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함경남도 원산 덕원수도원 농장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
“용기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다. 나는 잊지는 않겠지만 용서한다.”
지난 5일 별세한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넬슨 만델라(1918~2013)가 1964년부터 1990년까지 27년을 감옥에서 보내고도 증오심을 딛고 화해의 사도로 등장한 뒤 한 말이다. 이 땅에도 ‘잊지는 않겠지만 용서한다’는 것을 보여준 이들이 있다.
한반도 북쪽 함경남도 원산 성베네딕도 덕원수도원에서 수도생활 중 한국전쟁을 맞아 공산주의자들에게 끌려가 고난을 받은 사제와 수도자(수사·수녀)들이다.
덕원수도원을 잇기 위해 1952년 경북 칠곡 왜관에 설립된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은 10일 덕원의 순교자 38명을 성인으로 추대하는 시복·시성 준비작업을 조만간 완료해 내년 5월에 로마 교황청에 시복·시성을 공식 청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교황청은 이에 따라 본심사를 거쳐 시성에 앞서 시복(복자로 칭함)하게 된다. 현재 교황청은 윤지충 바오로 등 순교자 124위와 최양업 신부 등 125위에 대한 본심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미 시성된 김대건 신부 등 103위와 윤지충 등 125위가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 말기에 순교나 박해를 당한 이들이라면, 덕원수도원 순교자들은 20세기에 공산주의 세력에게 핍박받은 이들이다.
이들에 대한 시복·시성 작업을 해온 이성근 신부는 “전세계에서 20세기에 순교한 이들 중 교황청에 의해 시복·시성된 분들은 스페인 내전 희생자들뿐”이라며, 38위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WCC) 부산총회 참석차 최근 방한한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평의회 의장 쿠르트 코흐 추기경은 덕원수도원 순교자 외에 한국전쟁 때 순교한 81위에 대한 시복·시성 절차도 차질 없이 진행해 교황청에 청원할 것을 한국 가톨릭 관계자에게 요청한 바 있다.
성베네딕도 오틸리엔수도원이 1920년대 원산 외곽 150여만평의 아름다운 땅에 성당, 신학교와 함께 세운 덕원수도원은 1949년 북한 집권세력에 의해 폐쇄돼 평수사와 신학생은 귀가조처 되고, 부제 이상의 사제 67명은 체포돼 평양으로 이송됐다. 이 가운데 8명은 유죄가 확정돼 평양에 잔류하고, 59명은 자강도의 옥사덕 수용소에 수감됐다. 평양 잔류자 8명은 전원 총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옥사덕에서 엄동설한의 참혹한 노동과 영양실조 등으로 17명이 순교했다.
최근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삶을 그린 공지영의 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는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가 연상되는 옥사덕 수용소의 혹독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북 함경남도 원산 덕원수도원 전경
덕원수도원 내에서 성가를 부르는 모습
북 자강도 옥사덕수용소에서 고난을 겪고 독일 오틸리엔수도원으로 귀환환 독일 수도자들.
4년간 수용소 생활 뒤 독일 정부의 노력으로 이곳에서 살아남은 독일인 신부 24명과 수녀 18명 등 42명은 본국으로 귀환한다. 수용소 생활의 후유증으로 사망하거나 선교사역이 어려운 이들을 제외한 10명은 1956년 한국으로 돌아온다. 이 가운데 신부 5명, 수사 2명은 왜관수도원에 자리잡는다. 이들을 포함해 덕원수도원 출신들이 초기 왜관수도원의 주축이 된다.
공산 세력들이 수도원에 들이닥칠 때까지 “양떼와 함께하겠다”며 선교지를 떠나지 않고 순교를 감수한 순교 정신과 함께 주목되는 것이 왜관으로 귀환한 독일인 사제·수사들의 남다른 모습이다. 이들이 주축이 돼 아시아 최대 규모의 수도원이 된 왜관수도원은 지금까지 사회적 약자와 인권 민주화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 왔다.
북의 공산주의자들에게 가족이나 재산·교회를 잃고 남하한 개신교 인사들의 상당수가 남한 우익의 뿌리가 되어 민주·인권을 탄압한 독재정권을 뒷받침해 주었는데, 그들 못지않게 북에서 핍박받고 내려온 이들이 어떤 이유로 다른 삶의 모습을 보여준 것일까.
왜관수도원은 지난 2005년엔 가톨릭의료국제협력단과 함께 북한 나진·선봉지구에 300만달러를 들여 100병상 규모의 나선국제가톨릭병원을 지었고, 최근 40만달러를 들여 증축하기도 했다. 왜관수도원의 수도원장인 박현동 아빠스는 “북에서 생환한 분들이 공산당원들에게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고 욕을 듣고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봤으면서도 그들에 대한 증오를 보이기보다는 연민하는 것만을 봤다.
인간적으로는 한국 쪽을 쳐다보기도 싫었을 텐데 다시 올 수 있었던 것은 고난을 섭리 차원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이 아니었겠느냐”고 말했다.
왜관수도원 선교책임자 고진석 이사악 신부는 “옥사덕 수용소 체험기엔 공산당원들에 대한 고발이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다. 어떻게 공산당원들에 대한 감정이 쉽게 정리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그래서 잊을 수는 없었지만 용서했으리라고 본다. 또한 남한에 와서도 다른 연민의 대상이 많았기 때문에 과거의 증오심보다는 새로운 연민의 대상들에 관심을 쏟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글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사진 성베네딕도회왜관수도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