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울어라며 용감했던 만화소녀 캔디처럼 어린시절 오랜 병마를 딛고 서울의 외로운 사람들의 섬을 잇는 다리가 된 저층주거지재생사업단 인향봉 대표. 그가 미술학원을 하던 시절 엄마는 없고 아버지는 알콜중독자여서 화가의 꿈을 이룰 수 없다고 찾아온 강원도의 여학생을 무료로 먹이고 재워 대학에 보내자 그 소녀가 보답할게 이뿐이라면 그려서 보낸 캔디 그림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2018년 기준 한국의 주택에서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율은 61.4%, 아파트 거주 가구는 50.1%다. 설사 아파트가 아니더라도 서울 같은 대도시에선 재개발을 꿈꾸는 지역이 대부분이다. 서울에서는 38.2%만이 단독주택을 비롯한 빌라, 다세대주택 같은 저층 주거지로 남아 있다. 한남동, 평창동, 청담동 같은 부자들의 단독주택 지역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아파트 선호 현상이 두드러지는 서울에선 이들 대부분이 아파트살이를 꿈꾸는 것 같지만 저층에서 행복한 마을공동체를 만들어보자는 이들이 있다. 이렇게 84개 마을이 뭉쳐 만든 곳이 저층주거지재생사업단이다. 주민 자율 민간조직이다.
저층 거주자들은 아파트 시대에 뒤떨어진 낙오자들쯤으로 주눅이 들 수 있지만 이웃끼리 알콩달콩 행복을 만들어가며 자긍심과 행복감을 높여보자는 게 이 단체의 취지다. 이 단체 주도로 3년째 청계천에서 84개 마을 1만여명이 모여 축제를 열고, 연말이면 마을살이 성과도 공유한다. 그렇게 왁자지껄한 마을살이의 어울림 한가운데에 인향봉(52) 대표가 있다. 그는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다. 그러나 섬처럼 고립되어 외롭고 마음 아픈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을 잇는 든든한 다리다.
서울 서대문구 증가로30길 45-9 서대문구휴먼센터 2층 저층주거지재생사업단. 북가좌동의 우리마을공동체를 겸한 공간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2명의 직원과 6명의 스태프는 휴근 중이고 관의 지시에 따라 사무실 앞 경로당도 폐쇄되는 바람에 지난달 27일 인 대표는 덩그러니 홀로 나와 있었다. 조금 전 이 건물 1층 문 앞에서 경로당 할머니가 “인 대표가 오길 기다렸다”며 마스크 두장을 건넸다고 한다. ‘요즘 마스크 구하기도 어렵다는데, 사람들 많이 만나는 인 대표가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큰일’이라며 줬다는 것이다. 바이러스 정국에 이웃끼리 접촉을 막아도, 정만은 막을 수 없다.
» 2018년 9월 서울 청계천에서 인향봉 대표(왼쪽 여덟째)를 비롯한 서울 84개 마을 대표와 주민 1만여명이 온동네어울림마당을 시작하는 행사를 하고 있다. 저층주거지재생사업단 제공
» 서울시 노원구 상월곡동 삼태기마을 온동네 숲 축제 모습. 저층주거지재생사업단 제공
서너평 남짓한 사무실엔 화가이기도 한 그가 직접 그린 달동네 그림들과 공예품들이 아기자기하게 어울려 있다. 특히 그 옆 초록색 다육이 3개가 심어진 공예품이 앙증맞다.
“마을 사람들이 좀 여유로워지려면 아무래도 공원 같은 자연을 바라봐야 하는데, 이 일대는 아무리 봐도 공원을 만들 땅이 안 보여요. 그래서 벽에 ‘자연’을 꾸미려고요. 막걸리병을 잘라서 다육이를 심은 벽걸이를 골목길에 장식하면 초록마을이 되는 거지요. 이 공예품을 마을 사람들과 함께 천개를 만들어 벽에 걸려고 해요.”
그다운 아이디어다. 그는 뜨개질과 기타와 요리 등 사람들과 어울려 할 수 있는 걸 다양하게 즐기며 할 줄 아는 재주꾼이자 엔터테이너다. 8남매의 일곱째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다리를 다쳐 학교도 거의 못 간 채 7년간 병상에 누워 지냈다. 다리를 절단할 뻔한 위기를 겪었지만 트라우마가 없다고 할 만큼 천성적으로 발랄하다.
그가 어린 시절 감내한 오랜 병고는 ‘마을 부활’을 위한 준비 기간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병상에서 많은 책을 읽은 덕에 고교 때는 문예부장을 맡아 삽화를 곁들인 글을 교지에 뽐내곤 했다. 그가 도시의 마을재생을 건물만 뜯고 바꾸는 것이 아니라 꼭 예술과 문학이 곁들어져 주민들이 다양한 품격을 누리도록 이끌 수 있는 건 그때 그 시절 덕분인 셈이다. 84개 ‘마을 관광상품’을 만들겠다는 꿈을 꾸는 그이니 각 마을을 멋지게 만들어낼 아이디어에 그 예술혼이 가미될 건 분명한 일이다.
결혼해 딸 하나를 낳아 키우며 미술학원을 하던 그가 마을살이에 눈을 뜬 것은 마포구 연남동사무소에 요가를 배우러 갔다가 구청 자원봉사를 하면서부터였다. 구청 직원들이 싹싹한 그를 보고 연남동마을공동체를 해보라고 제안하자 ‘그 마을은 화합이 안 돼 시장님조차 골치 아파하는 곳’이라는 사족에도 2016년 덜컥 간사를 맡았다. 그런데 마을살이에서 인 대표의 끼가 발현됐다. 연남동주민공동체는 3년 연속 서울시 우수마을로 뽑힐 만큼 멋진 마을이 되면서 그는 서울 마을활동가의 얼굴로 떠올랐다. 그는 이를 남편 덕으로 돌렸다. 5년 전 정리해고 당하기 전까지 공기업에서 성실히 일해준 남편 덕에 건물주가 되어 월급 없는 봉사활동이 가능하게 됐다는 것이다. 또한 아침 9시에 출근해 밤 11시까지 일하는데 ‘못 말리는 여자’라는 한마디 외엔 늘 고무 찬양만 해줬으니 남편이 아니라 ‘내 편’이라는 것이다. 그는 역시 ‘탓’보다는 ‘덕’을 새기는 유전자가 탁월하다.
» 화가이기도 한 인향동 대표가 직접 그린 유화그림. 그가 사랑하는 저층 주거지들이다. 두번의 전시회에서 그림 40장이 완판될만큼 인기를 끌었다.
» 폐품을 활용해 녹색식물들을 심어 꾸민 사무실. 인향봉 대표의 솜씨다.
“이런 일을 하다 보면 피곤해도 주민의 자발성을 끌어내려는 공무원보다는 편하게 축제나 행사를 용역회사에 맡겨버리는 걸 택하고, 자기 실적을 위해 주민은 끼워맞추기식으로 넣으려는 공무원들도 적지 않은데 서울시 마을공동체과 박용구 주임이나 마포구청 황경미 주임 같은 이들이 힘들어도 주민 편에서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자극을 받아 마을 일이 신났어요.”
84개 마을 대표들의 희로애락을 경청해주고 위로해주고 격려해주다 보면 하루해가 너무 짧다는 그는 저층 주거 마을들이 다 제집인 것처럼 마을 자랑이 끝이 없다. 성북동 소리마을에선 이애재 대표가 500원만 받는 국수데이를 수요일마다 열어 200명에게 대접하고, 김영치 대표의 인수동숲길마을과 김용임 대표의 암사동 서원마을은 담장을 허물어 이웃집끼리 트고 지내고, 녹번마을의 신현수 대표는 마을감사일기를 써서 주민들을 감동시키고, 장제모 대표의 시흥동마을은 혼밥프로젝트를 하고, 정종석 대표의 상월곡동 삼태기마을은 얼마 전 육개장 300인분을 주민들이 끓여 축제를 벌였다는 소식 등이다. 이처럼 마을이 살아나야 외롭고 우울한 현대병이 치유되는 걸 그는 체험으로 알고 있다.
“최근엔 유명 뮤지션이던 분이 홀로 폐인처럼 살던 집을 가봤어요. 자신의 삶이 알려지는 게 두려워 외부엔 담을 쌓고 술·담배만 하더라고요. 혼삶족들은 고립 속에서 집도 치우지 않다 보니 그 오소리굴에서 우울증이 더해지죠. 그런데 혼삶족들도 마을공동체 봉사자들이 반찬을 해 가면 누군가 찾아오니 집을 치우기 시작하고, 대화도 하며 변화가 시작돼요. 곧 눈에 띄게 밝아지죠. 혼삶족이 늘어나는 건 어쩔 수 없는데, 역시 혼자 살아도 행복해지려면 결국 이웃과 마을이 최고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