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총리의 명상
*일본 도쿄 사찰 '젠쇼안'에서 명상을 하고 있는 아베 일본 총리. 스님에게 죽비도 맞는다.
2008년부터 아베 총리가 매달 명상을 하는 곳으로, 중요한 일을 앞두고 항상 찾는다고 한다.
젠쇼안 주지 히라이 쇼슈는 "(아베의) 자신감은 자기 몰입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할 일을 조용히 결단하는 데서 나온다는 인상을 받았죠."라고 말했다.
*사진설명과 이미지 출처 : TV조선
정신이 번쩍 들었다. 텔레비전을 보던 중 눈을 의심할 정도로 놀라운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잠깐 스쳐간 화면이었지만, 틀림없이 아베 총리가 가부좌를 하고 명상을 하는 장면이었다. 나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 대다수가 제일 싫어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기에, 평소에는 그가 화면에 떴다 하면 채널을 돌려버렸지만, 이번만은 순간이었지만 달랐다. 너무나 뜻밖이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면이라는 생각이 퍼떡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곧 생각나는 것들을 글로 한 번 써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한동안 뜸했던 휴심정 생각이 났다.
막상 글을 쓰려고 하니까 내가 아베 총리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다. 그의 외조부 기시 수상이 2차 대전의 일급전범이었다는 사실과 그가 요즈음 거침없는 일본의 우경화 바람을 일이키고 있는 장본인이라는 것 말고는 그에 대해 특별히 아는 게 없고, 알고 싶은 마음도 없다. 더군다나 그가 명상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전혀 몰랐다.
명상이라는 게 무엇인가? 명상도 여러 가지라 한 마디로 말하긴 어렵지만, 명상은 기본적으로 마음의 온갖 잡념을 제거하고 생각과 의식을 하나로 모으는 일이 필수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너무나 잘 되고 행복해서 그 자체를 즐기기도 하지만, 내가 아는 한 그런 사람은 매우 드물고, 그런 삼매의 경지는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산만했던 마음을 잠재우고 하나로 모으면, 마음이 오히려 또렷해져서 수시로 변하는 자신의 마음 상태는 물론이고 사물의 이법까지도 꿰뚫어보는 통찰력과 지혜가 생긴다고 한다. 불교에서도 삼매나 선정에 드는 것 자체가 열반이 아니고 지혜나 깨달음이 있어야만 열반이 가능하다고 본다.
아베 총리가 명상하는 장면을 보면서, 저분이 과연 무슨 목적, 무슨 생각으로 앉아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생각을 지우는 것이 명상이라면, 우선 자신의 우경화 행보를 둘러싸고 난무하는 국내외의 온갖 시끄러운 비난이나 찬양의 목소리에 귀를 막고 싶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적어도 목적의 일부라면, 곤란하다는 생각이 든다. 행여 그분의 명상이 양심의 목소리를 외면하거나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는 데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준다면, 그런 명상은 하지 않는 것만 못할 것이고, 또 명상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다. 일본에서는 좌선을 중시하는 선불교가 ‘사무라이의 종교’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유명한 스즈키 다이세츠는 『선과 일본문화』 에서 선불교와 고도의 정신집중을 요하는 검도의 관계를 매우 인상 깊게 설명하고 있다. 칼을 생명으로 여기며 살던 사무라이들이 왜 하필이면 선에 끌렸는지 이해가 간다. 문제의 핵심은 좌선이나 명상이 본질적으로 선악을 초월하는 가치중립적 경지에 이르는 데 있냐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나 자신을 포함해서 명상을 하는 사람 모두가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다.
아베 총리가 명상하는 장면을 보면서 온갖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저 분은 혹시 현대판 사무라이가 아닐까? 아니, 그의 족보를 캐보면 정말 사무라이의 후손이 아닐까? 저분의 명상이 인류 보편의 윤리의식을 잠재우는 명상일지, 아니면 일본을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몰고 가려는 자신의 행보를 둘러싼 온갖 소음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시간일지, 그러고 나서는 명상도 할 줄 아는 제법 ‘깨끗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누가 뭐래도 가던 길을 가겠다고 사무라이 식 기개와 결연한 자세를 다시 한 번 가다듬으려는 것인지, 그의 양심 말고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의 명상이 정치적 야심과 세속적 욕망으로 가려진 양심의 소리에 잠시나마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지만, 물론 나의 부질없는 희망사항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