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과 지옥
메테오라의 수도원들은 왜 잘 보이는 곳에 유골을 두었을까. 죽은 수도자들이 외롭지 않도록 배려한 것일까, 아니면 누구나 죽게 되기에, 죽음 이후의 삶을 생각하며 현실적 삶에만 애착하지 말 것을 말해주는 것일까.
*메테오라 수도원의 해골
한국인들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종교성을 지니고서도 죽음에 대해 가장 부정적인 국민이라고 한다. 며칠 후면 죽음에 이를 것이 확실한 말기 암 환자조차 생을 정리하고 다음 생의 여행을 떠날 준비도, 작별인사도 제대로 못한 채 단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한 몸부림을 치다가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를 보고 외국의 한 저명한 신학자는 이렇게 꼬집었다.
“한국인들은 내세가 없는 민족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모든 것이 소멸되고 상실되는 벽과 같은 장애물인가, 아니면 현세의 고통으로부터 구원되어 보다 나은 곳으로 옮겨가는 통로일까.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가설뿐이다. 임사 체험을 했다는 증언들이 적지 않지만 그들의 경험마저도 자기의 기존 믿음에 따르는 경향이 짙다. 크리스천은 천국에 다녀오고, 불자는 극락에 다녀왔다는 식이다. 그래서 그 누구의 경험도 실체적인 사후세계를 다녀왔다는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증거가 로 증명되긴 어렵다.
이처럼 알 수 없는 죽음 이후 세계에 대한 불안이 종교를 가능하게 한다. 전염병이 창궐해 많은 사람이 죽어갈 때 로마에선 가톨릭이 자리 잡았고, 같은 시기 같은 병으로 사람들이 죽어가던 중국에선 현실을 중시했던 유교 대신 현실 도피적 경향이 짙었던 도교와 불교가 큰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내세를 부인한 영국 캠브리지대의 저명한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만약 내세를 위해 현세를 희생한 순교자들을 보았다면 어리석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는 죽음에 대해 이렇게 주장했다.
“천국은 없다. 사후세계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만들어 낸 동화일 뿐이다. 또한 삶의 마지막 순간, 뇌가 깜박거림을 멈추면 그 이후엔 아무것도 없다. 인간의 뇌는 부속품이 고장 나면 작동을 멈추는 컴퓨터다. 고장 난 컴퓨터를 위해 마련된 천국은 없다.”
*"사후세계는 없다"고 주장한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사후세계의 뇌관을 터트린 인물은 그가 처음은 아니다. 1백 년 전 심리학자 프로이트도 이런 말을 남겼다.
“종교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심리학자나 인문학자로부터 ‘종교란 죽음이 두려운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란 주장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뇌 학자들은 임사체험에 대해 ‘자신의 마음이나 뇌에 새겨진 것의 투사일 뿐’이라고 단정한다. 그 일체가 뇌의 작용뿐이라면 스티븐 호킹의 말이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천국이 없고, 죽음 이후 보장된 ‘멋진 사후세계’가 없다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난다면 종교는 역사적 유물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스티븐 호킹의 손을 무조건 들어줄 수는 없다. 그가 물리학자이긴 하지만 사후세계나 천국이 없다는 주장도 과학적 검증을 통한 보고서라기보다는 무신론이란 종교적 신념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를 경험했다는 수백만에 이르는 임사 체험자들과 티베트에서 사후세계를 다녀온 이들을 일컫는 델록의 기록들까지 스티븐 호킹의 주장에 대한 반박 자료들도 무궁무진하다.
사후세계를 갔다느니, 영혼을 보았다느니 하는 것들의 모든 현상이 뇌가 작용을 일으켜 빚어낸 환상인지 아니면 임사체험자들의 증언대로 그런 사후세계가 실재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하늘이 푸르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 온 하늘을 다 다녀봐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매화나무 안에 담긴 생명의 실상, 즉 종자를 찾기 위해 매화나무를 쪼개고 쪼개봐라, 어디에 매화의 생명이 있는가.”
옛 선사들은 매화나무를 다 쪼개 봐도 생명의 실상을 찾을 수 없다고 해서 매화나무 자체의 생명이 없다고 부정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설사 우주를 샅샅이 다 뒤져 자신의 눈에 띄는 신적 존재를 찾을 수 없다고 해서 신을 부인하는 행위도 이렇게 반박할 수 있는 셈이다.
죽음이 알려주는 생의 비밀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다. 예수가 죽게 되었을 때 가장 믿었던 제자들조차 그를 모른다며 부인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를 본 후부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로마 황제들은 원형 경기장의 맹수에게 예수의 제자들을 던짐으로써 그들이 살려달라고 애원할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노래를 부르고 자신을 박해한 자들을 용서하고 웃으며 죽어갔다.
19세기 무렵 우리나라에서도 천주교 4대 박해로 무려 1만~2만 명이 순교를 당했다. 이들은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천국행을 선택했다.
삶 너머의 희망을 전해주는 듯한 수도자들의 해골은 수도원의 분위기를 어둡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어둠마저 밝히고 있다. 해골더미 바로 옆에 예배당과 마당이 있는데, 마당에선 한 수도사가 정원을 손질한다. 목수들은 수도원을 보수하고 있다. 선배 수도사의 해골 곁을 지나는 수도사들은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젊은 날 많은 일을 하셨으니 이젠 쉬면서 후배들이나 지켜보셔도 됩니다.’
허리 구부정한 늙은 수도사도 벗들의 해골을 보며 미소를 머금고 지나간다. 어떤 해골들은 불그스름한 데 비해 어떤 해골들은 하얀 색을 띠고 있다. 이를 보고 수도사들은 농담을 던진다. 어떤 수도사는 적포도주를 즐기더니 아직도 붉게 취해 있고, 어떤 수도사는 백포도주를 즐기더니 유골마저 하얘졌다는 것이다. 해골조차도 여유 있는 유머로 응수하는 것만 같다.
태어난 자는 누구나 한 버은 죽는다. 예외가 없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은 한번만 통과하면 될 공포의 문을 수백 번, 수천 번 통과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를 정말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병과 죽음 그 자체일까, 이에 대한 거부에서 오는 걱정과 불안 때문일까. 이와 관련하여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이 존재하는 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고, 죽음이 존재할 때 우리들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당해 독약을 마시고 죽던 날이다.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온 아내 크산티페가 통곡하고 돌아간 뒤 제자들도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어 고통스럽게 울음을 터트린다. 그러나 얼마든지 벌금을 내거나 망명을 해서 살아날 수 있었는데 죽음을 택한 소크라테스만은 새로운 여행에 들떠 있었다.
“만일 죽음이 무감각 상태로 어지러운 꿈조차 꾸지 않는 잠과 같은 것이라면 죽음은 큰 소득이다. 여러분은 꿈조차 꾸지 않고 숙면의 밤을 보낸 날이 며칠이나 되는가. 그런 밤은 지극히 적다. 단잠을 자게 된다면 얼마나 큰 소득인가. 그게 아니고 만일 죽음이 다른 곳으로의 여행이어서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와 옛 영웅들을 다 만날 수 있다면 나는 몇 번이고 죽고 싶다. 또한 죽어서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좋은 때가 왔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나를 고발하고 사형을 선고한 이들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그들은 내게 해를 끼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1762)
이미 우리의 육신이 죽더라도 영혼은 불생불멸이며, 육신을 떠난 영혼이 가는 곳은 이 세상과 비교도 할수없을만큼 아름답고 밝고 환한 곳이라고 찬미했던 그다.
소크라테스는 독이 든 잔을 태연하게 마시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떠날 때가 되었으니, 이제 각자의 길을 가자. 나는 죽기 위해서, 당신들은 살기 위해서. 어느 편이 더 좋은지는 오직 신만이 알 뿐이다”
<그리스인생학교> (조현 지음, 휴) '5장 하늘 위의 수도원, 메테오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