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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헌국 목사에게 예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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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문 앞 최헌국 목사2-.jpg

쌍용자동차 희생자 분향소가 있던 서울 대한문 앞에 선 최헌국 목사



 밤엔 대리운전하면서도, 당뇨병에 몸이 저려와도, 외로운 형제 자매들 곁으로 오늘도 달려가는 우리들의 목회자.




홀로 어렵게 아들을 키운 어머니가 있었다. 그 어머니는 교회 새벽기도 때마다 울며 기도했다. 공부를 곧잘 했던 아들이 철도고등학교에 합격했는데, 신원보증을 서줄 만한 가족과 친척 하나 없었다. 교회 목사에게도 상담을 했지만, 별수가 없었다. 이 어머니의 울음 섞인 기도를 본 신학대 1학년생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인감도장을 몰래 훔쳐 소년 형제의 신원보증서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그 어머니는 ‘아들이 이제 철도 기관사가 될 수 있게 됐다’며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경찰 5500명이 휩쓸고 지나간 23일 서울 정동 민주노총 건물 앞에서 최헌국(50) 목사는 코레일(한국철도공사)에 의해 최근 ‘직위해제’되고, 쫓기고 있을지도 모를 그때 그 소년과 그 어머니를 생각했다.


 ‘예수살기’ 총무인 최 목사는 그때 대전 침례신학교 1학년이었다. 그에게 ‘현장’은 텔레비전 스크린이나 인터넷에서 흘긋 스쳐 지나치는 ‘먼 산’이 아니라 그 소년과 어머니 같은 형제자매들의 눈물이 어린 곳이다. 민주노총 건물 앞에서 며칠째 노심초사하며 현장을 지킨 것도 그 때문이었다. 5년 전 용산의 불상사가 다른 현장에서 재연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5년 전에도 그는 매일같이 용산 현장을 지켰다. 농성하는 주민들은 “목사님이 함께 있을 때는 경찰들이 잠잠하다가도 목사님이 없으면 난리를 친다”며 든든해했다. 그러나 그는 밤이 되면 현장을 빠져나와야 했다. 서울대에 합격한 딸의 등록금 마련이 여의치 않던 그는 밤이면 남몰래 대리운전 기사를 했다. 참사는 그가 아르바이트를 위해 현장을 빠져나온 뒤에 일어났다. ‘나만 현장에 있었더라도 참사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었을 텐데….’ 그는 가슴을 치며 아파했다.


 그는 19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지킴이가 되어준 목요기도회의 뒤를 잇기 위해 설립된 ‘예수살기’ 초대 총무를 맡아 지난 5년간 170여명의 회원들과 함께 용산과 강정, 밀양, 대한문 등 ‘현장’으로 달려갔다.


 ‘예수살기’ 회원들은 자기 교회의 주일 예배에 참여하면서도 매주 목요일이면 촛불을 켜 들고 현장에 모였다. 건물 없는 ‘촛불교회’였다. 이들은 거대한 기업 혹은 권력에 의해 직장과 삶터를 잃거나 가족을 잃고 하나님마저 원망하던 현장 사람들 곁에 조용히 다가가 함께 울고 기도하고 헌금을 전했다.


 그런 현장 중엔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소속 최종범씨 유족의 농성장과 아무 원군이 없이 홀로 싸우던 서울 북아현동 곱창집 철거민 이선형씨의 1인시위장도 있었다.


서울광장 앞 최헌국 목사4-.jpg

서울광장 앞 최헌국 목사


 이 외로운 현장 사람들에게도 구세주가 온다는 것은 꿈만 같다. 성탄 전야인 24일 밤 보상 문제가 해결된 최종범씨의 딸 별이의 돌잔치를 겸한 촛불기도회에 이어 성탄 다음날인 26일엔 북아현동 이선형씨가 곱창집을 다시 열게 된다. 그들에게 요구조건을 쟁취한 것보다 더 큰 위로를 준 것은 ‘함께하는 사람이 있다’는 희망이었다. 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아 혼자뿐이라는 고립감과 절망감에 빠진 현장 사람들에게 최 목사, 예수살기 회원들과 함께하는 기도회는 “당신 혼자만이 아니다”라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약자들의 십자가를 나눠 지면서 최 목사의 몸은 많이 약해졌다. 최 목사는 용산참사 현장에서 천막도 치지 못한 채 한겨울 비닐만 뒤집어쓰고 18일간 단식 농성을 한 뒤 당뇨병을 얻었다. 지난해 봄 대한문 앞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분향소가 강제 철거당할 때 8일간 단식을 한 뒤부터는 인슐린을 투여해도 혈당량 수치가 160~170을 넘나들고 몸이 저려와 의사로부터 ‘위험’ 경고를 받았다. 그 몸을 하고도 현장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현 정권의 불통과 강경일변도 행동과 피해자들의 희생이 자기 몸보다 더 ‘위험’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애초 침례교회에 다니며 고교 때도 부흥회 찬양 인도를 하던, 전형적인 보수 기독교인이었다. 보수적인 신학교에 입학했으며 사회과학 서적을 읽은 것도 아니었다. 그가 깨어난 것은 성서를 제대로 읽으면서부터였다. 신약을 통해 그가 만난 예수는 자기가 복 받기 위해 비는, 그런 신앙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멀었다. 예수님은 노숙인들이나 잠을 청할 법한 마구간에서 태어났고, 늘 가난한 자, 소외된 자와 같은 약자 편에 섰고, 제자들도 돈이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때부터 그리스도를 신앙한다는 것이 무엇인지가 가슴에 와닿았다. 지상의 모든 부정과 불의를 외면하고 방조하고 동조한 채 한 몸의 내세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이기적 욕망이 아니라, 지상의 반평화적인 불의가 없도록 우리를 내어놓는 것이라는 것을.


 최 목사는 이번에도 성탄절 예수님 오신 뜻을 살리는 기도회를 준비 중이다. 최 목사와 예수살기 회원들은 25일 오후 3시 서울 대한문 앞에서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성탄절 연합예배’를 드린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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