» 관옥 이현주 목사
“역시 사물과 세상이 아니라 그것들을 보는 우리의 눈이에요”
반가운 소식이네요. 참 좋은 가을 선물, 고맙습니다.
맞아요, 온통 고마운 마음으로 가득 찬 사람한테 어떻게 힘들고 귀찮은 일이 있겠어요? 사람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지금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어요. 옳은 말입니다. 빌어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고맙다는 어느 걸인의 말씀이 생각나네요. 그의 한 마디에서 음성 꽃동네가 싹텄다는 말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납니다. 몸이 지쳐가니 힘을 달라는 가행의 기도에 고마워하라는 답을 주신 한님 진짜 멋지십니다.
옛날 사도 바울로가 자기 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했을 때도 그분은 “네가 받은 은혜가 충분하다”는 말씀으로 오히려 병든 것에 대하여 감사하기를 가르치셨지요. 바울로는 자기 몸에 든 고질병이 신병보다 훨씬 고약한 영적 교만에서 자기를 지켜주는 방패인 줄을 깨닫고 다시는 같은 기도를 드리지 않았답니다.
하지만 “범사에 감사하라”는 바울로의 말을 준엄한 명령문으로 읽으면 그보다 더 힘든 과제도 없을 거예요. 아무리 살펴도 고마워할 터무니가 도무지 없는데 억지로 감사하려니 속된 말로 미치고 팔짝 뛸 일이지요. 가행이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듣고 그냥 고마워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고마워할 일들을 주변에서 찾은 것, 정말 잘한 일입니다. 예, 물론 그조차도 그분의 선물이겠지만.
문제는 역시 사물과 세상이 아니라 그것들을 보는 우리의 눈이에요. 우리가 바꿔야 할 것이 있다면, 그리고 바꿀 수 있는 게 있다면, 세상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눈이라고 봅니다. 예수님도 세상에 사시는 동안 세상을 바꾸려 하기보다 세상을 사는 사람들을 바꾸려 하신 분 아닐까요? 상황을 바꿀 수 없으면 그 상황에 처한 너를 바꾸라는 말이 있더군요. 무슨 말일까요? 너 아닌 다른 누구를 바꾸려 하지 말고 너 자신을 바꾸라는 말이겠지요. 가는 곳마다 땅에 카펫을 깔라고 하는 왕에게 어느 성인이 그러지 말고 당신 발바닥에 카펫을 깔라고 했다지요? 아이들과 남편이 고마운 존재로 보이더라는 말, 평범한 말 같지만 그게 안 돼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늘도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지요. 다른 모든 행위와 마찬가지로 감사도 억지가 아니라 저절로 이루어지는 거라야 진정한 감사라 하겠습니다. 가행이 그동안 정직하게 이른바 마음공부라는 걸 했기에 오늘 이런 복을 받는 것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살다보면 사람이 어리석어서 자기 몸에 무리가 되는 줄 모르고 지나치게 일할 때가 종종 있어요. 그러기에 늘 자기 몸이 하는 말을 세심히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자칫 몸의 신호를 놓치고 경계를 넘어서면 몸에 탈이 나고 그래도 무시하면 크게 다치거나 병들거나 그러는 거예요. 몸과 마음의 균형을 잃는 것이 만병의 근원이랍니다.
오늘도 인도의 어머니 말씀 한 마디 선물로 드리지요. 지루함이 느껴지는데도 일을 계속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그분의 답입니다. “그거야 그 일이 무엇이냐에 달려있지. 그게 너 하나를 위한 일이 아니고 전체를 위한 일이면 그때는 마땅히 그 일을 해야 한다. 너에게 어떤 임무가 주어졌고 네가 그것을 받아들였으면, 몸이 아파서 도저히 일할 수 없는 지경이 되지 않는 한, 그 일을 하는 게 옳아. 자기를 챙기지 않고 하는 일이 본인의 개인적인 고질을 치료하는 약일 수 있거든. 하지만 예컨대 몸의 열이 너무 높거나 다리를 다쳐서 움직일 수 없으면 그땐 물론 얘기가 달라지지. 그래도 몸이 좀 무겁거나 기분이 안 좋거나 골치가 좀 아프거나 속이 더부룩하다는 이유로 일하기 싫을 때는 너 자신을 생각하지 말고 그 일을 생각해서 할 수 있는 만큼 일을 하렴. 그러면 금방 좋아질 게다.”
좀 힘겹다 싶더라도 지금 하는 일에서 값진 보람을 찾을 수 있으면 오히려 고마운 마음으로 팔 걷어붙이고 해보는 게 어떨까요? 그러다가 정 무리가 되면 그러면 반드시 가행 몸이 신호를 보낼 겁니다. 사람의 몸이란, 누구의 몸이든 간에, 정직하여 믿음직한 한님의 성 스러운 그릇이니까요.
이 글은 순천사랑어린학교장 김민해 목사가 발행하는 <월간 풍경소리> 12월호 야단법석에서 가행님의 편지글과 이에 대한 관옥 이현주 목사의 답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