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감사, 그 마음의 삼중주
2013.11.28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제로셈법 감사’는 사람이 생명체로
서 자기의 소유나 존재의 능력 차원
에서 강화되거나 약화되는 일과는
아무 관련 없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감사하다고 느끼는 마
음이다…허허막막한 대우주 시공간
속에서 이렇게 생명체로서 존재한
다는 사실을 놀랍고 고마운 기적이
라고 느끼는 것이다
서점에 <한국인은 누구인가>(21세기북스)라는 책이 신간서적 인문학 코너에 진열된 것을 보았다. ‘삼성사회정신건강연구소’의 기획연구 결과물인데, 각계 38인의 전문가가 다양한 관점과 연구방법을 통해서, 오늘날 한국인의 겉치장을 거둬내고 속 알몸을 보여준 통합적 연구보고서인 셈이다. ‘현대 한국인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라는 것이 공동 화두였다. 편집위원장 김문조 교수가 그 책 서론에서 보고하는 현대 한국인 실상에 대한 결론은 우리에게 상당히 비감한 감정을 남겨준다. 그 이유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이 겉은 문화적 교양인처럼 보일는지 모르나 속은 속물적이라고 진단하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연구 결과를 ‘축약적’으로 다음같이 표현하고 있다. 오늘 한국인들의 마음의 방향은 “관계주의, 현세주의 및 배상주의 성향을 가지고 현실적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기복심리가 바탕에 깊이 내재한다”는 것이다. 복을 추구하되 인생의 고난을 통해 얻어지는 높은 정신적 경지도 아니고, 근대국가 시민정신이 쟁취해온 인류 보편적 이념, 곧 자유·정의·평등·보편복지 같은 가치추구 열정도 매우 약한 것으로 판명된다는 결론이다. 본래 한민족이 이러한 속물적 근성의 백성은 아닐 터인데, 연구 조사 결과 그렇게 나타나는 이유를 그 나름대로 덧붙여 진단한다. 사회정의 구현을 외면한 사회 지도층에 불신감, 공정경쟁의 틀과 법이 무너진 사회 구조악에 대한 반발, 그리고 승자독식의 비정한 약육강식의 사회 현실에 대한 생존본능의 반응이라는 원인 진단이다.
연구자들의 연구 결과를 수긍하면서도 씁쓸하고 슬퍼지는 마음을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일말의 의심이 일어난다. 과연 그런 모습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국민들의 마음 ‘뽄새’ 전부이고 실상일까? 혹시 바다 수면 아래 해류는 보지 않고 출렁거리는 성난 파도만 보고 너무 비관적으로 성급한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닐까? 바람 잘 날 없는 나뭇가지보다는 뿌리로 내려가서 일반 가정이나 개인 심정을 깊이 들여다볼 때, 우리의 일상생활은 경쟁심·적개심·탐욕·원망 등이 지배하는 그늘만 있는 게 아니다. ‘감사’라고 표현하는 그 어떤 감정, 곧 이른 봄과 초가을 해맑은 양광 같은 ‘고마움’이라는 심정이 부정할 수 없게 우리 삶과 생활 속에 깃들어 있다는 진실도 놓쳐서는 안 된다.
종교의 유무와 종파를 떠나서, 몇년 전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의 마지막 남긴 다음 말을 국민들은 아직도 기억한다.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서로 화해하고 사랑하십시오.” 그분이 보통 사람보다 높은 종교적 수양을 쌓고 성직에 평생 헌신한 분이라서 그런 말을 하고 가셨을까? 유명인이 아니더라도 수많은 이 땅의 보통 사람들 중에는 김 추기경이 남기신 말에 동감하고, 직업과 생활 형편에 상관없이 고마운 맘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현실이 냉혹한 경쟁사회요 삶이 매우 각박해졌고 살벌해졌음을 부정하진 않지만, 삶을 감사하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있음을 간과하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을 해보는 것이다.
뭇 생명체들 중에서 사람만이 ‘고맙다’는 감정의 의식을 가지는 특이한 생명체이다. 고마움이라는 인간의 신비한 감정을 한자로 ‘감사’(感謝)라고 표현하는데, 조선 성리학 인간 심성론의 ‘사단칠정론’ 논쟁 중 왜 사람의 7가지 기본감정(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을 열거하면서 중요한 감사를 언급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감사’의 감정이 학문논쟁 속에서 누락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조상들의 생활 속에서는 ‘사단칠정론’의 칠정에 해당하는 어느 감정 못지않게 ‘삶과 존재에 대한 감사의 마음’도 여실하게 상존했다고 확신한다.
감사하다는 마음이 드는 것은 여러 경우가 있다. 감사하다는 인간 감정의 내면적 다층구조를 피아노 삼중주에 비유하고 싶다. 피아노·바이올린·첼로의 합주는 각각의 악기가 갖는 음색·음역·음향이 독특하여 감상자들에 따라서 느낌이 다를 것이다. 감사의 마음에도 세 가지 색향이 있다. 첫째 범주를 ‘덧셈법 감사’라 칭하고 둘째 범주를 ‘뺄셈법 감사’라 하고, 그리고 셋째 범주를 ‘제로셈법 감사’라고 표현해 보자.
‘덧셈법 감사’는 생명체의 생존본능과 쾌감원리에 가장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감사의 감정이다. 어떤 소유나 사건이 나의 삶을 더 질량적으로 풍성하게 해줘서 느끼는 이유 있는 감사이다. 오래 기다리던 아기를 얻은 경우, 직장을 얻거나 입학시험에 합격하거나 투자한 주식에서 이익을 보았을 경우, 칭찬을 받았거나 타인에게서 도움을 받았을 때 고맙다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덧셈감사’의 본질을 철학적으로 압축하면 인간의 실존적 삶 속에서 자신의 에로스적 욕망이 충족될 때 느끼는 감정이다. 여기에서 ‘에로스적 욕망’이란 인간 실존을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더 풍성하게 해주는 그 어떤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는 생명충동이다. 이 충동과 욕구가 충족될 때 즐거움과 감사의 감정이 생긴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이상하게도 ‘뺄셈법 감사’라는 매우 역설적인 감정이 있다. 분명히 셈법으로 보면 손해요 줄어들거나 빠져나간 결손인데 감사의 맘이 드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면, 악성 암 진단을 받은 환자와 가족은 첨엔 절망하다가도 좋은 의사와 약을 만나 앞으로 5년 생명이 연장되었다는 결과를 듣고 한없이 감사한다. 평생 모은 재산이 화재로 불타 버렸는데, 불구덩이 속에서 아기와 가족 생명이 무사한 것만을 감사한다. 독립운동하다가 잡힌 애국지사는 의미있게 죽을 자리를 얻지 못할까 걱정했는데 독립운동가로서 죽는 자리를 얻어 기쁘고 감사하다고 최후 법정진술에서 말한다. ‘뺄셈법 감사’에서 인간은 자기 실존이 어쩐지 이전보다 맑아지고 순수해지고 경쾌해진 것을 경험하게 된다.
감사라는 마음의 삼중주 중에서 가장 신비한 셋째 범주의 감사를 ‘제로셈법 감사’라고 이름 붙여 본다. 중학교 셈법에서 어떤 수에 제로(zero)를 곱하거나 나누는 셈법을 은유로 하여 붙인 감사마음의 색상이다. 예를 들면, 10이라는 수에 영을 곱하면 영이 되고, 영으로 나누면 무한이 된다. ‘제로’는 철학에서 존재의 죽음, 곧 ‘무화’(無化)의 상징이고, 종교에서 ‘제로’는 온전함과 영원을 상징하는 ‘텅 빈 충만’의 상징이다. 원불교의 ‘일원상’(一圓相)이 그 대표적 상징이다. 어떤 수에 영을 곱하면 영이 되듯이, 나의 소유와 사회적 신분이 얼마나 크든 작든 죽음 앞에서는 무화된다. 그런데 삶을 나누는 셈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맘은, 유한자가 자기부정을 매개 또는 계기로 하여 영원과 무한으로 생명이 잇대어지고 승화되는 역설을 예감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이 셋째 ‘제로셈법 감사’는 사람이 생명체로서 자기의 소유나 존재의 능력 차원에서 강화되거나 약화되는 일과는 아무 관련 없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감사하다고 느끼는 마음이다. 내 삶의 현실은 고해요 고통인데 한가하게 배부른 소리 한다고 화내는 사람도 있겠지만, ‘제로셈법 감사’는 재산 정도, 교육 경력, 생활 현실, 사회 신분 등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다. 소유보다 존재에 관심을 더 기울이는 사람들을 우리 주위에서도 어렵지 않게 자주 만나게 된다. 폐지를 모아 팔고 떡장수를 하여 모은 돈을 아낌없이 장학금으로 내놓는 이 땅의 할머니들이 대표적 사례이다. 그들은 자기 생명과 주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항상 경이롭고 신비하고 감사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다.
허허막막한 대우주 시공간 속에서 이렇게 생명체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놀랍고 고마운 기적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논밭이 이제는 텅 비었다. 세 종류 셈법감사가 모두 의미 있지만, ‘제로셈법 감사’를 특히 음미할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