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명장면】공자의 청년시대 2
내란의 시대
天下有道 則政不在大夫 天下有道 則庶人不議
천하유도 즉정부재대부 천하유도 즉서인불의
천하에 도가 있으면 정권이 대부에게 있지 아니하고, 천하에 도가 있으면 백성들이 논란하지 않을 것이다. -‘계씨’편 2장
1. 실패한 ‘대정봉환’(大政奉還)
*사진출처(아래 모두) : 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
계평자(季平子)가 자기 집 안뜰에서 천자의 춤인 팔일무를 자기 조상 제사에 바친 사건은 노나라 지식인 사회에 보이지 않는 큰 파문을 일으켰다. 아무리 계씨 집안이 100년 가까이 노나라를 사실상 통치하고 있다지만, 어디까지나 대부의 신분이지 임금은 아니었다. 어린 조카 성왕(成王)의 권좌를 끝까지 지켜준 주공(周公·노나라 시조①)의 충성을 자랑으로 여겨온 노나라 국인(國人)들에게 계평자의 이런 참람한 행위는 높은 자부심에 큰 흠집을 내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번엔 평자께서 좀 심했어. 주변 시선도 생각했어야지 하필이면 임금 제삿날에 그러실 게 뭐람.”
곡부의 주루(酒樓)에서는 대범한 술꾼들이 낮은 목소리로 갑론을박을 벌였다.
“다음은 계씨들이 공실(公室)의 안방을 차지하는 장면을 보게 되는 걸까?”
“안 될 것도 없겠지. 64 대 2. 힘의 차이를 이보다 더 깔끔하게 보여주는 예가 어디 있겠나?”
“문제는 숫자의 차이가 너무 커진 데 있는 게 아닐까? 절대권력은 늘 달콤한 재앙의 뿌리였어.”
사람들은 어느덧 10여 년 전 노나라 전체를 충격에 빠뜨린 남괴의 ‘봉기’를 떠올렸다. 그때 남괴는 ‘국가통치권을 공실에 돌려주자’는 이른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명분으로 내걸고 계평자에게 반기를 들었다.
“요즘 정치를 보면 남괴 같은 의사(義士)가 다시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지.”
“의사는 무슨. 제 밥그릇이 작아진 걸 못 참았을 뿐이라고.”
계씨 치하의 곡부에서 남괴는 반체제의 상징이자 금기의 이름이었다.
대대로 계씨의 가신 집안이던 남괴는 아버지 남유의 뒤를 이어 계씨의 근거지인 비(費)읍의 읍재(邑宰)로 임명될 만큼 계무자(季武子)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할아버지 계무자에 이어 계씨의 수장이 된 젊은 계평자는 남괴를 신임하지 않았다. 계평자가 남괴를 중용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그가 지사형(志士形) 가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남괴는 대부의 가신에 지나지 않은 사족(士族)이었지만, 그의 정치적 이상은 임금을 중심으로 대부들이 정치를 담당하는 정상적인 봉건정치 체제였던 것 같다.
아버지 계도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계씨 정권의 후계자가 된 젊은 계평자는 할아버지와는 인품이나 성격이 딴 판이었다. 전형적인 마키아벨리스트형 권력자였다. 계평자는 자신의 권위와 정통성을 높이기 위해 노나라와 인근한 소국인 거나라를 쳐서 읍을 하나 빼앗은 다음, 그 전공을 과시하기 위해 태묘(주공의 묘)에 제사를 바치는 이벤트를 벌이면서 잡아온 포로를 희생으로 사용했다. 소나 양이 아니라 사람을 희생물로 삼았으니 무도한 짓이었다. 당시 제나라에 망명 중이던 장무중이 이 소식을 듣고 “사람과 짐승을 동일하게 여기다니 도의를 무시해도 한참 무시했다”는 비난성명을 내놓을 정도였다. (<좌전> 노소공 10년) 계평자가 이런 반응이 있을 줄 모르고 사람을 제사상에 올렸을까? 아마도 젊은 자신의 권력을 의심하거나 넘보는 세력에게 일종의 공포감을 심어주기 위한 전략이었을 것이다.
이런 계평자와 뜻이 맞을 리 없었던 남괴는 공실의 종친 등과 손잡고 무도한 계평자 타도 거사를 계획했으나 비밀공작에는 서툴렀던지 기밀이 누설되는 바람에 자신의 근거지이기도 한 비읍으로 돌아가 농성했다. 남괴의 반란은 3년을 끌었다. 계평자는 무력 진압 대신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사용하며 회유책을 썼다. 비읍 백성들은 불안감에 휩싸였고 남괴의 가신들 가운데서도 도망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남괴의 봉기는 제발 떠나달라는 읍민들의 호소와 믿었던 부하의 배신으로 막을 내렸다. 남괴는 지지자들을 이끌고 제나라로 망명했다. 제경공이 망명 온 남괴에게 “그대는 반도(叛徒)인가?”라고 묻자 남괴는 “공실을 강하게 하고자(欲張公室) 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좌전> 소공 12, 14년)
남괴가 일개 사인(士人)의 신분으로 제후의 통치권 회복을 주장하며 경대부(卿大夫) 계급의 주군에게 반기를 든 이른바 ‘장공실’ 거사는 당시 중국이 격심한 계급 변동의 시기로 진입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경대부와 귀족계급이 임금을 제치고 정권을 전횡하는 일이 다반사가 되자, 이번에는 대부의 가신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노나라에서 남괴처럼 가신이 제후의 통치권 회복을 주장하며 자신의 상위 계급에 반기를 든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겉으로는 국가 정통성 회복이라는 명분이 내걸렸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반 사(士) 계급이 성장한 자신의 실력에 걸맞은 정치권력을 요구하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이때가 서기전 530년으로 공자의 나이 스물두 살이었다. 생계를 위해 미관말직이긴 하나 조정의 관원(승전리(乘田吏)·목장관리원)으로 있었으므로(<사기> ‘공자세가’) 사건의 시말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사족(士族)의 일원으로서 이 사건이 지닌 정치적 의미에 대해 여러 각도로 고찰해보았을 것이다. 우리의 총명하고 높은 포부를 지닌 20대 초반의 공자가 이 사건에서 아무런 정치적 영감을 받지 않았을 거라고 여긴다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일인지 모른다.
2. 서자와 적자
아무튼 곡부성의 내밀한 어디에선가 무슨 일이 진짜로 꾸며지고 있었다. 너무도 중요한 극비였기에 주모자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감지하지 못할 뿐이었다. 계씨를 타도하고자 한 이 비밀계획은 기밀만 잘 유지되는 한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모자들은 생각했다.
‘남괴는 실패했지만 그때는 팔일무 사건이란 변수가 없었다.’
불씨의 발화점은 뜻밖에도 계씨 집안이었다.
계씨 집안에는 계무자의 서자로서 계평자에게는 서삼촌이 되는 삼형제가 있었다. 계씨 권력의 한 축을 이루고 있던 삼형제 중 큰형 계공조가 죽자 둘째 계공해(季公亥)가 집안을 이어받았고 신야고라는 가로(家老)가 공해를 도왔다. 그런데 과부가 된 공조의 부인이 요리사와 정분이 나고 말았다. 과부는 이 사실이 시동생이자 집안의 새 수장이 된 공해에게 들켜 쫓겨날까봐 선수를 쳤다. 공해가 자신에게 동침을 강요했고 이 일을 신야고가 주선했다며 계환부에 고발했다. 계평자의 동생으로 계환부의 관리를 책임지고 있던 공지(公之)에게서 이 불상사를 전해들은 계평자는 격노한 나머지 신야고를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공해가 자신의 결백함과 신야고의 무고함을 호소하러 계환부로 달려갔으나 계평자는 한나절 동안 공해를 만나주지 않았고, 그사이 공지가 신야고의 사형을 집행해버렸다. 공해는 원통한 나머지 자기 가슴을 쥐어뜯었다.
계평자에게 마음속 깊이 원한을 품게 된 공해에게 팔일무 사건이 가져온 민심의 동요는 절호의 기회로 다가왔다. 공해는 먼저 임금 계승 서열 1위인 공자 위(爲)에게 접근했다. 공해는 간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좋은 활을 세자에게 바친다는 명목으로 함께 활쏘기를 하면서 공위에게 동참의 손을 내밀었다. 팔일무 사건으로 이미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던 공위가 그 손을 잡았다. 거사의 협조자가 다른 사람도 아닌 계씨 집안의 유력자였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공위는 친삼촌들인 공과와 공분을 끌어들여 아버지 소공을 설득하게 했다. 불안한 소공은 자신의 거의 유일한 총신이자 충신인 자가기(子家羈. 자가구라고도 하며 자는 의백(懿伯)이다. 높여서 자가자라고 불렸다)에게 거사를 의논했다. 거사 계획을 들은 자가기는 극력하게 반대했다. 소공에게는 다소 뜻밖의 반응이었다. 자가기는 한때 노나라 최고 권력자였다가 계무자에게 타도된 공자 수(대부 양중)의 손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가기는 개인적 감정 때문에 정치적 판단을 그르치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전하, 참소의 무리를 멀리하십시오. 공실이 백성을 잃은 지 벌써 여러 대이며, 조정 안팎이 모두 삼환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때에 정권을 탈환하려는 것은 요행을 바라고 일을 벌이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절대 불가입니다.”
소공은 불안하면서도 미련이 남았다. 다시 노효공의 후손으로 대호족인 후소백(后+언덕부昭伯)을 불러들였다.
후소백은 소공이 원하는 답변을 했다.
“때가 무르익었으니 기회를 놓치지 마소서.”
3. 닭싸움이 낳은 원한
당시 중국 사람들은 닭싸움을 즐겼다. 춘절 같은 명절 때나 백중날이면 온 나라 사람들이 투계로 떠들썩했다. 곡부 궁전 왼쪽에 계환부가 있고 담장 건너에는 후소백의 저택이 있었다. 두 집안은 자주 투계를 벌였다. 두 권력자 가문의 닭싸움은 종종 자존심 싸움으로 변질됐다. 내기돈도 점점 커졌다. 두 가문은 춘절 대회전을 위해 싸움닭을 철저히 조련하고 무장시켰다. 계씨가는 싸움닭 날개 안에 겨자를 바르고 머리에 투구를 씌웠다. 후씨가는 닭발에 쇠발톱을 끼웠다. 결전의 날. 공격을 벌이던 후씨가의 닭이 겨자 때문에 눈이 따가워 미친 듯이 날뛰었다. 싸움은 계씨가 닭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다. 그런데 정신없이 날뛰던 후씨가 닭의 날카로운 쇠발톱이 어쩌다가 계씨가 닭의 목을 꿰뚫었다. 자존심이 상한 계씨가 사람들이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쇠발톱은 반칙이다. 후씨가 사람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겨자는 반칙이 아닌가? 기싸움이 팽팽하자 계씨가 사람들이 계평자를 슬쩍 자극했다. “후씨가 사람들이 평소에도 우리를 우습게 여깁니다.” 신중하고 노회한 할아버지와 달리 성격이 급하고 오만한 계평자는 일방적으로 후씨가 닭의 반칙패를 선언한 뒤 내기돈을 받아간다며 이웃하고 있던 후소백의 땅까지 빼앗아버렸다.(이상 <좌전> 노소공 25년) 늙은 후소백은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한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의여(意如·계평자의 이름) 이놈, 반드시 이 수모를 갚아주리라.”
어쩌면 후소백은 자신의 감정 때문에 계씨가 몇 대에 걸쳐 정권을 유지해온 저력을 잠시 잊어버렸는지 모른다. 아무튼 소공은 후소백의 격정적인 지원 의사에 큰 용기를 얻어 거사를 승인하기에 이른다.
*투계(닭싸움). 김상순 화백 작품
4. 장무중과 계무자
훗날 나, 이생이 곡부의 장로들에게 들은 바로는 공해와 공위가 극비리에 친위 쿠데타 계획을 짜고 있을 무렵, 곡부 제일의 호족인 장씨가의 수장 장소백(臧昭伯)이 공자를 비롯해 몇몇 젊은 재야 지식인들을 자기 별장에 초대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노나라 사구(司寇·법무장관) 벼슬을 세습해온 집안으로서 팔일무 사건 이후 곡부 재야의 움직임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특히 사 계급 중에서 명망 높은 신진학자인 공자와 그의 붕우(朋友·이때는 제자라기보다 정치적 견해를 같이하는 동지에 가까웠다)들의 생각이 궁금했다. 개인적으로는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이 장씨가의 수장이자 장소백의 숙부인 장무중(臧武仲)을 제나라 군대의 포위 공격에서 구출한 인연도 있어(<좌전> 노양공 17년②) 평소 장소백은 맹손씨 가문의 맹희자와 더불어 공자 학당의 후원자를 자처하고 있었다.
곡부에서 장씨 가문은 계씨 정권의 독단을 견제하여 공실의 권위와 안녕을 지키는 역할을 함으로써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장씨 집안이 법무장관 겸 검찰총장에 해당하는 사구 벼슬을 세습해온 것도 역시 삼환을 견제하기 위한 공실과 호족들의 자구책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계씨와 장씨는 정치적으로는 타협과 견제의 대상이었으나 사적으로는 같은 공실의 후예로서 대대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두 집안의 정치적 온도차를 보여주는 일화가 당시 노나라 지식인 사회에 널리 회자되고 있었다.
계급 변동의 시기였던 당시 중국에는 각 나라마다 정치적 망명자들이 많이 발생했다. 노나라 정권을 잡은 계무자는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형태의 정치 망명 집단을 받아들여 우호세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노나라 내부에서도 계씨 정권을 혐오하여 반란을 도모하거나 타국으로 망명하려는 반체제 인사들이 증가했는데, 계무자는 이들을 제때 잡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불안했다. 집권자인 계무자가 사구인 장무중에게 불만스럽게 말했다.
당신이 법무장관인데 어째서 반체제 불순분자들을 내버려두고 있소?
내가 사구이긴 하나 그들을 다스릴 명분도 없고, 능력도 없소이다.
사구인 당신이 어째서 다스릴 수 없다는 거요?
무자께서 정경(正卿)의 신분으로 외국의 도적(망명객③)들을 좋아하여 대도(大盜)에게는 높은 신분과 땅을, 차도(次盜)에게는 노예와 거마(車馬)를, 소도(小盜)에게는 검과 의복을 주며 예우하는데, 어떻게 겨우 사구밖에 안 되는 내가 국내의 도적(반체제 인사)을 다스릴 수 있겠소? (<좌전> 노양공 21년)
계무자가 머쓱해하는 모습이 눈에 선할 정도다. 그러나 그들은 금도를 알았기에 서로의 선을 넘지는 않았다. 그런 오랜 두 가문의 공존에 금이 가는 사건이 공교롭게도 팔일무 사건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발생했다. 장소백에게 장회라는 사촌동생이 있었다. 장소백이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을 때 장회는 장소백의 부인과 장소백의 동생 사이에 무슨 불미스러운 일이 있는 양 보고를 했다. 의혹에 빠진 장소백이 곡부로 돌아와 사정을 알아본즉 무고인 것이 확인되자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장회를 죽이려 했다. 장회는 아마도 장소백에게 동생의 부정을 고발하려다 되레 자기가 혐의를 받게 된 모양이었다. 장회가 장씨가의 비밀 회계장부를 들고 계환부로 달아나자 장씨가의 가로가 장정 5명를 데리고 계환부에 들어가 장회와 장회를 숨겨준 계씨 사람들을 붙잡았다. 그러나 이를 불경스러운 난입으로 여긴 계평자가 진노하는 바람에 계환부 사람들이 장회를 빼앗아 풀어주고 가로를 구금해버렸다. 두 가문의 체면 싸움으로 비화된 이 사건으로 인해 급기야 가문의 수장끼리도 척을 지고 말았다.(<좌전> 노소공 25년)
5. 장소백의 질문
장회 사건으로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장소백은 젊은 초대 손님들을 상대로 술을 한 순배 돌린 뒤 공자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대는 팔일무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법상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단지 예법만인가?”
“군자라면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군자의 도리로도, 신하의 도리로도 맞지 않는 일은 무엇으로 바로잡을 수 있을까?”
“인과 예로 할 뿐입니다.”
“날뛰는 미친 개가 어찌 인의를 알겠는가?”
“미친 개라면 몽둥이가 약이겠습니다만, 군자를 가장한 개라면 섣불리 몽둥이를 들어선 안 됩니다.”
“군자를 가장한 개라…. 견자(犬子)는 그럼 무엇으로 때려잡아야 하나?”
이때 공자가 자세를 바로하고 장소백에게 말했다.
“대부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 알겠습니다. 계씨가 3대에 걸쳐 정권을 전횡한 지 70여 년이 되어 국인들은 계씨의 집정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단지 오랜 세월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동안 계씨의 정치가 자신들의 이익에 크게 반하지 않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비록 팔일무 사건은 참람한 짓이었으나, 권력자가 그로 인해 백성에게까지 신의를 잃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장차 공실의 정치가 계씨의 정치보다 나을 것이란 희망이 없다면 백성은 굳이 정권을 바꿀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계씨를 누르려는 목적이 단지 공실을 높이는 데 있다면 그것을 어찌 백성을 위한 정치라 하겠습니까? 천하에 도가 있으면 정권이 대부에게 있지 않고, 천하에 도가 있으면 백성들이 그 정치를 비난하지 않을 것입니다.(天下有道 則政不在大夫 天下有道 則庶人不議. -‘계씨’편 2장④) 지금 공실의 어려움은 너무 오랫동안 백성들의 믿음과 사랑을 얻지 못한 데 있습니다.”
“자네가 공실이라면 지금 무엇을 하겠는가?”
“더욱 겸손한 자세로 군자를 키우는 일에 집중하겠습니다.”
“시간이 많은 사람이로군. 정치란 때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네.”
“오직 천명(天命)을 따를 뿐입니다.”
“정치는 권도(權道)이지, 이상이 아닐세.”
“주공(周公)의 대의(大義) 속에 권도가 있습니다.”
공자가 돌아간 뒤 장소백의 가신이 공자가 젊은 사람치고 말이 너무 공허하다고 비판하자 장소백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긴 하지, 허허. 그런데 왠지 저 친구에겐 그게 더 잘 어울려. 뭔가 범접하기 어려운 기운, 그 드높은 이상(理想)의 빛이….”
6. 계씨 타도의 깃발이 오르다
다음날 소공이 궁전의 내밀한 곳으로 장소백을 불렀다.
“계씨를 타도하려는데 당신 생각은 어떻소?”
장소백은 소공으로부터 뜻밖의 질문을 받자 어젯밤 공자와 나눈 대화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지금의 공실은 정권을 경영할 능력이 없고 임금은 탐욕스럽고 어리석기까지 하다. 공자와 같은 명민한 친구들도 그래서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보는 거다. 이 판국에 과연 사사로운 감정으로 시작된 정변이 성공할 수 있을까? 설사 정권을 탈환한다 해도 계씨에서 다른 계씨로 정권의 주인이 바뀌는 게 고작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
장소백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하!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그들과 더불어 대사를 도모했다간 오히려 계씨에게 되치기를 당하여 전하의 안위마저 보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좌전> 노소공 25년)
그러나 소공의 가슴에는 이미 후소백과의 맹약이 환상처럼 아로새겨져 있었다.
팔일무 사건 뒤 두 달여가 지난 어느 날 이른 아침. 공자와 자로가 학당 앞의 낙엽을 쓸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일단의 기병들이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쏜살같이 내달리고 있었다. 그 뒤로 길고 날카로운 창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뒤따랐다. 행군의 선두에 선 사람은 중무장한 세자 공위와 계평자의 서숙부 공해였다. 일군의 무장병력이 향한 계환부는 아직도 깊은 잠에 빠진 듯 고요하기만 했다. 공자와 자로는 빗자루를 내던지고 후다닥 학당 문을 걸어 잠갔다. 서기전 517년, 노소공 25년, 공자가 서른다섯 살 되던 해 음력 9월 무술(戊戌)일의 일이었다.
<원문 보기>
*<논어명장면>은 소설 형식을 취하다 보니 글쓴 이의 상상력이 불가피하게 개입되었다.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논어를 새롭게 해석해보자는 글쓴 이의 취지를 살리면서 동시에 독자들의 주체적이고 다양한 해석을 돕기 위해 원문을 글 말미에 소개한다. 소설 이상의 깊이 있는 논어읽기를 원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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