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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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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에서 지옥을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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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에 대한 소묘 
[진은지의 낯선 시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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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낙원에 왔다
푸른 하늘은 끝없이 펼쳐져 있고, 바다는 그 깊이만큼이나 다양한 색과 생명을 품고 있다. 형형색색의 물고기와 주황 빨강 하양 빛깔의 산호는 물결을 따라 하늘하늘 춤춘다. 백사(白沙)로 덮인 땅은 햇살을 닮아 눈부시다. 나무에는 야자열매가 후두둑 떨어질 듯 매달려 있다. 하지만 아무도 탐내지 않는다. 마주치는 사람들은 비단 같은 미소를 보낸다. 그들 얼굴엔 어떤 어두움의 기미도 없다. 식탁은 늘 풍성하다. 하늘과 땅, 산과 들에서 나고 자란 것들이 숙련된 조리사의 솜씨를 거쳐 접시마다 한가득 담긴다. 누구 하나 먼저 먹겠다고 나서는 사람 없고, 내일을 위해 남겨두겠다는 탐욕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힘든 노동을 하지 않아도 먹을 수 있고, 누군가에게 복종하지 않아도 마음껏 마시고 쉴 자유가 있다. 나를 구속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들은 건강해 보인다. 화내고 분노하거나 싸우는 사람도 본 적이 없다. 범죄도 없다. 피부색이 다르다고, 여자라고, 나이 많다고 차별당하거나 배제되지 않는다. 풍요와 즐거움이 넘치고 여유와 편안함을 즐길 수 있는 곳, 이런 곳이야말로 낙원일거다. 우리는 지금 낙원에 왔다. 이곳 이름은 몰디브.

인도 여행 중에 몰디브에 다녀오기로 했다. 사람 많고 일 많은 인도를 잠깐 떠나있고 싶었다. 몰디브에 온 첫 날, 미소 띤 리조트 직원의 환영인사를 받고 열대과일로 만든 ‘웰컴 드링크’를 마시고 열흘 가량 머물 객실을 안내받은 우리는 환호했다. 편안하고 깨끗한 방과 욕실, 창문으로 보이는 에메랄드 빛 바다, 푹신한 침대와 그 위에 나비 모양으로 정성스럽게 접어놓은 침대보, 신혼부부에게 제공되는 큼지막한 과일 바구니에 감격했고, 매일 수십 가지 메뉴를 선보이는 식탁과 손에 잡힐 듯 다가와 헤엄치는 총천연색 물고기, 소란한 세상과 단절된 섬 특유의 여유로운 분위기에 감동했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누군가가 해주는 음식을 먹었고, 바닥에 먼지 하나 없는 비치빌라에서 지내는 호사를 누렸다. 우리는 몇 개월 동안 유지해왔던 배낭여행자 모드에서 단 하루 만에 럭셔리한 신혼여행을 즐기러 온 ‘고객님’ 모드로 전환했고, “여기가 좋사오니”를 연발하며 낙원의 휴일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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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에서 지옥을 상상했다
그런데 낙원의 역전극이 곧 시작됐다. 날이 갈수록 잘 차린 음식에 대한 욕구와 맛을 잃어갔고, 눈앞에서 헤엄치는 각양각색의 열대어들을 봐도 군 입대 후 네 번째 휴가를 나온 동생을 본 것 마냥 반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매일 바뀌는 침대 시트의 주름모양에도 덤덤했고, 우리를 매료시켰던 섬의 일과도 무료해졌다. 낙원의 모든 것에 생각보다 빨리 질려가고 있었다. 감각의 상실은 흥미를 반감시켰고, 몰디브의 현실은 낙원의 실체를 자각하게 했다. 매일같이 미소 짓던 리조트 직원이 방글라데시에서 온 저임금 이주노동자이고, 이런 고용 형태가 다른 리조트에서도 마찬가지임을 알게 된 후로는 이곳이 누군가에게는 힘든 일상이 반복되는 감옥일 수 있음을 알았다. 화려하고 세련된 몰디브 리조트들이 유명 호텔 체인과 다국적 자본들의 각축장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몰디브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전망 좋은 바닷가와 경치 좋은 산에서 익숙한 이름의 호텔들을 마주칠 때마다 확인하게 된 사실이다.

맨발로 리조트를 거닐다가 ‘우리가 버린 쓰레기들은 어떻게 처리할까?’라는 물음도 생겼다. 이에 대한 답은 얼마 전 보게 된 몰디브의 틸라푸쉬 섬을 다룬 영상에서 찾았다. 참담했다. 내가 몰디브에서 버린 쓰레기들을 치우느라 누군가는 지옥 같은 일상을 살아왔구나 하는 자괴감을 지울 수 없었다. 누구도 괴로움이나 고통 없이 안락하게 살 수 있는 즐거운 곳이 낙원이라면 몰디브는 분명 낙원이 아니었다. 가려져 있고 드러나지 않았을 뿐 몰디브에는 고통과 괴로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었다.

낙원에서의 시간이 쌓일수록 나는 예전엔 느끼지 못한 무력함과 무료함에 빠져 허우적댔다. 배고픔 걱정도 없고 일상의 괴로움도 느끼지 못했지만, 배부름에 대한 기대와 삶의 소소한 즐거움이 희박해졌기 때문이다. 그런 나날을 보내면서, 어쩌면 지옥은 시뻘건 화마가 사람들을 삼키고 고통과 후회의 비명이 들리는 곳이 아니라 이웃의 비참을 외면하고 안일한 생각으로 현실에 안주하며, 내게 주어진 것에 대한 감사를 잊고 신에 대한 간구마저 멈춘 곳일 거라고 상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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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낙원으로
사람들은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의 대척점에 있는 곳이나 상태를 낙원이라 여기는 것 같다. 우리도 그랬다. 여행자도 고행(苦行)시켜 수행자로 만든다는, 그래서 징글징글했고 잠시나마 떠나있고 싶었던 인도의 대척점에 몰디브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몰디브로 구체화된 낙원에 대한 나의 기대는 지극히 세속적인 욕망이자, 절대 채워질 수 없는 허망한 욕망이었다. 세속의 욕망이 넘치는 곳에 낙원이 있을 리 없다. 누군가의 슬픔과 고통을 외면한 낙원일리 없다.

몰디브에서 다시 인도로 돌아와 고행 같은 여행을 계속하면서 나는 뭔가 달라졌음을 눈치챘다. 성가신 사람은 여전히 많았고 경사진 길들과 숨 가쁜 상황들도 나타났지만, 이전보다는 편안하고 담담하게 그런 일들을 마주하는 나를 감지했다. 어깨를 짓누르는 가방을 메고 온몸이 무너질 듯 걸어 다니다가 마주친 사람과 50원짜리 짜이(홍차?우유?향신료를 넣고 끓인 인도식 밀크 티)를 나눠 마시며 새로운 힘을 얻었고, 허름한 여행자 숙소에서 말할 수 없는 평안을 맛보았고, 불결하지만 끼니를 먹을 수 있음에 감사했던 일들 속에서 나는 충분히 행복했고 즐거웠다. 그렇게 인도에서, 수많은 나라에서 사람들 사이를 다니며 때로는 사람들의 삶을 만나면서 생각했다. 편안하고 안락하고 아무 고통이나 아픔, 근심 없는 곳만이 낙원은 아닐거라고.  

그런데 고백할 게 있다. 일상의 고단함과 피로가 엄습할 때면 나는 여전히 몰디브로 표상되는 편안하고 안락한 세계를 욕망한다. 《꽃들에게 희망을》에 나오는 줄무늬애벌레는 욕망의 꼭대기에 아무 것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허물을 벗었는데, 나는 도대체 얼마만큼의 시행착오를 거쳐야 욕망의 허울을 벗고 진정한 낙원에 도달할 수 있을까?

 

사진 설명: 1st_밤의 몰디브는 신비 그 자체다.  2nd_인도 바라나시 갠지스 강의 아침 풍경. 활기 넘치는 아이들 앞에서 무기력한 모습ㅇ로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남자의 모습이 강렬한 대비로 남는다. 인도에서 누군가의 고통을 바라보는 일조차 너무나 벅차다는 것을 알아갔다. 3rd_저 바다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보트 선착장 끄트머리에 앉아있는 커플의 뒷모습을 몰래 찍었다. 4th_갠지스의 여러 모습들. 아침마다 정결 의식이 행해지는 갠지스강인데, 강으로 난 계단(사진에 보이는)은 사람들이 쉬거나 각종 종교적 의례를 하는 장소다.


글_진은지
집, 학교, 교회밖에 모르는 ‘바른생활 청소년’이었다. 스무 살 때 동갑내기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강산이 변할 시간 동안 그와 연애와 유희의 나날들을 보낸 후 서른 살에 결혼하고 세계를 내 집 삼아 3년 여의 신혼여행을 떠났다. 집으로 돌아 온 지금은 두 아이를 낳아 행복하게 햄 볶으며 살고 있으며, 다시 온 가족이 세상을 누빌 그 날을 꿈꾼다. 홈페이지는 www.kj1212.com.

 

사진_권태훈
초등학교때 시작한 컴퓨터와 대학교때부터 푹 빠지게 된 사진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신혼여행 갈 때도 카메라와 렌즈를 제일 먼저 챙겼고, 그 덕분에 아름다운 세상의 풍경과 좋은 사람들의 미소를 사진에 담아올 수 있었다. 지금은 김포명성교회 전도사와 프리랜서 웹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으며, 환갑이 되기 전 아내, 두 딸과 함께 제2차 세계여행을 가게 되길 바라고 있다.

 

 

*이 글은 복음과상황(goscon.co.kr)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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