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개혁'은 교회의 과제다
<한겨레 칼럼> 호인수 인천 부개동성당 주임사제
일전에 인천의 한 시민단체에서 주최한 ‘인천 숲 포럼’에서 나는 인천의 미래를 묻는 청중에게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먼저 인천에 있는 교회들이 새롭게 바뀌지 않으면 인천의 미래는 없다”고 대답했다. 이 나라와 지역사회가 정의와 평화의 땅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예수의 가르침을 모토로 삼는 교회의 개혁과 쇄신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적지 않은 교회들은 싱거워질 대로 싱거워져서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 구실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세인들의 구설에 오르내리는 일부 대형교회 성직자들의 비리는 차마 거론하기조차 민망하다. 교회의 세습이라는 신종 유산상속은 그 불법부당함이 속속 밝혀지는데도 갖가지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끈질기게 물밑작업을 계속하고 있으니 실로 가관이다. 어떤 목사님이 덮는 이불은 1000만원이 넘는단다. 오죽하면 목사를 먹사라고 비꼬겠나? 그런데도 그런 목회자들이 설교하는 교회의 주일예배에 내로라하는 인텔리들이 빈자리가 없도록 대성황을 이루는 기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순수한 신앙심의 발로? 아니면 신도들의 이성을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는 목회자의 초능력?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성령의 역사하심이란 말로 설명이 될까? 신앙과 영성이 모자라서인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지금 내가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남의 일 구경하듯 개신교 이야기나 속 편하게 하고 있을 처지가 아니다. 얼마 전에 나는 최근에 세례를 받은 신자에게 한 통의 전자편지를 받았다. 내용인즉 이랬다. 새로 이사한 집을 축복해 달라고 사제를 청했단다. 사제의 축복을 받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금일봉을 어느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고 하니까 그러지 말고 성당 사무실에 내라고 하시더란다. 사무실에 갔더니 성당 직원이 감사헌금은 감사헌금대로 받고 수고하신 사제에게는 따로 성의를 표하라고 넌지시 귀띔하더라는 것이다. 그는 내게 물었다. “신부님, 이게 옳은 겁니까?” 바로 답장을 보내지 못했다. 뭐라고 해야 하나? ‘그건 분명 아니다!’라고? 동료를 비난해서 좋을 것 없다. 그렇다고 사제도 연약한 인간임을 강조하면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기란 더욱 낯뜨거운 짓이다. 참으로 난처했다. 물론 그런 사제는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나는 믿는다.
전에 거쳐온 교회에서 있던 일이다. 우리는 자선비를 책정하여 교회 관내에 있는 초·중·고등학교에 사정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수학여행비를 지원했다. 이듬해에 다시 신자 대의원들과 새해 예산을 심의하는데 안타깝게도 수학여행비는 전액 삭감되었다. 과반수의 반대 이유는 하나같이 왜 우리가 낸 돈을 신자도 아닌 엉뚱한 사람들에게 퍼주느냐는 것이었다. 패거리 사고다. 아, 우리 교회가 입버릇처럼 되뇌는 이웃사랑은 예서 한 치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해의 연말결산서에 적자는 없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원의 불법행위가 불거지자 ‘스스로 개혁’을 주문했지만 그게 하나 마나 한 소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제 살 도려내겠다는 의지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의 손에 칼을 쥐여주고 스스로 수술을 하라니 말이 되나? 너무나 수가 빤한 짜고 친 고스톱이다. ‘스스로 개혁’은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진 어두컴컴한 국정원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해묵은 내란음모 카드를 내놓는 것을 보니 개혁은 이미 물 건너간 듯하다. 나는 개신교까지 한데 묶어 개혁과 쇄신을 요구할 만큼 배포가 크지 못하다. 천주교회만을 상대로 말하자. 교회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보물인 고해성사야말로 교회를 쇄신하고 개혁할 수 있는 최상의 도구다. ‘스스로 개혁’은 이제 교회의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