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이 안 보일 정도로 세차게 쏟아지는 빗길에 수업을 들으러 차를 몰고 학교에 가던 중이었다. 갑자기 브레이크도 먹지 않고 핸들도 듣지 않는다. 속도계는 80킬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직진으로 계속 가다보니 좌회전 차선으로 내 차가 잘못 들어선 것임을 알아채고 오른쪽 차선으로 방향을 바꾸려는 참에 일어난 일이었다. 앞에는 무려 다섯 대의 차가 좌회전 깜빡이를 켜고 기다리고 있었다. 뻔히 보면서도 충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척추협착증을 앓고 있는 내 몸은 둘째 치고 일렬로 늘어서있는 차들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갑자기 받을 충격을 생각하니 머릿속이 하해지며 눈앞이 캄캄했다. ‘무사히 정년은퇴를 하려나 했더니 결국 사단이 나는구나.’라고 혼잣말을 하며 끝까지 핸들을 꺾어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도 속수무책이었다. 수막현상이라는 말을 들어는 보았지만 실제로 경험해보긴 난생 처음이었다. 마치 물살을 가르며 미끄러지는 배 같았다. 내 삶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는 순간 차 핸들의 기능이 갑자기 살아났다. 겨우 10센티 정도의 간격을 두고 앞차를 비껴가자마자 옆 차선으로 뒤에서 달려오던 차들이 갑자기 차선을 바꾸는 내차를 보고 경적을 울리며 서로 뒤엉키더니 용케들 서로 피해갔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였다. 달려가던 속도를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미세한 차이로 충돌을 피한 것이었다.
은퇴를 며칠 앞둔 지금 나에게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하느님이 무슨 경고를 주려는 것일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떠올랐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교통사고로 겨우 쉰둘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난다. 거의 같은 장소에서 두 달 동안에 세 번씩이나 사고가 나서 운명하셨다. 심지어 아버지는 두 번의 사고를 당한 뒤 죽음을 예감하고 돌아가시기 2주 전에 자취방에 찾아오셔서 하느님이 날 데려갈 모양이라고 서럽게 우시기까지 하셨다. 전쟁터에서 죽음의 고비를 수도 없이 넘긴 아버지의 생도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며 지금까지 내가 겪은 크고 작은 교통사고들이 다시 떠올랐다. 1993년 정초. 부제서품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택트’라 불리는 작은 오토바이를 타고 언덕길을 올라 긴 내리막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차가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안심하고 길 맞은편에 있는 성당으로 건너가기 위해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에 보이지 않던 대형버스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뒤에서 달려와 나를 추월하려고 다가와서는 나와 직각으로 부딪쳤다. 내가 갑자기 오토바이 방향을 길 건너 반대쪽으로 틀어버리리라고는 전혀 짐작을 못한 것이다. 버스 옆구리를 오토바이 앞머리로 들이받으며 충돌했는데 오토바이는 앞바퀴의 각도가 정확히 90도로 틀어져 버스와 평행을 이루며 함께 달려가고 있었다. 바퀴로 굴러가는 게 아니라 사람을 가득 태운 무거운 버스가 달리는 힘에 휩싸여 오토바이바퀴가 통통 튀며 끌려가고 있었다. 계속 평행을 이루며 일직선으로 나를 끌고 가던 버스는 속도를 급격히 줄이며 길가에 띄엄띄엄 서 있는 가로수 사이로 절묘하게 끼어들어갔다. 버스의 달려가는 속도와 힘의 관성에 끌려가던 오토바이는 버스와 사이가 벌어지자 힘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나는 오른 쪽 발목이 바퀴에 들어가 비틀려 버리고 인대가 나가버렸다. 얼굴은 아스팔트바닥에 처박히며 문신처럼 눈가로 까만 아스콘 조각들이 박혔다. 버스기사는 무조건 부딪친 게 아니라고 우겼다. 부딪쳤다면 버스무게와 120킬로에 가까운 속도로 인한 충격 때문에 오토바이가 튕겨서 하늘로 날아올라갔던가 아니면 버스바퀴 밑으로 빨려들어 갔을 게 분명하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버스옆면을 직각으로 박았는데 나동그라지지 않고 같은 진행방향으로 평행이 되어 끌려갈 수 있었을까? 누군가 말하기를 삶에 대한 지독한 애착 때문에 핸들을 끝까지 놓지 않은 것이 그 이유라고도 했다. 버스 옆면에 박힌 오토바이 부속 플라스틱 조각이 충돌의 흔적으로 남아있으니 버스기사도 막무가내로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마침 농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다 이 광경을 목격한 신자의 말에 의하면 한편의 영화를 찍고 있는 줄 알았단다. 병원에 2주일간 입원해 있으면서 밤마다 악몽을 꾸었다. 매번 비슷한 장면인데 오토바이에 올라타 앉아있는 나보다 훨씬 키가 높은 버스바퀴가 굉음을 내며 내 옆얼굴에 닿을 듯이 지나가고, 나와 오토바이를 끌고 가며 일으키던 그 바람의 힘이 온몸을 휘감고 있던 기억과 버스가 가로수 사이로 비켜주면서 오토바이가 옆으로 넘어지며 아스팔트바닥이 내 얼굴뼈와 마주칠 때의 그 둔탁한 소리와 촉감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성격의 것이었다. 다행히 버스기사가 쌍룡자동차 회사차를 몰고 있는 베테랑이어서 적절히 대처한 탓에 더 큰 사고로 이어지진 않았던 것 같다.
또 한번의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사고는 2008년의 기억이다. 보이차의 대가로 불리는 ‘다음’이라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50년 이상 묵은 아주 오래된 보이차를 갖고 있는 주지스님이 나를 찻자리에 함께 하자고 초대를 했다는 것이다. 벌교의 유명한 절인 ‘동화사’다. 주일미사를 끝내고 신자 두 명을 태우고 차에 올랐다. 저녁 해질녘의 어스름한 시간대였다. 목포에서 순천으로 이어지는 긴 내리막길을 시간을 아끼느라 미친 듯이 액셀을 밟았다. 시속 110키로 정도로 기억한다. 탄력을 받고 내달리는 차 앞에 시야를 막는 거대한 물체가 코앞에서 가로로 움직이고 있었다. 붉은 색깔의 벽처럼 보이는 그것은 마치 용의 꿈틀거리는 몸체 같았다.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보니 길고 긴 트레일러 위에 얹힌 여러 개의 컨테이너박스였다. 나는 건널목도 아닌데서 불법유턴을 하고 있는 트레일러의 다닥다닥 붙어있는 커다란 옆 바퀴들을 들이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내 옆과 뒷좌석에 앉은 처녀들의 입에서 거의 탄식에 가까운 소리 없는 비명이 새나오고 있었다. 50미터도 채 남지 않는 거리에서 이 속도로 달려가 정면충돌한다면 세 명 다 몰살한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었다. 나는 순간 방향을 오른 쪽으로 틀어 길가의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속도를 줄여볼 계산을 했다. 그런데 만약 그 차가 충돌 후 속도를 감당 못해 가드레일을 넘어가 버리면 절벽 밑 낭떠러지로 자유낙하를 하는 것이 되고, 높은 가드레일 시멘트 턱에 부딪혀서 오히려 차체가 튕겨 나오면 전복될 수도 있었다. 이렇든 저렇든 정면으로 직접 충돌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가드레일과 부딪쳐보려고 하니 아무래도 겁이 났다. 부딪치기 직전 핸들을 돌린다는 게 바퀴가 가드레일 위 턱 위로 바로 올라타 버렸다. 턱 위의 그 20센티도 안 되는 그 좁은 폭 위로 오른 쪽 두 바퀴가 얹혀 덜컹거리며 굴러가면서 속도가 확 줄어버렸다. 그리고 내차는 얼마 못가 다시 아스팔트 위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거대한 트레일러도 느린 불법유턴을 끝내고 나와 평행을 이루며 바로 옆에 가고 있었다. 트레일러 운전수는 심각했던 상황을 인지했는지 차를 멈추려고 속도를 서서히 줄이고 있었다. 나는 그냥 가라고 손짓을 했다. 아무도 다친 사람도 없고 차도 어디 한 군데 긁힌 데도 없었다. 내 옆에 앉은 중년의 처녀는 습관적으로 있지도 않은 브레이크를 밟느라 엉치에 힘을 줘서 오른쪽 고관절이 빠지는 것처럼 아프다고 했다. 뒷좌석에 앉은 처녀는 이제 모든 게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그냥 앞좌석 등받이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감고 있었다고 했다.
우리는 큰 도로를 벗어나 가까운 식당을 찾아들어가서 말없이 저녁밥을 먹었다. 누구도 입을 떼려하지 않았다. 그날 절에서 얻어먹은 보이차 맛은 특별하다기 보다는 그저 그랬다. 살아있다는 벅찬 감격 때문에 모든 감각이 지워져 버렸다고나 할까. 다음날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꽤 높은 가드레일 턱 위를 차바퀴가 올라챈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아 다시 그 장소로 찾아가 확인해 보았다. 차에서 내려 자세히 살펴보니 딱 그 자리 약 5미터 간격의 턱 아래에만 집중호우 끝에 밀려와 남은 황토토사가 직각으로 급한 경사를 완만하게 메꾸고 있었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다고 해야 할까? 이건 또 뭘까? 토사가 없었다면 턱 위를 절대 올라탈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럴 때 하늘이 도왔다는 말 외에 무슨 표현이 가능할까?
그 뒤에도 교통사고는 계속 일어났다. 돈이 떨어져서 고민이 될 만하면 내 차를 술 취한 누가 와서 차로 들이받아 구멍 난 재정을 메꾸어 주었다. 차는 폐차를 시켜야 할 정도로 큰 사고가 아무렇지도 않게 나는데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다. 왜 이렇게 큰 사고가 해를 걸러 나는 걸까? 그것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건진다. 이렇게 백만분의 일의 확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우연의 결과가 나를 살리니 이를 꼭 우연이라고 해야 할까? 사고가 나면 문득 나를 위해 기도하는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 그분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구나. 또 하나. 하느님의 음성이 들린다. ‘나는 너를 언제든지 이렇게 데려갈 수 있으니, 네 할 일을 하라.’는 명령이다. 겁먹지 마라. 주저하지 마라. 그냥 할 일을 하라. 어차피 간발의 차이로 죽을 목숨이다. 내가 들은 주님의 음성이다.
순천사랑어린학교장 김민해 목사가 발행하는 <월간 풍경소리>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