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랑!
심리학자 에릭 프럼은 우리들이 '사랑'을 이야기하면 거의가 사랑'하기'보다 사랑'받기'를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했다.
얼마 전 달라이 라마가 쓴 <Beyond Religion>을 읽었다. 이 책은 한국 김영사에서 <<종교를 넘어>>라는 제목으로 지난 3월 번역되어 나왔고, 나도 불교신문의 요청으로 서평을 쓴 적이 있다. 밴쿠버에 와서 영어본으로 한 번 읽고 싶어서 사서 읽었다.
제 4장은 ‘Compassion, the Foundation of Well-Being’. 한국어 판에는 ‘자비, 행복을 만들다’로 번역되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자비, 웰빙의 기초’다.
물론 compassion을 한국어로 옮길 때는 보통 '자비'라 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 달라이 라마가 종교적 가르침에 입각한 종교적 윤리가 아니라 인지과학이나 인간 본성에 대한 관찰에 기초한 ‘세속적’ 윤리를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여기서는 일단 종교적 색채가 짙은 ‘자비’보다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많이 쓰는 ‘사랑’이라고 옮겨본다.
이 장 서두에서 우리 인간은 모두 다른 사람들의 사랑과 온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한다. 우리가 태어났을 어머니의 사랑과 보살핌에 의존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어릴 때, 그리고 자라나서도 이렇게 사랑과 온정을 받아야 정신적 육체적 안녕 (well-being)이 가능해진다고 운을 때고 나서, 더욱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은 사랑이나 온정을 남에게서 받을 때보다 남에게 줄 때 더 큰 유익이 있다는 사실에 방점을 찍고 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Loving is of even more importance than being loved.”라고.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그 첫째 수혜자는 언제나 나 자신일 수밖에 없다. The first beneficiary of compassion is always oneself."고 한다.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우리의 사랑이 우리가 사랑을 주는 그 사람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면 그 사랑은 언제나 깨어져버릴 위험을 지닌 fragile한 것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기대에 부응하면 모든 것이 문제없지만, 일단 기대에 못 미치면 우리의 사랑의 감정은 쉽게 서운함으로, 심지어 증오로 바뀔 수 있다.” 섭섭하다느니, 배은망덕이니, 어찌 그럴 수 있느냐,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느니 하는 말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식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에 대해 원한과 증오와 적대감으로 가득하면 나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영적으로 건강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라 한다. 따라서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도 ‘진정으로 무조건적이고 편향되지 않은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한다. “Since resentment, anger, and animosity bring us no benefit, it is clearly in our own interest to underpin our attitude to others with this kind of genuine unconditional and unbiased compassion.”
반면에 어머니가 자녀에게 보여주는 본능적 사랑과 달리, 한 차원 높은 사랑, 의식적으로 사랑하겠다는 의지로 훈련된 결과 이루어진 사랑, 이른바 “확대되고 보편적인 사랑(extended, universal compassion)은 나 자신을 고려한다는 요인에 뿌리박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나와 똑 같이 행복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인간들이라는 단순한 사실에 뿌리 내리고 있다. 이런 종류의 사랑, 다른 사람을 위한 우리의 따뜻한 관심은 완전히 안정적인 것이어서 다른 사람이 우리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하는 것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 나를 위협하고 말로 학대할지라도 그들에 대한 나의 사랑, 그들의 안녕에 대한 나의 관심은 흔들리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은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고 했다. 기원전 4세기 중국에 살았던 묵자의 겸애설(兼愛說)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사랑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종교와 상관없이, "종교를 넘어"가능하고, 그럴 때 사랑이 참된 사랑이 된다고 했다.
오늘처럼 각박한 세상에 이런 사랑이 실로 가능할까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각박하니까 더욱 그리워지는지도 모르겠다. 심각하게 생각해볼 문제임에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