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표와 물음표로 오는 봄
법인 스님 (대한불교조계종 교육부장)
어느덧 수도승 생활 3년 5개월을 맞습니다. 며칠 전 땅끝마을 대흥사의 사형 보선스님으로부터 몇 장의 사진을 받았습니다. 솔바람소리 대신 매연에 뒤섞인 소음을 감당하며 콘크리트 빌딩 숲에 갇혀 사는 서울의 수도승 신세가 좀 안 되어 보였던 것 같습니다. 스마트폰에 실려 온 붉은 동백꽃은 원색적인 빛깔에 절제와 품격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도발적인 유혹을 내뿜고 있었습니다. 꽃을 보내는 이의 멋이 화면에 가득 담겨있었습니다.
바야흐로 지금 이 나라 산과 들판, 강물은 짙푸르고 화려합니다.
그렇습니다. 유구한 세월 속에 초가집이 빌딩으로 바뀌고 흙길이 아스팔트로 바뀔지라도 변함없이 봄은 신록과 꽃의 설렘으로 다시 옵니다. 오늘도 출근하는 길목에서 화려하게 흠뻑 피어난 벚꽃에 취하여 고개를 올려 한참을 감상하였습니다. 그 꽃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왜 그렇게 별세계인지요.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손바닥 안에 무한을 거머쥐고 순간 속에 영원을 붙잡는다.” 벚꽃 사이로 하늘을 보며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읊조려 봅니다. 그리고 나는 한송이 꽃에서 무수한, 무한한 관계 맺음을 봅니다. 흙과 물과 바람과 하늘이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기꺼이 자기의 전부를 내주었기 때문에 내가 오늘 한 그루 벚꽃에 취하는 복을 누립니다. 그리고 김춘수 시인의 말대로 그렇게 탄생한 꽃들은 내가 눈길 주고 마음 주고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내 안의 꽃이 됩니다. 이렇게 우리네 봄소식은 눈길과 마음의 관계 맺음으로 옵니다.
더없이 아늑한 이 봄날, 봄은 우리 가슴에 느낌표로 옵니다. 바쁘고 지친 삶터에서 초록 풀빛과 형형색색의 꽃을 보며 감상에 젖고 시와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우리네 가슴이 살아 있는 증거가 아닐 른지요? 평소 시와 대중가요 노랫말을 좋아하는 나는 올해 계사년 봄날의 한복판에서 저절로 흥얼거립니다. “연분홍 치마가 바람결에 휘날리더라”’ 이 노래를 흥얼거리면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가 이영애에게 “너, 어떻게 사랑이 변할 수 있니?”라는 대사도 떠오릅니다. “동백꽃잎에 새겨진 사연, 말 못할 그 사연을 가슴에 안고……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라고 노래하는 이미자의 음색에서 순정하고 애절한 사랑의 마음도 읽습니다.
또 제법 의미심장한 선시 한 수는 어떤가요.
진종일 봄을 찾았건만 봄은 없었네
산으로 들로 짚신이 다 닳도록 헤매었네
지쳐서 돌아오는 길, 뜨락의 매화 향기에 미소 짓나니
봄은 여기 매화 가지에 활짝 피었네
봄은 달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잎 돋고 꽃 피는 만물의 생동과 개화에 있듯이, 우리네 삶의 행복도 숫자의 성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하고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마음에 있지 않을 른지요?
또 봄은 느낌과 더불어 흥겨운 풍류로도 오는 것 같습니다.
淸明時節雨紛紛 청명시절우분분 청명이라, 봄비가 하염없이 내리는구나
路上行人欲斷魂 노상행인욕단혼 길 가는 나그네의 마음은 갈피를 잡기 어려워라
借問酒家何處有 차문주가하처유 주막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니
牧童遙指杏花村 목동요지행화촌 목동은 저만치 살구꽃 핀 마을을 가리키네
당나라 두목의 시입니다. 살아가는 일이 뭐 별거인가요? 다름 아닌 멋스러움이 아닐 런지요. 차가운 지성도 필요하지만 더불어 풋풋한 감성도 동행해야 하지요. 지성과 감성이 동행하면서 멋스러운 풍류를 연주하면 이 봄날이 더없이 풍성하겠습니다. 하여, 아무리 바쁘더라도 이 봄날에는 혼자서 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맛스럽고 멋스러운 풍류를 즐겨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설렘과 환희로 오는 봄을 설렘과 환희로 맞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이 온 것 같지 않기도 합니다. 이 말을 여러 결로 해석이 가능하겠지요. 오로지 성공과 출세에 집착하여 꽃에 눈길 주지 못하고 물소리에 귀를 열어 놓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봄이 와도 봄이 아니겠지요.
그러나 봄날 아지랑이에, 그 아지랑이 사이에 피어있는 작은 풀꽃에 눈물짓고 비통하는 사람들에게 이 봄은 어떻게 오는 것인지요? 직장을 찾지 못하는 젊은이들, 입시에 내몰린 어린 학생들, 생존의 경쟁에 내몰린 사람들, 고용이 불안한 사람들, 우울증에 갇혀 삶의 활기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 거리의 노숙인들……. 이들에게 정녕 봄날의 꽃은 어떤 빛깔로, 어떤 느낌으로 오는 것일까요?
이렇게 봄은, 우리에게 느낌표와 함께 물음표로 옵니다. 왜 이렇게 모두가 저마다의 가슴으로 봄을 환희롭게 맞이하지 못하는가? 봄날의 물음표 앞에서 다시 옛 시 한 수를 올려야겠습니다.
昨日到城郭 작일도성곽 어제 성안에 갔다가
歸來漏滿巾 귀래누만건 돌아오는 길에 눈물 흠뻑 흘렸지
遍身綺羅者 편신기라자 온몸에 비단 옷을 걸치고 있는 사람들
不是養蠶人 불시양잠인 누에치는 사람은 아니었지
중국 시선 『고문진보』에 실려 있는 작자 미상의 시입니다. 저는 생활이 사치스러워지면 스스로 이 시를 채찍 삼습니다. 작자는 필시 길쌈을 하는 힘없고 차별 받는 서러운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오늘 나는,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농성장마저 빼앗긴 쌍용차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그들을 생각하니 이 봄이 한없이 어지럽습니다. 22명의 목숨이 죽어나가는데도 이를 해결하려고 노력도 하지 않는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참 원망스럽습니다. 그리고 방관자인 내 자신의 무기력도 원망스럽습니다. 생계를 잃어 버린 절박한 가족들, 아버지와 지아비를 잃어 버린 아들과 딸과 아내의 눈에 들어온 덕수궁의 봄볕과 꽃들은 어떤 봄볕이고 꽃들일까요?
이 봄날에 묻고 또 묻습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으뜸으로 소중한 것인지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서로가 존엄한 존재로 살아가는 길인지를. 그 답은 매우 간명할 터인데도 왜 정직하게 성찰하지 못하고 모두가 사는 답을 내놓지 못하는 것인지요?
앞에서 한 그루 나무에 벚꽃이 개화하는 일은 흙과 물과 바람과 하늘이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자기를 기꺼이 내놓아 서로가 관계 맺을 때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사람 사는 일도 이와 같아야 함은 지극히 분명한 이치가 아닙니까? 지금 덕수궁 돌담과 뜨락에 피어있는 꽃들이 우리 인간들을 어떠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까요? 저 꽃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아! 박원순 서울 시장이 페이스북에 쌍용차 농성장 철거에 대한 안타까움을 올렸네요.
“집 앞 목련이 살포시 제 얼굴을 드러내고 웃던 그저께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봄이 성큼 다가왔다는데, 어제 오늘 내내 제 마음은 다시 겨울로 되돌아간 듯 했다” “삶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이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다” “이미 22명이라는 소중한 생명이 우리 곁을 떠났다. 더 이상의 비극은 없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우리 사회가 그들의 절규에 귀 기울여야 한다”
봄이 와도 봄을 느낄 수 없는 이웃에 대한 연민이 그대로 전해옵니다. 자연의 봄은 왔어도 삶의 현실은 겨울을 살고 있는 사람을 생각합니다.
박원순 시장은 이렇게 봄에 묻습니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겨울은 언제 끝나는 것일까” 그리고 물음표와 함께 마침표를 우리에게 던집니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눈물이 마르지 않은 그곳에 꽃이 피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에겐 사람이 꽃보다 더 아름다워야 하지 않을까. 상념이 깊은 밤”
4월 우리 모두 생각합니다. 꽃을 보는 마음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꽃을 보고 마음이 설레고 가슴이 뛰는 것은 모두가 누려야할 행복입니다. 그러나 꽃에 집중하는 마음으로 사람에게 눈길 주는 마음은 더 소중하겠습니다. 꽃을 보고 설렘에 젖는 일과 더불어 사람에게, 지금도 겨울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 주고 눈길 주고 같이 아파하는 일은 더없이 중요한 일이겠습니다.
그리하면 우리 모두는 ‘꽃 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되겠습니다. 이 봄에 사람꽃이 곳곳에서 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라는 이상화 시인의 절규가 우리시대에 되살아나지 않기를 빌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