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조심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지난 해 12월경 어떤 스님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나는 그 즈음 일지암에서 진행하는 '청년출가, 암자수행30일'을 위해 수행자를 모집하는 중이었다. 편지는 어느 일간 신문에 실린 청년출가수행 기사를 접하고 보낸 편지였다. 편지의 사연은 내게 참회와 성찰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글의 행간에는 나를 향한 서운함과 분노가 곳곳에 배어 있었다.
대강의 사연인즉 직지사에서 행한 3급 승가고시 면접장에서 당시 조계종 교육부장인 내게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모멸감을 느낀 이유는 내가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물었고, 그 스님은 깨달음의 성취라고 답했고, 다시 나는 거두절미하고 단번에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고 야멸차게 잘랐다는 것이다. 그 스님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고, 고시 이후 서운하고 분한 감정을 못 이기고 내게 많은 원망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게 조계종 교육부장 답게 보다 겸손하고 자애롭게 사람을 대하라고 충고했다. 이 편지로 나를 향한 원한의 마음을 접겠다는 말로 편지는 끝을 맺었다.
그 편지를 받고 참 많이 당황했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그렇게 말한 기억은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스님에게만 그런 질문을 한 것이 아니다. 많은 스님과 재가불자들과 물음을 주고받았다. 불교수행의 최종 목적이 ‘깨달음’이라고 말한 분에게는 자칫 깨달음에만 갇히게 될 것을 염려하여 깨달음에만 머물지 말고 자비보살행을 겸행할 것을 권한다. 반면에 초심 수행자들 중에서 처음부터 도심 포교와 사회복지 등의 대외적인 일에 강하게 신념을 내비치면 먼저 경학 연찬과 참선 수행으로 내실을 튼튼하게 다질 것을 조언한다. 윗 세대 분들의 불교적 삶의 행적과 내 삶의 과오를 토대로 후학들이 가야할 방향을 제대로 잡고,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삶의 지향과 방식을 말한 것이다. 그것은 승가공동체에서 나의 책임이고 자비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정을 가지고 조언한다고 생각한 나의 '발언'이 결과적으로 상대에게 큰 마음의 상처를 준 것이다. 내게 편지를 보내 온 스님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같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했다. 본의는 아니었으나 나의 전달 방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편지를 받고 나서 그 스님에게 정중한 사과를 보냈다. 이후 보다 겸손하고 자애롭게 처신하겠노라고 말했다. 지금 이 지면을 통해 나의 표정과 말로 상처를 받은 분들께 진심으로 참회를 드린다. 그 때 자비에도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크게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나의 방편은 참으로 서툴고 어설프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거듭 '말'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더구나 많은 다양한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아야 하는 나의 처지에서 본다면 말의 내용과 품격은 파장이 클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조심해야 한다. 지금도 나는 불보다 말이 더 무섭다. 꺼진 불도 다시 보고 한 말도 다시 생각한다. 그리고 좋은 말을 하기보다는 말실수를 줄이는 것에 더 신경이 쓰인다.
말에 대한 조심과 경건, 소중함은 '청년출가, 암자수행30일'동안에 틈틈이 낭독한 발원문에서 더욱 절실해졌다. 이 발원문은 미산스님이 아름답게 가꾸고 있는 수행공동체 상도선원에서 일상 법회 때 사용하고 있다. 표정 없고 온기 없이 훈육의 냄새가 나는 많은 발원문을 대하다가 이 '슬기로운 말의 주인이 되기 위한 명상 발원문'은 매우 신선하고 감동이었다.
제가 이 세상에서 태어나 수 없이 뿌려 놓은 말의
씨앗들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무심코 버린 말의 씨앗일지라도
그 어디선가 뿌리를 내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왠지 두렵고 불안합니다.
더러는 허공으로 사라지고
더러는 다른 이의 가슴속에서 좋은 열매를
또는 언짢은 열매를 맺기도 했을 언어의 나무
매일 돌처럼 단단히 결심은 해도
슬기로운 말의 주인이 되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우리의 삶은 어찌 보면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교학적으로 말하면 여섯 개의 감관 기능이 그에 대응하는 여섯 개의 대상을 마주하여 느낌을, 개념을, 의도를, 분별과 인식을 만들어 내는 활동이다. 여기서 우리는 형성된 느낌, 개념, 의도, 분별과 인식 등을 몸이나 말로 표현한다. 분노와 적의를 표현하면 폭력과 폭언이 된다. 좋은 감정과 사랑을 표현하면 자비와 애어(愛語)가 된다. 표현은 곧 업의 다른 이름이다. 일상에서 대부분의 표현은 말이다. 말을 조심해야 하고 말을 잘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말은 뱉은 순간 당장에 서로가 반응하게 되고(順現報), 아니면 며칠 후, 몇 년 후에도 반응과 결과를 가져온다(順生報).
생각해보니 참 많은 말을 했다. 많은 말 중에서도 정직하지 못한 말을 많이 했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경전 구절을 잘 아는 것처럼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법문과 강의라는 이름으로 일방적으로 늘어놓았다(死句). 말은 진지한 성찰과 사유를 통하여 체험된 자기 언어로 표현할 때 이해와 공감을 이룬다(活句). 눈 밝은 사람들은 금방 알았을 것이다. 그저 잘 짜여진 내 말의 허구와 허상을 눈치 채고 실소했을 것이다. 오싹하고 두렵다. 격물(格物)하지 못했으니 치지(致知)하지 못했고, 당연히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을 이룰 수 없었으며, 참다운 수신(修身)에는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아무리 말로 포장해도 세상을 결코 속일 수는 없다. 아니 세상은 속아 주지 않는다. 다만 침묵하거나 속은 채 하고 있을 뿐이다. 오로지 정직한 삶, 정직한 말이 설득과 공감의 정도임을 뒤늦게 절실하게 깨닫는다.
또 생각해 보니 말을 하는 기술이 너무도 안이하고 배려가 없었음을 후회하고 자책한다. 정작 나의 의도는 불순하지 않고 이웃을 위하였겠으나 얼굴의 표정과 말의 표현은 이웃의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때가 많았다. 기분 나쁘고 모멸감을 느꼈을지라도 차마 나에게 항변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니 이 또한 가슴이 아프다. 잡아함의 말씀이 떠오른다. 부처님께서는 남에게 충고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먼저 사실 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말 할 때를 잘 가리며, 근거를 가지고 조리 있게 말하며, 부드럽게 이야기 하고, 자비심을 늘 품고 말해야 한다고 한다.
향기롭고 지혜로운 말의 주인이 되기 위해
먼저 침묵하는 지혜를 깨우쳐야 되겠습니다.
거짓된 말 한마디가 삶을 헛되게 하고
진실한 말 한마디가 삶을 알차게 합니다.
허영에 찬 말 한마디가 근심과 두려움을 주고
신념에 찬 말 한마디가 희망과 광명을 줍니다.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싸움의 불씨가 되고
칭찬의 말 한마디가 삶의 길을 평탄케 합니다.
잔인한 말 한마디가 삶을 파괴하고
사랑 담긴 자비의 말 한마디가 삶을 복되게 합니다.
겸허한 말 한마디가 우정을 두텁게 하고
덕스러운 말 한마디가 편안함과 넉넉함을 줍니다.
차분한 말 한마디가 고요함을 자아내고
깊이 있는 말 한마디가 잔잔한 기쁨을 줍니다.
때에 맞는 위트 있는 말 한마디가 긴장을 풀어주고
조리에 맞는 말 한마디가 지혜를 자아냅니다.
나는 이 발원문에서 말은 곧 마음에 닿아 있고, 말은 곧 삶을 가꾸는 씨앗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무엇보다도 침묵하면서 마음을 경건하게 하고 침묵의 힘으로 생명과 세상을 정직하게 보는 눈을 길러야 하리라. 침묵의 바닥에 고인 생각과 감정을 진실하고 아름답고 다순 체온이 있는 말로 건져 올려야 하리라.
그리고 '하지 않아야 함'과 '해야 함'의 동시적 실천이 말의 용법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요즘 '하지 않아야 할 것'의 소중한 가치를 절실하게 느낀다. 그래서 공자는 <논어>에서 "자기가 원하지 않은 것은 남에게도 강요하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고 하지 않았던가.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서, 모임과 모임의 사이에서 우리는 선한 일을 많이 못해서 문제와 갈등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도덕과 윤리의 규범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고, 개인과 집단의 문화적 차이를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으로 인하여 오해와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열 가지 선행은 열 가지 선하지 않는 행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말에서도 이와 같다. 인정받고 과시하고자 하는 욕구로 허위와 허영에 찬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이웃에게 수군거림을 당하지 않고 무시당하지 않는 처신일 것이다. 이웃의 가슴에 못 박는 말을 하지 않는 것, 삿된 이익을 취하고자 거짓과 이간의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말을 잘하는 것이다. 이 바탕 위에 위로의 말, 격려의 말, 사랑의 말, 정의로운 말, 용기 있는 말이 놓여야 한다. 금상첨화! 비단 위에 아름다운 무늬를 수놓을 때 말은 예술이 된다.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고, 말해야 할 때 말하라. 말을 다스려 마음을 다스려라. 말을 가꾸어 삶을 가꾸어라. 이것이 팔정도의 정어(正語)수행이 아니겠는가?
슬기로운 말의 주인이 되기 위한 명상 발원문은 이렇게 맺는다.
나날이 새로운 마음, 깨어 있는 마음,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좀 더 신선하고 분별력 있으며
겸허하고 인내로운 말로
밝고 풍요로운 언어생활을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해처럼 맑게 빛나는 삶,
노래처럼 즐거운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