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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안마시는 그리스도인이 답답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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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중진담 - 이분법적 의식에서의 탈피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학 명예교수, 아하! 이사장)

 


연말연시가 되면 술마시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술 마시는 사람이 많으면 술에 취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술에 취한 사람은 보통 말이 많아진다. 그런데 “취중진담”이란 속담에 의하면, 술에 취한 사람의 말에 진담이 있을 수 있단다. “술에 취한 사람이 하는 말, 뭐 귀담아 듣소” 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 속담은 오히려 술에 취했을 때 진짜 말이 나온다니 무슨 까닭인가? ‘사람들이 내가 취한 줄로 알아줄 터이니 그 동안 말하고 싶어도 못했던 것, 술 핑계로 실컷 떠들어 보자’ 하고 진담을 말하게 된다는 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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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 영화 <비포 미드나잇>


그럴 수도 있겠지만, ‘취중진담’이라는 데는 그 이상의 뜻이 숨겨져 있을 것 같다. 현대 분석심리학에서 말하듯, 우리가 맹맹한 의식 상태에 있을 때 갖고 있는 소위 ‘정상적 의식’이란 우리가 갖고 있는 의식의 전부가 아니고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사회생활을 영위하도록 해주는 의식이기도 하다. 선생이면 선생‘답게’, 친구면 친구‘답게’, 모두 ‘답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 사회에서 우리에게 기대하거나 요구하는 역할이 무엇인가 알아내고, 거기에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은 이 ‘정상적 의식’ 덕택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우리의 사회생활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어느 면에서 볼 때, 이것은 일종의 가면(persona)을 쓰고 살아가는 것과 같다. 우리의 신분, 처지, 지위, 위신, 체면 등등을 고려하면서 ‘척’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결국 ‘한 꺼풀씩’ 붙이고 다니는 셈이다.
이렇게 살자니 우리의 대인 관계에서 ‘진담’이 나올 기회가 거의 없다. 가면극에서 배우들이 제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쓰고 있는 가면의 역할에 따라 소리를 내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내 소리가 아니라 사회에서 얻은 ‘꺼풀’에 맞는 소리를 내고 있을 따름이다. 가면과 가면이 맞부딪히는 삭막한 소리가 있을 뿐이다.


1974년 일본 동경대학에 잠깐 가 있었는데, 그 때 만난 동경대 교수로 오끼나와 술이나 한국의 소주를 즐겨 마시던 가마다 시게오(鎌田茂雄) 박사의 말이 생각난다. “친구를 사귀는데 차를 마시면서 사귀면 10년이 걸리는데, 술을 마시면서 사귀면 하루 저녁이면 족하다”는 것이었다. 꼭 맞는 말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술이 들어가면 우리의 맹맹한 의식에서 쓰고 있던 가면이나 가식에서 벗어나 다른 차원의 인간과 인간이 직접 맞부딪혀 ‘진담’을 이야기하게 되므로 그만큼 사귐이 진실해지고 빨라진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특히 일본처럼 자기의 속내(本根)를 좀처럼 들어내지 않는 사회에서는 더 그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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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푸짐한 안주. 사진 한겨레 박미향 기자


옛날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은 술을 많이 마신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은 단순한 알코올 중독자들이나 통속적 의미의 술주정뱅이들이 아니었다. 술을 마시므로, 말하자면, 새로운 의식 세계에 들어가 그 세계에서 우정을 나누고, 진리를 논하고, 예술을 창조했다.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떠나가는 김삿갓’도 이런 경지에 이르렀던 사람이라 여겨진다.
물론 맹맹한 의식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반드시 술만을 마셔야 되는 것은 아니다. 술 혹은 주정(酒精)을 영어로 ‘spirit’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다 알 듯, ‘영(靈)’ 혹은 ‘성령’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술과 성령은 서로 통하는 데가 있다는 이야기다. 둘 다 흥을 불러일으킨다. 둘 다 우리를 새로운 의식의 경지로 몰입하게 한다. 물론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술보다는 성령의 도움으로 이런 경지에 몰입하는 것이 더욱 확실하고 훌륭한 방법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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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푸른소금> 중에서


흔히들 술을 마시지 않는 일부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꼭 막혀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고 한다. 한 번 틀어지면 맺힌 마음을 풀지 못 한다는 뜻이다. 술의 작용도 모르고, ‘성령’의 역사하심도 경험하지 못하는 경우 이런 막힘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내가 그래도 교인인데’ 하는 생각 때문에 가면이 한 꺼풀 더 두꺼워질 뿐이다. 이럴 경우 차라리 ‘한 잔’ 하고 속 시원하게 풀어버리는 것이 맹맹한 상태에서 꽁하며 틀어져 있는 것보다 더 큰 미덕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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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국순당 홈페이지


칼이 그것을 쓸 줄 모르거나 옳지 못한데 쓰려는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위험한 물건이 되듯이, 술도 오용되거나 남용되면 위험하다.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두드려 부수고, 헛소리나 하기 위한 전주곡쯤으로 전락되면 주정뱅이들의 전유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느님의 모든 축복을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편23:5)로 표현한 시편기자처럼, 그것을 하나의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기에 예수님도 아버지의 나라에서 우리와 함께 새 술을 마시는 날을 약속하신 것(마태복음26:29)이 아닐까. 서로 ‘진담’을 털어 놓고 마음과 마음이 통해 한 마음이 되는 날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이 글은 종교너머 아하!(http://www.njn.kr/)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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