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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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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을 선택할까, 사랑을 선택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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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이 이기는가? 사랑이 이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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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발심 행자님!
매서운 바람이 산중을 휘감고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로 한겨울에도 따뜻한 날씨가 찾아오지만 그래도 눈보라와 함께 오는 추위는 여전합니다. 강한 냉기가 감돌아도 사시사철 산중에 사는 묘미는 늘 변화가 무궁합니다. 하얀 눈 속에 함초롬히 피어 있는 차꽃에서 인동초의 지조와 인고의 향기가 느껴집니다. 차웁고 투명한 밤하늘에 오롯하고 고아하게 떠 있는 달 위로 흰구름 유유히 흘러가는 모양을 바라보면서 새삼 무애와 소요의 경지를 느낍니다. 어젯밤은 무수한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또렷했습니다.

 

이 한겨울 산중에 사는 수행자의 정신을 깨우는 큰 죽비는 단연 황벽선사의 선시이겠지요. '뼛속까지 사무치는 추위를 견디지 않고서 어찌 코끝을 찌르는 매화향기 얻을 수 있으랴'. 그렇지요. 오랜 세월 미망과 집착에 뒤엉킨 번뇌를 벗어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터이니 수행자는 늘 자신을 담금질하고 새롭게 태어나는 정진에 게으름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거듭나고 새롭게 나기 위해서는 온전히 그 무엇에 자신을 던져야 합니다. 자신을 그 무엇에 던지고자 하는 사람은 크나큰 침묵에 들어야 하고, 그 침묵 속에서 용광로처럼 타오르며 자신을 탐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줌의 재마저 남기지 않고 자신을 태워야 합니다. 크게 버리고, 크게 던지고, 크게 비운 자리에서 비로소 은은한 향기와 신령한 울림이 있을 것입니다.

또 이런 옛 시는 우리의 정신을 어떻게 세우는가요? "눈 덮인 밤길을 갈 때는 어지러이 걷지 말라. 오늘 내가 걷는 이 길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나는 이 시를 대할 때 세 가지 다짐을 합니다. 내 삶을 함부로 헛되이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더불어 사는 사람 속에서 신중하게 처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수행자로서 주어진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역대 사람들의 행적을 살펴서 비판하고 흠모하면서 지금의 이 길을 가고 있듯이 후대의 사람들도 나의 삶을 엄정하게 살필 것입니다. 특히 수행자의 마음 씀과 언행 하나하나는 때로는 이웃에게 희망을, 때로는 실망을 주기 때문에 늘 조심에 조심을 더해야 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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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발심 행자님!
이런 말 자주 들어 보지 않았는지요?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참된 삶인가? 쉽게 물을 수 있지만 답은 영원한 미궁일 수 있습니다. 하나로 물을 수 있지만 답은 여러 개일 수 있는 화두입니다. 이 물음은 동서고금 모든 사람의 철학이며 종교입니다.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싯다르타는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했으며 행자님과 저도 싯다르타의 삶을 이정표로 출가수행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럼,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출가 수행하여 깨달음을 이루고 뒷사람에게 길을 안내한 석가모니 부처님은 어떤 답을 우리에게 주었을까요? 답은 분명합니다. 왜 사느냐, 무엇을 위해 사느냐의 답은 이렇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생로병사에서 비롯된 불안과 슬픔을 해결하기 위하여 출가했으며, 그 해결이 바로 해탈과 열반의 성취입니다. 해탈과 열반의 세계는 모든 고통과 억압이 사라지고 자유롭고 평화로우며, 깊고 고요하고 생기 넘치며, 투명하고 안온하며, 비어 있으면서도 충만합니다. 또 해탈과 열반을 성취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모든 욕탐을 떠났으면서도 우정과 사랑을 나누며 기쁨의 빛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을 극락정토라고 이름하며 희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해탈 열반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걸어야 할 길 또한 분명합니다. 나와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고 어떻게 운행 되는지, 존재의 법칙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존재의 법칙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존재의 법칙을 탐구하는 일이 철학이며 법칙에 부합하여 실천하는 일이 수행입니다. 이 대목에서 불교의 수행체계와 결합시켜 보기로 하지요. 신해행증(信解行證)! 익숙하게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믿음과 이해, 실천과 증험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해탈 열반의 세계, 현세정토의 세계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심을 세워야 할 부분은 바로 이해와 실천입니다. 이해는 존재의 법칙을 아는 철학(解)과 실천인 수행(行)에 해당할 것입니다. 존재의 법칙을 투철하게 한 점 의심 없이 알았다면 우리는 이를 인생의 이정표로 확신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존재의 법칙대로 살아가면 인생의 소중한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는 신념(信)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불교의 믿음은 성자가 말했다고 무조건 받아들이는 믿음이 아닙니다. 의심하고 거듭 묻고 보편적 이치에 합당하면 그것을 진리로 승인하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존재의 법칙대로 살아가면서 존재의 법칙을 체험(證) 합니다. 우리에게 철학과 수행이 얼마나 소중하고 절실한 것인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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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발심 행자님!
다시 정리해 보기로 할까요? 그러면 존재의 법칙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무엇을 이름 하여 존재의 법칙이라고 할까요? 경전에서는 연기, 공, 중도, 사성제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존재의 법칙을 의심 없이 이해하고 모든 의혹이 사라지고 번뇌와 불안이 사라진 경지를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또한 존재의 법칙을 이해하는 능력을 '지혜'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존재의 법칙을 깨닫기 위해서 노력하는 실천행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팔정도, 사무량심, 사섭법, 육바라밀 등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실천행은 두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존재의 법칙을 의심 없이 이해하고 자기화하기 위하여 실천해야 하는 것과, 깨달은 이후에도 그대로 삶의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즉 팔정도와 육바라밀 등을 실천하여 깨달음을 이루고, 깨달음을 이룬 뒤에도 수행자는 '특별한 모습'이 아닌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으로 여여하게 삶을 장엄해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행자님!
보살수행자가 온갖 방편실천행으로 존재의 법칙을 깨닫기 위해서 갖춰야 할 엄숙한 마음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비심입니다. 수행은 지혜와 자비심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자비는 수행과 다른 이름의 같은 실천입니다. 그 자비심은 모든 이웃에 대한 연민입니다. 연민은 이웃의 슬픔과 아픔에 내 가슴이 절로 슬프고 아픈 마음입니다. 어떤 이해관계와 보상에 관계없는 마음이지요.

얼핏 생각하면 깨달음과 자비심은 늘 동시에 늘 한 곳에서 동행하기 어렵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흔히들 깨달음은 자기 자신의 영역이고 냉철한 이성의 영역이며 최우선적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비는 이웃에 대한 영역이고 감성의 영역이며 자기 완성이후에 인연 따라 행하는 부수적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깨달음과 실천, 지혜와 자비의 이항을 양립하여 말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늘 어색한 동행을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보살수행의 길을 가고 있는 행자님!

그러나 자비와 지혜, 혹은 깨달음과 사랑은 선후나 우열로 나뉠 수가 없는 가치입니다. 이는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발생하므로 저것이 발생한다'는 연기의 법칙에서도, 연기의 법칙이 지향하고 있는 분별과 대립, 차별의 해체에서도 지혜와 자비의 선후적 우열적 나뉨은 허망한 분별입니다. 마치 평화 없이 자유가 있을 수 없고 자유 없이 평화로울 수 없으며, 존중 없이 평등이 있을 수 없고 평등 없이 상생이 있을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자유와 평화, 존중과 평등과 상생이 다른 몸의 한 몸인 이치와 같이, 지혜와 자비는 그렇게 수행의 길에서 수레의 두 바퀴이며 새의 양 날개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자비를 동정과 시혜의 영역으로 한정하고 '발심'의 차원으로는 깊이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하는 데 있지 않을 런지요? 발심은 바로 무엇을 해결하겠다는 문제의식입니다. '하늘 위 하늘 아래 내 홀로 존귀하다. 삼계의 모든 중생들이 고통에 덮여 있으니 내가 이들을 구제하리라"싯다르타의 탄생 선언을 깊이 음미해 보면 중생의 고통에 대한 연민에서 구도가 시작됩니다. 또 싯다르타는 태자 시절에 궁전에서 귀족과 시녀들이 사치와 향락, 감관에 매몰된 허망한 유희적 삶을 보고 회의와 동시에 연민의 마음을 갖습니다. 생로병사의 슬픔과 불안으로 고뇌하는 싯다르타와, 당시에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온갖 고통에 연민하는 싯다르타를 우리는 동시에 보아야 합니다. 또 유마경에서는 보살의 병은 대비에서 생긴다고 말합니다. 화엄경 보현행원품에서는 보살은 중생으로 인해 자비심을 일으키고 자비심으로 인해 구도심을 일으키고 구도심으로 인해 깨달음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자비심은 또 존재의 법칙을 깨닫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이가 마땅히 실현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부처님은 전법선언에서 깨달음을 이룬 60명의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다. 그대들도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다.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중생의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세상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자비심을 가지고,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수행은 자비심으로 모아집니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하나하나가 바로 자비의 행으로 피어나는 삶이 보살의 만행입니다.

 

초발심 행자님!
불교 수행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이 '깨달음'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이는 자비의 실천이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이는 성불이라고 하며 정토세계의 장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느 것이 맞을까요? 모두가 맞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어는 무엇을 규정하면서 동시에 배타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어는 늘 오해와 모순을 불러일으킵니다. 가령 불교 수행의 목적이 깨달음이라고만 한다면 자비의 가치가 들어설 틈이 없게 됩니다. 또 자비의 실천이라고만 한다면 지혜의 가치가 사변적이 될 수 있습니다. 일상적인 실천만을 강조하면 깊고 본질적인 깨달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혜의 길 자비의 길을 가는 초발심 행자님!
행자님은 원만구족(圓滿具足), 원융무애(圓融無碍)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하나의 존재가 온전히 성립하고 빛나기 위해서는 모든 것들이 두루두루 갖추어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원만구족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립된 존재들이 삶의 역할을 주고받는데 서로 장애가 없는 모습이 원융무애입니다. 마치 한 채의 온전한 집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반, 주춧돌, 기둥, 벽, 대들보, 서까래, 지붕이 필요하고 설계자와 건축가의 노력이 두루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아름답고 살아가기 편리한 집 한 채를 짓기 위하여 어느 것을 소홀히 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행자님! 참된 삶의 성취와 실현에 있어서 어느 하나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어느 하나만으로 모든 목적과 가치를 획일적으로 규정한다면, 이는 존재가 성립할 수도 없고 설령 성립한다 해도 불완전할 것입니다.

 

간혹 이렇게 묻는 불자를 만납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인가? 자비의 종교인가?"라고요. 저는 얼마 전에 자신에게 이런 물음을 던졌습니다. "다종교 사회에서, 대다수 사회 사람들은 깨달음을 선택할까? 사랑을 선택할까?"행자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속의 많은 사람들에게 불교가 깨달음을 내걸고 그리스도교가 사랑을 내건다면 어느 쪽이 이길 것 같습니까? 사실 참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어설프기도 하고요. 하지만 제가 이런 발상을 한 이유는 나름대로 까닭이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행자님!
사람의 몸에서 손이 중요한가요? 발이 중요한가요? 라고 물었을 때 손과 발 둘 다 중요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음식을 만들고 물건을 옮기고자 할 때 우리는 손을 필요로 합니다. 손이 필수가 되고 발은 보조가 되지요. 만약 음식을 만들고 물건을 옮기고자 할 때 손을 주지 못하고 발을 준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발이 몸에서 중요하기는 하지만 발을 거절하고 당연히 손을 선택하겠지요. 반대로 어디를 가고자 할 때 발이 필수가 되고 손이 보조가 됩니다.

세상의 이치가 그렇습니다. 존재는 다양한 것들로 성립하지만 사람은 '그 때'필요한 것을 선택합니다. 책과 밥이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지만 당장 배가 고픈 사람은 책 보다는 밥을 선택합니다. 몸이 아픈 사람은 약과 의사를 선택합니다. 마음이 허전한 사람은 밥과 함께 책을 중요하게 선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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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수행자는 두루 갖추어야 합니다. 갖추어야 할 것을 마땅히 갖추었을 때 원만한 수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무수히 쏟아지는 정보와 기능을 말하지 않습니다. 고결한 품성과 자질, 깊고 풍부한 안목, 다양한 교화방편을 말합니다. 행자님은 믿음만 갖추고 원력은 갖추지 않으시렵니까. 경전과 참선에만 힘쓰고 도덕과 윤리는 가볍게 대하시겠습니까. 하심의 품성만 기르고 당당한 용기는 저버리시겠습니까? 나아가 지혜는 갖추고 자비심은 소홀히 한다거나 자비심만을 생각하고 존재의 법칙을 탐구하는 노력과 자기 단련은 뒤로 하시겠습니까? 다시 한번 원만구족 원융무애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두루 갖춘 수행자는 이웃이 원하는 것에 응해 주고 이웃이 아픈 곳에 달려가야 합니다. 두루 갖추고 사람이 부르면 달려가는 보현행자의 자세를 대웅전 주련에서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불신충만어법계 보현일체중생전 수연부감미부주 이항처차보리좌(佛身充滿於法界 普現一切衆生前 隨緣赴感靡不住 而恒處此普堤座). 화엄경의 말씀입니다. "부처님은 언제 어느 곳에 계시면서/ 널리 모든 중생의 앞에 나타나시네/ 인연 따라 감응하지 않음이 없으시나/ 항상 깨달음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으시네". 여기서 인연 따라 감응함이란 바로 이웃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이웃의 요청에 손을 잡는 일입니다.

중생과 사회가 삶의 방향을 잘 못 잡고 탐욕과 투쟁에 빠져 있으면 미망을 깨우는 지혜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말씀이 필요할 때 대중은 지혜를 주는 쪽에 호응하고 선택합니다. 억압과 부조리가 있는 곳에는 정의와 위로의 손발이 필요합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사랑을 주는 쪽에 호응하고 선택합니다. 사람 사는 이치가 이러하므로 고유의 가치만을 금과옥조로 고집한다면 대중은 외면하게 됩니다. 1960년대에서 1980년대에 걸친 30년 동안 한국사회에서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사회적 대응과 대중의 호응을 한 번 깊이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행자님!
이제 정리를 해봅니다. 손과 발은 몸을 이루는 데 둘 다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손이 필요할 때는 손을, 발이 필요할 때는 발이 움직여야 합니다. 더불어 손과 발이 모두 필요할 때는 손과 발 모두가 움직여야 합니다.
지혜와 자비도 이와 같습니다. 자비와 지혜는 두 몸의 한 몸입니다.

오늘도 새는 한 겨울 무한창공을 두 날개로 날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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