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복’은
[종교의 창] 오강남 교수의 아하!
2014년이 되었다. 설을 보내며 서로 주고받는 덕담 중 단연 1위를 차지하는 것이 “복 많이 받으세요”일 것이다. 요즘은 더욱 구체적으로 “돈 많이 버세요” “대박 나세요”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홍콩에서 설 인사는 ‘쿵하이팟초이’(恭賀發財)다. 새해에 재산이 불 일듯 불어나라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복 받는 일’이 결국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짐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런데 ‘복’이라는 것이 이런 경제적 풍요로움만을 의미할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라고 했다. 부에 대한 집착을 끊고 자유로워진 삶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에서 사는 복된 삶이라는 뜻이 아닐까? 유교에서도 소인배는 이(利)를 탐하지만, 군자는 의(義)를 위해 사는데, 이렇게 의롭게 살다가 어쩔 수 없이 가난해지는 경우 이를 청빈(淸貧)이라 하여 오히려 자랑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종교사를 통해서 볼 때 여러 종교에서는 재물을 탐하지 않는 것뿐 아니라 이른바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는 것을 종교적 삶의 이상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부처님이나 성 프란체스코가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예수님도 재산이 많은 어느 부자 젊은이에게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라고 충고한 것을 보면 자발적 가난을 선호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시대가 바뀐 탓인가. 요즘 우리 주위에서는 종교적 목표가 오히려 ‘잘살아 보자’라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믿으면 경제적으로 남 보란 듯 잘살 수 있으니 잘 믿으라는 것이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한 예수님이나 욕심을 성냄, 어리석음과 함께 삼독(三毒)이라 가르친 부처님은 실수한 셈이다.
그러나 종교를 이런 기복(祈福) 일변도로 받아들일 때 우리도 모르게 빠져들 수 있는 몇 가지 위험이 있다. 첫째, 우리가 가진 신앙은 나의 경제적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하느님이든 부처님이든 결국은 카드 넣고 단추 몇 개만 누르면 곧바로 현금을 내주는 현금인출기로 둔갑하게 된다. 둘째, 가난은 믿음이 부족한 결과, 따라서 가난하면 불편함뿐 아니라 이제 죄책감까지 감내하게 되었다. 셋째, 가장 큰 문제는 철저히 천박한 자본주의적 재테크에 따라 땅 투기나 기타 수단을 동원해서 일단 부를 얻게 되면 그것을 신이 내린 축복이라 여기고, 부를 모으면서 사용했을지도 모르는 여러 가지 부정한 수단까지 정당화된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무서운 일 아닌가.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라고 한 바울, “족할 줄 아는 데서 얻는 만족(知足之足)이 영원한 만족”이라고 한 노자처럼, 느긋한 마음으로 살 줄 아는 것, 이것이 종교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청복(淸福)이 아닐까?
오강남 ‘종교너머, 아하!’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