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의 미학 1
예수님의 선포 활동(마르 1,29~39)
사람들은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부터 전투를 시작합니다. 시간이 되었으니 깨어나는 것이 아니고 자명종이 울렸으니 일어나야 하는 의무감 앞에 일어납니다. 의식과 의지으로는 ‘일어나야지...’ 하는데 이불이 몸을 꽉 누르고 못 일어나게 하는 경우도 많지요.
선인(仙人)들은 일어나면 기지개를 켜라고 가르칩니다. 하루의 氣가 열리는 여명에 일어나고 날이 밝으면 들로 나가고 어스름해지면 집으로 돌아오고 와서 사물의 색깔이 사라지는 밤이면 잠자리에 들라고 가르칩니다. 날짐승 길짐승들이 그러하듯이 자연의 리듬 에 따르라는 말이지요. ‘기지개 켠다’는 한문으로는 ‘氣之開’ 라고 씁니다. ‘기를 열다. 기가 소통하도록 몸을 열다’입니다.
현대인들은 전기 문명을 맞이하여 밤도 대낮같이 밝히고 일하거나 놀게 되었습니다. 밤도 계절도 사라졌고 무엇보다 바빠졌습니다. 만나는 사람도 많고 가야만 할 모임도 많고 그렇게 또 다른 약속을 만들어 냅니다. 사업이나 정치나 큰일을 하는 이들은 더욱 그럴 것입니다. 책임과 의무감 앞에 바쁠 수밖에 없는지라 24시간을 더 늘릴 수는 없으니 수면시간을 줄이게 됩니다.
하루 7~8 시간은 잠을 자야 건강하고 노동할 수 있지 않을까요. 너무 바빠서 일이 중복되면 정신이 나누어질 것이고 ‘정신없다. 정신없이 바쁘다’ 고 말할 것입니다. 바쁘고 정신없이 일을 하면 내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타인과의 관계를 지나쳐 버리지 않았는지, 그래서 상처를 주고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내가 나를 보지 못하고 생활하게 됩니다.
많은 일을 하면서도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런가? 예수님의 여정에 동행하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생활 모습에서 그런 비결을 깨우치게 됩니다.
회당의 종교 모임에서 나오시자마자 측근 제자인 시몬의 장모님이 아프다고 알려옵니다. 나선 걸음으로 찾아갑니다. 치유해 주고 나서 간단한 요기를 하고 있을 무렵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마귀 들린 이, 갖가지 질병으로 앓는 이들이 이미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나 없다 그래라!’ 할 수도 없고 모두가 긍휼히 보임에 구마와 치유를 베풀어 돌려보냅니다. 저녁이 깊었을 무렵에는 기가 많이 소진되셨을 것이고 그렇게 하루가 마감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새벽 여명이 트기도 전에 기지개 켜는 시간을 맞이하십니다.
[다음날 새벽 캄캄할 때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셨다.]
그 분주하신 사역에도 연민과 애정이 지극할 수 있었던 것은 생활의 중심축에 기도가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바쁘신 중에도 자신을 보실 수 있었고,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음 해야 할 일과 피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먼저 할 일과 나중에 할 일, 큰일과 작은 일, 무엇보다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확연하게 알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온 것이다.]
우리 마을에서는 오전 오후 새참시간이면 간종을 칩니다. 그러면 밭에서건 축사에서건, 효소를 담그거나 건축일을 하는 중이건 잠시 모든 일손을 멈추고 1분 명상을 합니다.
‘나는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가?’
‘내 곁에는 누가 있는가?’
‘나는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바쁜 중에는 잠시 명상의 시간을 가지면 좋습니다. 창가에서 혹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단 10분만이라도 숨 가쁜 일정에 잠시 멈춤이 영적 유산소가 될 것입니다. 생활의 리듬과 호흡을 잠시 멈추게 하는 일은 소중한 기능을 합니다.
쉼표 없는 음악은 음악이 될 수 없습니다. 권투 선수가 링 위에서 성호를 긋습니다. 수험생이 답안지를 받자마자 문제지를 훑어보는 것과 잠시 눈을 감고 기도하는 순간을 갖는 것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앞으로 예수님의 여정에 동반하면서 깨어있게 된다면 예수님께서 피곤하심에도 종종 밤늦게까지 기도하시는 것을 목격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때마다 중요한 일이 다가오는 순간이었다는 것도 알 것입니다. 배는 무게 중심이 있어야 풍랑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낮에는 해가, 밤에는 달이 빛이고, 사람에게는 지혜가 빛이다. (2014. 1.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