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이 누설하는 사랑의 신비
*그림 고은비
사물들 가운데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으로 겨울날 소리 없이 내리는 눈만 한 것이 또 있을까요. 옛 사람이 구름의 아름다움은 머물지 않는 데 있으며, 달의 아름다움은 둥글었다 이지러졌다 하는 데 있으며, 눈의 아름다움은 잘 쌓이는 데 있다고 했지요.
아침에 눈을 뜨고 창문을 열었더니, 완전히 딴 세상이 눈부시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와, 설국(雪國)이네! 털장화를 꺼내 신고 마당으로 나갔더니 쌓인 눈이 발목까지 푹푹 빠집니다. 적설 20센티쯤…? 밤새 그렇게 내리고도 눈은 그칠 기미가 없습니다. 더러움으로 얼룩진 대지를 백색 군단이 평정해버렸군요. 나는 괜히 눈덩이를 뭉쳐 굴리고 싶어집니다. 어린 시절 돈을 받고 팔 것도 아니면서 구슬땀을 흘리며 뭉치고 굴려 빚던 눈사람!
그렇다고 다 큰 어른이 눈사람을 빚는 건 쑥스러운 일이라, 그냥 혀끝이나 하늘을 향해 쏙 내밀어봅니다. 빨간 혀에 와 닿는 눈송이의 촉감이 신선합니다. 대문을 열고 마을길로 나가니, 개들과 아이들이 온통 제 세상을 만난 듯 천방지축 눈길 위를 겅중겅중 뛰어다닙니다. 개들과 아이들은 우주가 자기들을 알아준다고 여겨 저리 신바람이 난 것일까요. 닮은 것들끼리는 서로를 잘 알아보는 모양입니다. 천진과 순수의 대명사인 눈과 개와 아이들. 이 틈에 하느님과 시인도 끼워 넣을 수 있을까요.
하늘에 사는 흰옷 입은 하느님과
그 아들의 순한 입김과
내게는 아직도 느껴지다 말다 하는
하느님의 혼까지 섞여서
겨우 아침 한정 없이 눈이 되어 내린다.
그 눈송이 받아 입술을 적신다.
가장 아름다운 모형의 물이
오래 비어 있던 나를 채운다.
사방을 에워싸는 하느님의 체온,
땅까지 내려오는 겸손한 무너짐,
눈 내리는 아침은 희고 따뜻하다.
―마종기, <눈 오는 날의 미사> 전문
어떤 시인은 황홀한 설경을 바라보며 ‘우리 서로 말을 트자’고 했는데, 눈 오는 날 미사를 드리던 마종기 시인도 ‘하느님’과 말을 트고 싶었던 것일까요. 천상에서 내리는 눈을 맞던 시인은 눈이라는 결정체로 화신(化身)한 ‘하느님’을 온몸으로 느낀다고 노래합니다.
그 하느님이 ‘흰 옷 입은’ 성부와, ‘순한 입김’의 성자와, 아직은 느껴지다 말다 하지만 ‘혼’으로 섞여 내리는 성령으로 모습을 드러내신다고. 요컨대 눈의 형상을 입은 삼위일체 하느님이 시인 안의 ‘동심’을 자극하며 소복소복 쌓인다고. 그렇습니다. 시인의 내면에 가냘프게나마 동심의 맥박이 콩콩 뛰지 않는다면 이처럼 딱딱한 교리의 옷을 벗어버린 하느님을 어떻게 노래할 수 있겠습니까.
시는 ‘이 세계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다른 세계를 드러내는’(옥타비오 파스) 양식이라고 했는데, 눈 오는 날 ‘미사’를 보는 시인은 이 세계 속에서 다른 세계, 즉 ‘하느님의 혼’과 서늘한 교감을 나누는 풍경을 경건한 서정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모형의 물’, 눈을 매개로 ‘하느님의 혼’과 교감을 나누는 이 시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이 시가 타산과 효율과 속도에 침륜된 현대인들의 가슴에서 상실된 존재의 원천인 ‘하느님의 체온’을 느끼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종교인이라는 명찰을 착용하고 있는 이들조차 그 삶의 내부를 깊이 들여다보면, 그 속에서 ‘하느님의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겉으로는 하느님을 부정하지 않더라도 그 실제적인 삶에서는 ‘자본’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욕만 부추기는 자본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 있는데, 거기 어디 ‘하느님’이 끼어들 틈이 있겠습니까.
시인은 다릅니다. 도타운 신심 때문일까요. 아니면, 성스러움에 접속할 수 있는 민감한 감성 때문일까요. ‘오래 비어 있던 나’를 ‘하느님의 체온’이 사방에서 둘러싼다고 노래합니다. 마종기 시인에게 하느님은 그런 분입니다. 어떤 신비가의 표현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신성의 가장 높은 부분이 겸손의 심연에 자리 잡은 가장 낮은 것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쉽게 표현하면, 높이 계신 하느님도 참으로 겸손한 사람 앞에서는 맥을 못 추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튜 폭스라는 신학자는 겸손을 “신을 빨아들이는 진공청소기“라는 멋진 은유로 표현했던 것일까요.
이 겸손의 본보기는, 하늘하늘 내리는 눈송이와도 같은, ‘순한 입김’을 지닌 하느님의 아들 예수입니다. “땅에까지 내려오는 겸손한 무너짐”이란 시구처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니, 나를 먹으라.”고 말씀했던 분. 세상의 어미들이 자식에게 제 몸을 내어주듯이, 자기의 ‘살과 피’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행간에 깔고 있는 이 시는, 성스러운 사랑의 진풍경에 다름 아니지요. ‘눈 오는 날의 미사’의 의미는 곧 이것이 아닐까요.
말과 숨결로 나를 방문한 온유여.
언 손을 여기 얹고 이마 내리노니
시끄러운 사람들의 도시를 지나
님이여 친구가 어깨 떨며 운다.
그 겸손하고 작은 물 내게 묻어와
떠돌던 날의 더운 몸을 씻어준다.
……
하루를 마감하는 내 저녁 속의 노을
가없는 온유의 강이 큰 힘이라니!
―마종기, <온유에 대하여> 부분
앞의 시가 ‘겸손’에 깃드는 신성을 노래했다면, 뒤의 시에서 시인은 물(강)처럼 부드러운 ‘온유’에 깃든 신성을 노래합니다. 비록 ’겸손하고 작은 물‘이지만, 그 ‘가없는 온유’는 시인에게 무엇보다 ‘큰 힘’입니다. 시인은 온유를 ‘강’으로 표상하고 있는데, 무릇 강은 흐르고 흘러 뭇 생명을 살리는 바다가 됩니다. 그 무엇과도 다투지 않고 흐르고 흘러 모든 생명에 이로움을 베푸는 강보다 큰 힘을 가진 존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노을이 비치는 저녁 강 같은 온유의 방문을 받는 시인에게 그 ‘겸손하고 작은 물’은 시인을 자기 존재의 원천으로 이끄는 성스런 미사에 다름 아닙니다.
눈 내리는 아침, 그 고요한 풍경을 바라보며 시인이 겨우 토해낸 몇 마디는 이 세간에서 오고 가는 말이 아닌 듯싶습니다. 희디흰 순결과 경이, 침묵과 성스러움을 무량무량 낭비하는 하늘을 보며 텅 빈 내 가슴이 한없이 부요해짐을 느끼고, 마치 우주와 내가 한 몸인 듯 여겨지니 말입니다. ‘흰 옷 입은 하느님’이 누설하는 사랑의 신비가 정말 ‘희고 따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