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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죽인 원수 용서한 서광선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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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84%9C%EA%B4%91%EC%84%A04-.jpg» 전쟁을 통한 개인적 아픔을 ‘눈에는 눈’식의 증오로 되갚기보다는 다시는 같은 아픔이 되풀이되지않는 세상을 열기 위해 앞장서온 서광선 목사


서광선(83) 목사만큼 ‘공산당이 싫다’고 절절히 외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공산당을 반대한 그의 부친 서용문(1905~1950) 목사는 6·25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인민군에 끌려갔다. 4개월 만에 이승만과 맥아더가 평양에 입성하자 교인들이 대동강변 갈대밭에서 아버지의 주검을 찾아냈다. 다섯명이 굴비처럼 함께 묶여 있었기에 주검이 갈대밭에 걸려 바다로 쓸려 내려가지 않았다. 아버지의 얼굴을 비롯한 온몸에 따발총 자국이 선명했다. 서 목사는 아버지의 기막힌 일생 때문에 더욱 서러웠다.


 그의 할아버지는 조선조 말 무과에 급제해 함흥을 지키던 장군이었다. 장군은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의병을 결성해 저항하다 순국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나라 잃은 노예로 사느니 죽는 게 낫다’며 자식에게 차례로 극약을 먹이고 자신도 자결했다. 그러나 5남매 중 막내에겐 차마 약을 먹이지 못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이 아이를 거둬 자강도 강계에 시집가 살던 장군의 여동생에게 보냈다. 그 두살배기가 서 목사의 선친 서용문이었다.


서용문은 한 여자 전도사의 손에 이끌려 미션스쿨인 영실학교를 거쳐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해 목사가 되었다. 예수교장로회의 근본주의적 신학을 지향하는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한 서용문은 평북과 간도 일대에서 수많은 교회를 개척했다. 1937년 일제의 신사 참배를 거부해 경찰서에 붙들려가 모진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그런 어려운 전도생활 중 아내(서광선의 어머니)는 32살의 나이로 병이 들어 사망했다. 그런데 해방된 조국에서 동족에 의해 처참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당시 19살 청년인 서 목사는 부친의 처참한 주검을 부여잡고 “이 철천지원수를 기어코 갚고야 말겠다”며 울부짖었다. 그가 비슷한 피해를 입은 ‘한국전쟁 월남인’들처럼 남에서 빨갱이 사냥과 종북론의 선봉장이 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삶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는 유신에 반대하며 민주화운동에 나섰고, 통일운동에 앞장섰다. 그것도 조용히 뒤에서. 그는 최근에도 씨알재단과 와이엠시에이(YMCA)의 초청으로 민주주의와 통일의 길 등을 강연했다.


 세계적인 엔지오(NGO)인 와이엠시에이 세계회장을 지낸 거물이면서도 한차례도 언론 인터뷰를 하지 않을 만큼 얼굴이 알려지는 걸 꺼리는 그를 20일 만났다. 서울 신촌 봉원사길에 위치한 4~5평 남짓한 그의 서재 공간에서였다. 그의 부인 함선영 전 이화여대 교수도 동색이어서 이날 아침까지도 “평생 안 만나던 기자를 만나려고 하느냐”며 구박을 했단다. 지금도 테니스와 스키, 스케이트를 즐기는 서 목사는 나이가 믿기지 않아 보인다. 아마 육체적인 젊음보다도 어느 누구와도 어울릴 만한 ‘케미’(화학 반응을 의미하는 ‘케미스트리’의 줄임말인 신조어)가 느껴진 때문일 것이다. 일문일답이다.


 -테니스를 누구와 치는가?

 “일산의 아파트에 사는데 노인들과 주로 친다. 운동과 친교를 함께 하니 재밌다. 테니스장에서 어울리는 노인들 90%가 ‘꼴보수’다. ‘김대중’은 무조건 ‘빨갱이’라고 하고, 테니스공을 ‘노무현 대가리’라며 날린다. <한겨레>를 본다고 하면 ‘그것도 신문이냐. 북한 삐라지’라고 한다.”


 -어울리는 게 힘들지 않은가?

 “학교에만 있을 때는 모르던 세상을 배운다. 한두 명이 강력히 선동하면 너도나도 그래야 하는 줄 알고 따라간다. 그런 동네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생존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 분들 얘기도 경청하고, 눈치 볼 것 없이 내 의견도 말한다. 그래도 교수라서 그런지 막 대하지 않고 들어주는 편이다.”


 -살아오면서 삶의 화두가 있었는가?

 “6·25가 발발돼 아버지가 인민군에 끌려간 뒤 마루 밑에 굴을 파고 숨어 있던 중 잡혀 인민군 징집 신체검사장에 끌려갔다. 그런데 군의관이 멀쩡한 나를 보고 ‘너 아프지?’라며 불합격 도장을 찍어줬다. 나올 때 누군가 불러 돌아보니 바로 밑에 남동생이었다. 동생은 검사장으로 들어가고 나는 나왔다. 그것이 우리가 본 마지막이었다. 그때 징집되면 대부분 낙동강에서 죽었다. 이후 부산으로 피난 내려가 국군 해군소년통신병으로 지원해 근무하다가 1953년 휴전 뒤 미국에 있는 해군종합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때 함께 훈련받던 미군이 2년 뒤 대학 입학허가서와 재정보증서를 보내와 미국 유학길을 열어줬다. 중학교 중퇴 학력이 전부인 그 미군은 한국 서해 작전 중 전사해 만나지 못했다. 왜 인민군 군의관은 나를 살려주고, 미군은 그렇게 도와줬을까. 평생 그 질문이 따라다녔다.”


 -근본주의 목사의 아들로 자랐고, 인민군에 의해 순교한 이의 자식이 어떻게 배타와 증오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나?

 “그래서 아버지를 잘 아는 분들로부터 배신자라는 소리도 듣는다. 뉴욕 유니언 신학대의 경험이 컸다. 당시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민권운동에 유니언 신학대생들이 대거 참여했다. 백인 학생들과 흑인 교회에 가 함께 봉사하면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것은 상대를 죽이는 게 아니라, 이처럼 다양성을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고 평화로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좀더 자유로운 사고를 하는 학풍과 공부를 통해 예수의 정신인 사랑과 정의를 이 세상에 구현하기 위해선 ‘내 (개인적) 역사의 감옥’으로부터 나와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제 용서에 어려움은 없었나.

 “WCC(세계교회협의회)의 주도로 1986년 제네바에서 남북한과 독일 미국 러시아 교회지도자들이 함께 제네바에서 회의를 했다. 그 때 김일성의 스승이자 외당숙벌인 강양욱 목사의 아들인 강영섭 목사가 왔다. 그런데 강영섭 목사가 내게 통역을 해달라고 했다. 그 때는 시절이니 시절이니만큼 이적행위로 귀국하자마자 잡혀갈 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아버지를 죽인 자들의 편에 선 강양욱 목사의 아들이 아닌가. 그들과 한테이블에 앉는다는 것 자체도 아버지에게 미안했다. 그날 밤을 새워 기도했다. 기도를 통해 아버지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다음날 강영섭의 통역을 해줬다. 훗날 정보기관의 주요간부를 만났더니 그런 내용을 알고 있었다. 10년 전 아시아기독교 고등교육재단 부총재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해 봉수교회에 가서 인사말을 했다. ‘모란봉도 그대로 있고, 대동강물도 그대로인데, 사람만이 변했다’는 말에 봉수교회 신도들이 많이 울었다.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 위로 눈물이 쏟아졌다. 인간들 마음은 서로 통하는 것이 아닌가.”


 -세대가 바뀌어도 이데올로기적 증오가 달라지지 않는 것을 어떻게 보는가?

 “적대적 공생 관계 때문이다. 원수가 있어야 내 정체성이 가능해지는 게 정치심리학이다. 남북이 엄청난 격차가 있기에 진정한 자신감이 있다면 종북이나 좌빨이라는 허수아비를 갖고 놀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 교회도 진짜 그리스도교라면 이 문제와 정면으로 씨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원수를 사랑한다’면서도 설교에서 종북, 좌파를 거론하며 적대감을 부추기는 현실 말이다. 


 -왜 세상이 달라지지않는가.

 “며칠전 와이엠시에이에서 고등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는데 한 한생이 ‘왜 통일이 안되느냐’고 묻는데, 답변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강의 뒤 나오는데 아이들이 ‘우리가 할테니 할아버지 걱정마시라’고 했다. 구약을 보면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해 광야에서 40년이나 고생했지만 하나님은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치않았다. 그를 죽이고 가나안에서 새로운 세상은 새로운 세대인 여호수아에게 맡겼다. 옛세대가 가고, 자신의 과오를 다음세대까지 전가하지 말아야한다. 그런데 함께 사는 초등학교 4학년, 2학년인 내 손주들도 ‘빨갱이와 일본놈들은 다 싸 죽여야 돼’라고 했다. 그들도 쳐죽여야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할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도록 납득하는데 2년이 걸렸다. 60~70년대식 반공교육이 달라지지않고 있다. 노인세대는 비록 동족을 죽이고 죽는 세월을 살았지만 우리의 자식 손주들은 다른 세상을 열어가도록 해줘야한다.”


 -다시 ‘유신’으로 회귀했다는 이야기가 많다.

 “6·25 이후엔 ‘일제시대가 좋았다’고 하고, 최근 ‘유신시대가 좋았다’는 말도 들었다. 배부른 소리다. 나는 되풀이된다는 역사관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역사 이해는 처음과 끝이 분명하다. 토인비가 말한 도전과 응전, 헤겔이 말한 정반합처럼 3박자 왈츠 식으로 들쭉날쭉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패배주의·허무주의 역사관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때보다 더 좋은 세상을 우리가 만들어가야 한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서광선 목사는


1931년 평북 강계 출생. 미국 로키마운틴대학과 일리노이주립대학교에서 철학, 뉴욕 유니언 신학대학원과 밴더빌트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 1964~96년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 1973년 박정희 유신 정권 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주최로 천관우, 이문영, 이태영, 안병무, 김재준, 한승헌 등과 인권선언문 발표. 김재준, 안병무, 서남동, 문익환, 박형규, 강원룡 등과 동인지 <제3일> 발간 및 독서회(민중신학의 모태) 모임. 1980년 신군부에 의해 해직. 서울 압구정동 현대교회에서 4년간 목사로 시무. 민중신학회 안병무 박사에 이어 2대 회장. 1988년 ‘88통일 선언’ 9인위원으로 참여. 1994~98년 세계 와이엠시에이 회장. 박형규, 오재식에 이어 남북평화재단 3대 이사장. 현재 이화여대와 홍콩중문대학 명예교수 및 고양평화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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