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유루 곰빠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절로 우선 그 경치가 빼어나다.
<<라마유루 곰빠 전경 입니다. 만약 비가 내리는 곳이었다면 진즉 내려앉았겠지라.................>>
<<절 앞쪽의 진흙뻘이 이런 멋진 모습으로 굳었답니다. 1억 8천만년 전 바다에서 솟을 때.>>
어찌 그리도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집을 지을 수가 있었는지. 절 숙소에서 우선 씻고 저녁 먹을 생각뿐이다. 그 날 저녁 식사는 모두 무식하게 많이도 먹었다. 포식을 한 것이다. 빠리 스님도 이젠 음식을 들면서 많이 좋아져간다. 휴우.... 이젠 살았제!!! 많은 노스님들이 내 방을 찾는다. 일 년만의 만남이지만 그 동안 쌓인 애정도 한 몫이다. 다행히도 한 스님도 돌아가시지 않았다. 더러 스님들이 선물이라고 받아 둔 물건이 제법 쌓여 가는데 주로 마른 살구와 말린 야크 고기, 버터, 살구 씨 기름 등등이다. 이걸 죄다 챙겨 여기 다람쌀라 까지 나르면 요긴하게 재차 선물용으로 쓰인다. 우선 티벳 난민들에게 이런 것들은 갈 수 없는 티벳 고향땅의 뼛속 깊이 새겨진 향수이기 때문이다.
<<정말 오금이 저리는 길 입니다. 만약 차가 구른다면? 아마 지금도 떨어지고 있겠지요잉.>>
다음 날은 바쁠 일 없이 계획된 엄마스님 계신 토굴 절에 가는 날, 미리 연락이 되었으니 그냥 가기만 하면 된다.
라마유루 곰빠에서 레로 나가는 길은 두 개로 되어 있는데, 계곡을 따라 만든 길과 절위를 질러가는 길로 되어 있다. 사고가 많은 윗길은 처음 만든 구 도로이고 아랫길은 근래 만든 비교적 안전이 보장되는 신도로이다. 1987년 처음 레를 들어 갈 때 필자는 트럭을 히치하이크하여 갔었는데 바로 윗길에 들어서자마자 공포에 휩싸였다. 이 트럭이 아래까지 무사히 가줄지 정말 겁이 나는 그런 길, 아래로는 천 길 낭떠러지에 어찌도 그리도 꼬불꼬불 구절양장(九折羊腸)으로 길이 나 있던지. 또한 길 가에는 어떤 안전을 위한 가드레일이 없으니 더욱 겁을 먹게 된다. 이번 내려가는 길에 장난기가 발동 일부러 그 길을 택하였고, 아무도 모르는 대원은 그 길이 멋지다는 말에 그리 가자고 한다. 사실 멋지다. 아래가 구체적으로 보이기 전에는 주위 산자락에 그저 멋진 경관을 볼 뿐이기 때문이다. 막상 그 길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 모두 말문이 끊어진다. 저 아래 가물가물한 희미한 물줄기만 보일뿐 도대체 길 끝나는 곳은 언제나일까. 정말 발바닥에 땀이 나는 무서운 길인 것이다. 좀 신경성 체질이라는 레오 신부님이 얼마나 차량 손잡이를 꽉 붙들고 계시던지 야크님의 한마디란, “신부님 손잡이 빠지겠어요!”에 슬며시 손을 내리는데 가슴에 성호를 긋는다.
아래 밑바닥 길에 도착하고서는 그때서야 아끼던 말을 하는데 서로를 겁쟁이라고 핀잔이다. 거기서 아침을 그런대로 때울 수 있는 거리 식당이 있었다. 여행자라면 어느 때 어느 곳에서라도 어떤 먹꺼리라도 먹을 수 있다면 진정 여행가이다. 더러 입이 짧아 음식을 가리는 사람이라면 진정 여행가는 못되고 돈 내고 따라만 다닌다는 관광객일 뿐이다. 그 길에 겁 안 먹을 사람이 있을까. 좋은 길 놔두고 남 골탕 먹이는 길로 안내하는 인로왕보살도 좀 짓궂기가 보통은 아니다.
<<엄마시님 계시는 토굴, 마을 앞 풍경 입니다.>>
<<오래된 향나무, 오랜 탑과 기원 깃발이 예쁜 풍광 입니다.
헌데 아래 소 두 마리는 싸우고 토라진 부부 소 아닌가유? 인제 너 싫어!!! 하면서 완전 되돌아 있지라.>>
엄마스님이 계시는 “헤미 슉빠잰” 마을에 들었다.
이미 연락이 되어 우리 점심을 마을 아주머니 불러서 갖가지를 준비했나 보다. 역시 엄마스님은 세세한 곳까지 자상하시다. 여기서 엄마스님이란 여자 비구니 스님이 아닌 남자 비구스님인 툽땐 왕걀 79세의 노스님으로 필자와 인연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빠스님은 4년 전에 입적하셨는데 두 스님이 항상 단짝으로 다니시니 우리가 붙인 별명이 굳어져 지금까지도 그대로 불린다. 필자는 이 마을을 참으로 사랑한다. 무슨 영화 쎝트장 같은 분위기다. 넘넘 아름답다. 때는 노오란 유채꽃이 한창으로 더욱 먼 설산과 함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마을 이름을 우리말로 풀어쓴다면 “향나무 헤미 고을”이다. 마을 뒤에는 천년이나 묵었을 오래된 향나무가 빽빽이 불탑과 함께 조화를 이룬다. 함께 마을 전체를 빙 걸어보면서 모두가 이 마을에 살고 싶다고 한다.
<<제가 여기를 올 때 마다에 상상이란, 꼭 황 순원 할배 글의 필묵장수에 나오는 선비를 상상해 봅니다.
즉, 비오는 날 과부집에서 하루 잔 인연으로....................자기가 그린 그림이 하두 좋아 그 여인에게 전하려고,
그걸 품에 앉고 눈 오는 날 고개 넘다가 어느 나무 밑에서 얼어죽는 이야기를..........>>
원래 계획은 이 마을에서 하루 쉬어가기로 했는데 아래쪽 사스폴 마을로 옮기기로 했다.
엄마스님 조카집이 있는 좀 더 편안한 집이라고, 과연 평화로운 큰 집이다. 보리밭이 누렇게 익어가는 풍경이며 호두나무 가지가 창문틀까지 손에 닿는다. 연락을 곳곳에 했는지 레에서 장보기를 하여 이미 우리 일행을 맞을 준비다. 저녁은 성찬이다. 그 안에 가까운 리종 곰빠와 벽화가 일품인 알치 곰빠를 참배하며 간단한 진료와 전해 드릴 물건을 드렸고, 몇 노스님은 겨울 나러 다람쌀라로 나오기로 했다. 신경통이 심한 스님과 눈 치료를 받아야할 스님들이다.
<<바스고 곰빠의 풍경 입니다.>>
꿀 같은 잠을 자고 나니 이 집 자체의 매력에 다들 떠나기가 아쉬운 듯, 하루만 더 묵다가 가면 어떨까하고 보채는 사람도 있다. 이제 레로 가는 길이다. 리키르 곰빠와 바스고 곰빠, 피양 곰빠를 차례로 참배했다. 물론 절 마다에 진료와 함께 노스님들께는 으레 신경통에 좋은 영양제를 빠짐없이 드린다.
피양 곰빠에서는 횡재를 만났다. 관정 법회 차 와 계신 까규파 종정인 체창 린포체를 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야크님이 제일 신이 나는 가 본데 사진 찍을 때도 아예 린포체 손은 자기 것이다. 꽉 움켜쥐고는 놓을 줄을 모른다. 남에게 좀 그런 행운을 양보해주면 안 되나? 그 날은 절에 가자마자 반가운 여든 한 살인 꾄촉 쏘남 노스님을 만나다 보니 법당 참배를 못하는 순서가 되었는데, 이걸 빌미로 야크님께 호된 꾸지람을 받았다. 중이 절에 오면 마땅히 법당 참배부터 해야지 않느냐며 꾸지람을 하니 할 말이 없어 그대로 꼼짝없이 혼쭐이 났다.
<<좋은 인연, 복이 많아 우연히도 까규파 종정이신 체창 린포체를 친견 했답니다.>>
드디어 레에 입성이다.
예정대로 하루도 어긋남 없이 계획대로 진행된 것에 감사할 뿐이다. 여긴 라닥의 수도가 아닌가. 긴장도 풀리며 어려울 게 없는 문명권에 들어선 새 세상인 것이다. 우선 우리가 가야할 지역의 허가서를 신청했다. 파키스탄 국경 근처와 중국 국경(실제로는 티벳 땅이다)쪽에는 이런 제한이 따른다. 여관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이란 목욕과 빨래였다. 그동안 먼지와 땀에 절은 옷이며 목욕을 못한 몸뚱이라니. 이제 살았지. 다들 얼굴부터 환하다. 이제 뭘 먹을까? 내 고집으로 늘 먹고 싶어 했던 삐잣집 행이다. 펀잡주 터번 두른 씩크 아저씨가 여름이면 와서 서양인을 위한 멋진 요리를 해내는 집이다. 난 맛나게 먹는데 다른 대원은 별로인지, 이런 음식은 어린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이지 어른이 먹는 음식은 아니라니 좀 무안하다. 빠리 스님께 응원을 구할 양으로 프랑스에서도 그런가 물으니 그렇다고 해버린다. 다들 나중엔 혼자 와서 먹으라니, 아유 큰 창피다, 창피막심이다.
허가서가 나올 때까지 가까운 곰빠들을 참배하며 진료하기로 했다.
미리 전갈을 띠운 쩸데 곰빠부터 들어갔다.
이 절은 보기만 해도 멋진 자리에 위치한 경관에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멋지구마니라잉, 아래는 노오란 유채꽃이 조화를 이루며 더욱 절을 예쁘게 만듭니다.>>
어찌 보기가 그리도 아름다울까. 높은 절 아래로는 때맞춰 핀 유채 밭이 노랗게 환상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런 것이 모두 라닥의 매력일 것이다. 법당에 들어가니 많은 스님들이 예식을 올리며 우리 일행을 반긴다. 유달리 노스님들과 사미승이 많은 절이다. 여기엔 특별히 드릴 약품이나 물건들이 많았는데 작년부터 이런 자리를 계획했던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이란 오는 길에서 이미 보청기를 많이 써버려 원하는 대로 못 드리는 일이 생겨버린 것이다. 너무 아쉽다. 내년에 꼭 챙겨올 것을 약속드리지만 당장 드리지 못함이 못내 송구스럽다. 귀가 잘 안 들린다는 노스님들에게 보청기 설치 외에 방법이 없다.
이 많은 노스님들 중에 필자가 특별하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한 스님이 계신다. 올해로 84세인 체왕 릭진 노스님이다. 어찌 그리도 가물었는지, 표현이 좀 그렇지만 막말로 뼈에 가죽만 두른 꼴이랄까. 그래도 눈 빛 초롱초롱 정정하며 곧은 자세로 경전 읽고 당신 처소를 깨끗이 정돈하며 공양도 잘 드신다. 사실 내 수행 인생길의 마지막 모습인 전형이기도 하다. 내가 저리 곱고 맑게 늙어갈 수가 있을까?
<<그림 같아서 세워서도 찍었슴돠잉.>>
<<비록 나이 드셨어도 시님들 얼굴엔 늘 편안한 모습입니다. 이유는? 청정하게 사시면 이리되지라.>>
프랑스 남부의 한 수도원에서 만난 늙은 수사님이 바로 이 노스님과 어찌도 그리 빼닮았는지.
2007년 봄, 안내 받아 찾은 베네딕또 수도원에서의 시간은 평생 잊지 못하리라. 마침 사순절이라서 모두가 침묵 속에 진행되는 매일 일과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중 식사 때가 되면 내 방에 오셔 말없이 손짓으로 밥 먹을 때라며 길잡이 하시던 노 수사님, 그 때 그 수사님의 찬바람 이는 자태에서 바로 일생 수도자의 삶이 어땠고 지금 가는 수도자의 인생길이 어떤지를 너무도 찐하고 아름답게 각인할 수가 있었다. 바로 그 노 수사님의 모습이 꼭 이 체왕 릭진 노스님의 자태나 인상이 똑같기에 늘 이 삐쩍 마른 노스님을 반가운 영혼의 친구로서 만나곤 한다.
마지막 헤어지면서 숨겨둔 손목시계를 나뭇가지와 흡사한 마른 팔목에 몰래 채워드리니 아기처럼 환 하게 웃으십니다.
내년에는 더욱 예쁜 선물 한가지를 챙겨드려야겠다.
<<법당에서 예식 중에 경전을 읽으신다. 이 돋보기 안경은 이번에 맞춰드린 것이다.>>
<<라닥 순례기 6 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