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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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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늘 위태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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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입은 알뿌리 보듬고 희망 찾아 나설 때

[휴심정]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의 안녕

 

김기석일러스트.png


‘새해’라고 써놓고 오래 들여다본다. 아무리 보아도 설렘이 일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새해 다짐조차 하지 않는다. 일찍이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대로다’라고 노래했다. 만물이 다 지쳐 있다고도 했다. 지난 연말 어디선가 희미하게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여기저기서 ‘안녕하지 못하다’는 응답이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먹고사는 일에 집중하느라 탈주체적 삶을 강요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했던 이들이 마치 겨울잠에서 깨어난 짐승들처럼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고 있다. 이것을 희망의 조짐으로 보아야 할까? 새해에는 이렇게 깨어난 이들이 능동적으로 일어나 역사의 주체가 될까?


민주주의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는 탄식이 어느새 함성이 되고 있다. 정희성 시인의 시구를 떠올린다. ‘풀을 밟아라/ 들녘엔 매 맞은 풀/ 맞을수록 시퍼런/ 봄이 온다’(<답청(踏靑)> 부분). 정진규 시인의 시구도 떠올린다.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여러 해 전 겨울 낯모르는 이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남도의 작은 도시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전도사라고 자기 소개를 했다. 명년 봄에 목사 안수를 받게 되는데 꼭 내가 안수를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좀처럼 그런 청에 응하지 않는 편이지만 그때는 이상하게도 거절하지 못했다. 이듬해 봄이 되어 안수식이 열리는 대구의 한 교회에 가서 그와 처음 대면하게 되었다. 차 한잔을 나누며 그의 목회 이야기를 들었다. 몇해 전 푸른 꿈을 안고 첫 목회지에 부임해 보니 장년 2명에 초등학생 3명뿐이었다. 적잖이 낙심되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정성을 다했다. 가을이 지나고 찬바람이 불 무렵 그는 교회 마당가에 있던 수선화 알뿌리를 캐서 들여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삽으로 알뿌리를 떴다. 그런데 그만 삽날에 알뿌리가 찍히고 말았다. 그가 예상한 것보다 알뿌리가 훨씬 컸던 것이다. 삽날에 찍힌 알뿌리를 손에 든 순간 눈물이 왈칵 났다. 자기 처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꿈을 갖기조차 힘든 곳에서 그래도 뿌리를 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기 때문이다. 상처 입은 알뿌리와 자기를 동일시한 바로 그 순간부터 그는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매 순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경쟁 대신 협동, 독점 대신 돌봄
채움 대신 비움을 선택할 때
희망이 싹튼다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이 깨어나
안녕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게
희망이다

 

곁에서 함께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또다른 후배도 그렁그렁한 눈으로 자기 경험을 들려주었다. 몇해 전 남해의 어느 마을 작은 교회에 부임하게 된 그는 이삿짐을 풀고 사택 옆에 있는 예배당 문을 열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예배당 창을 통해 교회 마루를 환히 비추고 있던 햇살이었다. 아, 그런데 마루에는 하얀 먼지만 소복이 쌓여 있었다. 나중에야 그는 몇명 되지 않는 교인들이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 몇달 동안 이웃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암담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어느 날 교회 주변을 둘러보다가 예배당 뒤편 흙 둔덕에 하얀 뿌리를 드러내고 있는 키 작은 소나무 한 그루를 보았다. 보았다기보다는 만났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바람을 타고 날아온 소나무 씨앗은 생명의 본성대로 떨어진 그 자리에서 싹을 틔웠지만 흙이 얼고 녹기를 반복하면서 그만 뿌리가 드러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어린 소나무는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는 자기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대나무 한 대를 잘라다가 소나무 주변에 울타리를 만들고는 흙으로 뿌리를 정성스럽게 감싸주었다. 그리고 그 소나무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아슬아슬한 희망’. 어쩌면 나는 그들의 증언을 듣기 위해 그 자리에 간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망은 그렇게 늘 위태롭다. 희(希) 자는 ‘바라다’라는 뜻도 있지만 ‘성기다’ ‘드물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희망이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이다. 희망은 낙관적 전망이 아니라, 기어코 살아내기 위한 안간힘이다. 상처를 빛나는 흔적으로 만들고, 연약한 것을 보듬어 안고, 뿌리가 드러난 것을 북돋는 이들이야말로 희망의 전사라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질서가 마치 유일신인 양 세상을 지배하는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욕망의 장터를 질주한다. 경쟁과 효율과 속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안녕하지 못하다. 사람들은 옆 사람을 팔꿈치로 밀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성공의 사다리 윗단을 차지하기 위해 윗단에 서 있는 사람을 끌어내리고 밑에서 올라오는 사람을 짓밟기도 한다. 유동하는 공포가 우리를 확고히 사로잡고 있다고 말했던 지그문트 바우만이나, 현실을 ‘실재의 사막’이라 칭하는 슬라보이 지제크, 우리 현실을 ‘피로사회’라는 말로 요약한 한병철은 사실 같은 상황을 달리 설명하고 있다.
자본은 끝없이 욕망을 확대재생산함으로 사람들을 확고히 자신의 신민으로 잡아두려 한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편리하게 살기 위해 사람들은 기꺼이 오늘을 저당잡힌다. ‘더’의 주술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진정한 행복은 찾아오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중독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다른 삶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는 백향목이 되기를 꿈꾸고 또한 그들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에게 겨자풀들이 연대하여 이루는 하나님 나라의 꿈을 보여주었다.

  
혼자서는 비바람을 견딜 수 없지만, 어깨를 겯고 함께 선다면 능히 견딜 수 있다. 행복의 신기루를 향해 내달리던 발걸음을 멈추고, 이웃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몸을 낮출 때, 알 수 없는 힘이 우리 속에 유입된다. 신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가장 연약한 이들 속에 숨겨두셨다. 경쟁 대신 협동을, 지배 대신 섬김을, 독점 대신 돌봄을, 채움 대신 비움을 능동적으로 선택할 때 희망이 싹틀 수 있다.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이 깨어나 안녕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게 희망이다.


김기석 청파감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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