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종북몰이”다. 대선의 부정을 규탄하고 그 부정의 성과와 무관하지 않은 박근혜 후보의 대통령 당선에 대한 원천적 질문을 던지고 나선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 대한 이 정권의 대응이 그렇게 나오고 있다. 본질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완전히 모르쇠를 대는 태도다. 이것은 기만이다.
박창신 신부의 연평도 발언은 적절해 보이지 않았다. 물론 의도는 분명하다. 더는 엔엘엘(NLL)을 놓고 남북 간의 적대상황을 확대하지 말고, 그걸 이용해서 내정을 공안통치로 몰고 가지 말라는 것이다. 적절치 않았던 대목은 북의 포격이 정당했다는 논리다. 한-미 군사훈련이 있었지만 북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북의 포격은 과잉이고 그로 인해 희생이 있었다는 점에서 박 신부의 발언은 매우 아쉽다.
하지만 그의 논지는 철저하게 신앙적 소신의 산물이다. 여기서 신앙적 소신이라는 말은 그가 성서의 예언자 전통 위에 서 있다는 의미다. 이사야를 비롯해서 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은 현실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그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다가올 미래에 대한 경고를 발하는 존재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공동체를 세우겠다고 했지만 권력자들은 명분만 그랬을 뿐 결국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기 일쑤였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내세우지만, 사실은 자기 잇속을 채우고 자신의 권력을 키우겠다는 식이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백성들이 녹아난다는 것이다. 등골이 휘고 뼈가 빠지고 피가 빨리는 수탈이 일상이 된다. 그에 더해 이런 현실을 비판하면 즉각 권력의 응징 대상이 되고 만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부자들이 빈손으로 돌아가게 하고, 권력자들은 권좌에서 내쫓기는” 미래에 대해 노래한 것은 모두 새로운 세상에 대한 민중의 갈망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성서의 예언자들이 한결같이 목소리를 높인 바였다.
누구도 감히 권력과 맞서서 양심과 정의를 말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이들은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할 뿐,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용기 있게 발언했던 것이다.
바로 이들의 예언자적 용기가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을 일으켰고 포악한 권력의 정체를 온 세상에 폭로했던 것이다. 여기서 정치와 종교의 구별이나 경계선이 있을 턱이 없다. 물론 정치의 담당자가 있고 종교의 담당자가 있지만, 그것이 잘못된 정치에 대한 종교의 양심과 본질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권력의 부정의를 질타하고 역사를 바로잡아 나가는 역할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가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회당에서 읽은 것은 ‘이사야서’였다. 그것은 옥에 갇힌 자들을 해방시키고 눈먼 자들의 눈을 뜨게 하는 일에 대한 말씀이었다. 부당한 정치에 갇힌 백성들을 해방시키는 것은 따라서 예언자 전통에 충실한 것이며, 정치의 기만에 대해 저항하고 진실을 드러내는 일 역시 예언자적 전통의 힘이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다름 아닌 이 성서적 전통 위에 서서 권력을 향해 정의를 세우는 작업을 하고 있는 셈이다.
어찌해서 “박근혜 사퇴”라는 주장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지 않은가? 국가권력기관의 대선개입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를 막고 축소하려는 정권의 움직임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고, 이에 따라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하는 사태를 더는 묵과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박근혜 정권은 이들의 목소리를 용납하지 못하고 묵과하지 않겠다고 한다.
성서에 있는 말씀이다. “저들의 말을 가로막으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그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잘못하면 돌도 종북주의자가 되는 게 아닌가 싶어서.
한종호 꽃자리출판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