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완전한 것 세 가지
“원수를 사랑하라(마르 8,27-33)”
마태오 복음의 산상설교와 공동체 설교(18장)는 ‘평화와 행복한 길의 헌장’입니다. “아버지께서 완전하심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인간은 유한한 존재인데 예수님의 이런 요청은 ‘목표를 그렇게 두고 노력하라.’ 는 것일까요? 아니면 가능하다는 것일까요?
생각건대 세상에 완전한 것 세 가지가 있으니, ‘하느님, 자연법칙, 그리고 시작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無始無終 無所不在 全知全能의 完全者이신데 인간들은 신의 이름으로 싸웁니다. 자연의 질서는 한 치의 어김이 없는데 사람들은 물을 위로 흐르게 만들어 놓고 살지요. 아직 붓을 들지 않은 화선지는 깨끗하니 완전한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불완전한 사물과 의식이 표현됩니다.
존중과 사랑에는 평화가 완전한데 ‘나’라 교만이 등장하시면서 교만과 교만이 부딛쳐 다툼이 시작되고 증폭합니다. ‘이에는 이로’라는 정당한 수학적 보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른 뺨을 맞을 때 똑같이 귀싸대기를 쳐올리면 피장파장 본전이고 0가 되었으니 원상태로 가야하는 것이 수학인데 그런 공식은 없다는 것이 인문입니다.
뺨은 귀싸대기를 낳고 귀싸대기는 주먹을 낳고 주먹은 몽둥이와 칼을 낳고 살인을 낳으니까요. 죄는 그렇게 무한 증식의 성질을 가져서 평화가 위축되고 사랑이 위협받습니다. 모든 다툼의 원인은 나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상대방 먼저 시작했다고 합니다. 마주치지 않은 손뼉에서 소리가 나더라는 말일지니 내가 없었다면 그가 죄를 짓지 않았을 테지요.
*영화 <피에타>
이웃과의 불화를 종식하고 평화를 구하는 예수님 방식은 ‘용서와 자비’ 입니다. 겉옷을 달라고 하면 시계까지 벗어주고 한 개를 요구하면 두 개를 내어주고 원수를 사랑하라! 그렇게 자신을 비워버리면 다툼도 죄도 더 증식되지 못한다. 시기와 욕구와 지배욕이 나에게로 와서 더 이상 응사되어 나가지 않게 하는 것 외에는 왕도가 없으니 모욕이 나에게로 오거든 가두어 두라! 바다는 결코 강물을 다시 돌려보내지 않고 바람은 그물에 걸리지 않으니 네게서 걸림이 없게 마음에 크게 비워두라!
스승께서 요구하시는 평화의 길이 그렇다 하니 제자로 따름에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말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당신 먼저 그렇게 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한 것에서 시작하여 흐르고 흘러 강물을 이루는 인류의 죄악이 십자가라는 바다에 이르러 멈추게 하시고자 두 팔을 벌리고 세상의 모든 죄를 다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구원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외면하여 구원에 이르지 못함은 각자의 몫입니다.
하느님의 창조성대로 마음은 백지로 두라! 그것이 완전함이니 거기에 자신을 그려 넣지 말라! 그물은 바람을 막지 않습니다. 문제의 경계 앞에 걸림이 없으면 분쟁은 일어나지 않고 평화를 빼앗기지 않습니다. 세상의 평화는 완전하신 분과 일치한 만큼만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폐악을 용서만 하고 계속되는 희생을 감당해야만 하는가? 인류 문화사의 오랜 논쟁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악을 악으로 폭력으로 폭력을 다스리는데 실패했다는 사실입니다. 가정에서도 공동체에서도 국제관계에서도 검증된 사실이지요. 그래서 오늘도 불화와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햇빛과 비를 주심에 악인이 잘 살고 잘 나가는 것이 불공평합니다. 그런데 자식이 살인마라 해도 사형당하기 원하는 부모 없는 걸 보면 무엇이 선이고 악이고 공평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세상도 삶도 모두 불완전합니다. 인과응보의 심판은 완전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의 몫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다만 요셉의 자비심으로 하늘에 귀를 기울이며 용서하고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
“하늘의 그물은 성긴 듯 보이되 악인에게는 촘촘하기 그지없다.” (2014. 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