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이야르 드 샤르댕 ‘소멸과 생성’
1967년 보스턴 대학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는 '체세포 분열하는 세포의 기원에 대해'이라는 제목의 한 논문을 [이론 생물학 저널]에 발표하였다.(열다섯 번이나 거절당한 후 겨우 게재되었다고 한다.)
19세기 라마르크의 ‘동물철학’과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 진화론을 발표한 이래 우리들 대부분은, 단세포에서 고등 생물까지 생물의 진화는 기본으로 가지치기하는 과정 즉 공통조상을 가진 자손들이 DNA의 돌연변이를 통해 점진적이며 단선적으로 진화함으로서 다양한 종이 출현한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는 이 논문에서, 생물 가지들이 서로 합쳐서 새로운 종이 출현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생물 간의 '내부 공생'에 의해 점진적이고 평면적인 진화의 과정을 제시함으로써 생물진화론에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을 가져오게 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식물이 낮에는 광합성을 하여 산소를 배출하고 밤에는 산소를 호흡하는 생물임을 잘 알고 있다. 아주 오랜 옛날 약30억 년 전 모든 생물이 단세포 이었던 때 이산화탄소를 흡입하고 산소를 배출하여 광합성을 하는 시아노박테리아와 산소를 흡입하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호기성 프로테오 박테리아가 서로의 필요에 의해 처음에는 - 악어와 악어새 같은 - 공생을 하다가 아예 한 몸인 키메라가 되어 오늘날 식물의 원조가 되었다.
*미토콘드리아
오늘날 식물이 광합성을 하는 엽록체에는 시아노박테리아의 DNA, RNA, 리보솜 등이 남아 있어 식물세포의 핵과는 독립적으로 생리작용을 수행하고 있으며, 오늘날 동식물의 세포 소기관으로 존재하는 미토콘드리아는 프로테오 박테리아가 원조로 생물에서 에너지 생성과 性, 죽음에 관여하는 독립 생리기능을 하고 있다.
파란 가을 하늘 아래 붉고 흰 코스모스에는 엽록체도 있고 미토콘드리아도 있어 코스모스는 적어도 세 계통의 유전 형질이 모인 키메라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눈에 펼쳐진 넓고 푸른 숲은 사실 우글거리는 시아노박테리아의 무수한 군상들인 것이다.
생물 간의 '내부 공생설'은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가 처음으로 주장한 학자는 아니었다. 이미 19세기 말, 20세기 초 독일의 식물학자 쉼퍼(Schimper)와 소련의 식물학자 메레츠코프스키(Merezhkovsky)에 의해 '내부 공생설'을 제기하였으나 당시의 과학 수준으로는 이론의 실증이 불가능했음으로 무시와 반증에 타격을 입고 1960년까지 생물학계에서는 사장된 이론이었다.
20세기 후반 전자현미경과 생화학 및 분자생물학의 발달에 힘입어 오늘날 생물학자들은 엽록체와 미토콘드리아의 DNA 염기서열이 식물 세포의 핵 속에 있는 DNA 염기서열 보다 현존하는 시아노박테리아와 프로테오 박테리아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입증함으로서 엽록체와 미토콘드리아가 내부공생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유전자 조작 옥수수와 콩
오늘날에도 우리는 유전공학을 이용하여 키메라 동식물을 많이 만들고 있는데 예를 들면 포마토(토마토+감자), 유전자 조작 콩이나 옥수수, 인슐린 생성 박테리아, 메탄 생성 박테리아 등이 있다. 또한 토마토 대목에 까마중을 접붙여 부정아(여러 개의 불규칙 싹 눈)를 발생시켜 그 줄기를 자르면 한쪽은 토마토의 형질이고 다른 쪽은 까마중 형질을 갖는 키메라임을 볼 수 있다.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에 의한 생물 간의 '내부 공생설'에 이어 1980년대 중반 콜로라도 대학의 생화학자 토머스 체크(Thomas Cech)는 섬모충류 원생동물인 테트라히메나 테르모필라(Tetrahymena thermophila)의 RNA 가닥을 편집(splicing) 실험하는 중에 RNA는 다른 효소 단백질이 없어도 ‘RNA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자르고 붙인다’는 매우 충격적인 결론을 얻게 되었다. 여기에 식물과 동물의 DNA 염기서열이 같은 뿌리임이 밝혀짐으로서 오늘날 생화학자들은 DNA와 RNA가 초기 생명(체)의 한 개체였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현존하는 생물의 세포 속에는 핵(핵막과 염색체(DNA), 뉴클레오솜 등이 있다.), 세포막, 그리고 여러 가지 기능을 하는 세포물질이 많이 들어있는데 - 미토콘드리아, 골지체, 엽록체(엽록소), 리보솜, RNA, 소포체 등등이다. 우리들은 핵물질과 세포 소기관이 생물 개체가 변이와 자연선택을 통해 획득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들 대부분이 초기 생명(체)의 한 개체이었으며 하나의 영역(세포)안에서 공생 또는 흡수, 스와핑에 의해 - 키메라가 되어 - 원핵(단세포)생물로 출현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생태환경이 바다에 국한되었기 때문에 키메라가 가능했었다.
오늘날 분자 생물학자들은 생물 간의 DNA 염기서열을 분석 비교함으로서 식물의 원조를 비롯한 현존하는 모든 진핵(다세포)생물원조 또한 약7억 년 전 원핵(단세포)생물 간의 키메라에 의해서 출현하였으며 적어도 3~6 번 이상의 키메라 과정이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키메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 머리는 사자, 몸은 염소, 꼬리는 뱀인 - 괴물 키마이라에서 유래된 말로서, 하나의 생물체 안에 유전형
질이 다른 세포가 함께 존재하는 생물을 뜻하는 유전학에서 쓰는 용어이다.
린 마굴리스로 대변되는 생물진화의 키메라 현상은 라마르크와 다윈에서 시작된 진화론의 가장 결정적인 과학적 증거이며 수천 년 간 인류, 특히 서양인의 세계관을 지배하고 있던 창조론 - ‘神의 영역’- 이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게 되었다.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적자생존’이라는 다윈이즘에 의한 생물진화에서 - ‘적자생존’이라는 말은 다윈이 만들어 낸 말이 아니라 영국의 철학자이며 사회학자인 스펜서(Herbert . Spencer 1840-1910) 이다. - ‘자연선택’이란 “모든 생물은 높은 번식능력이 있어 많은 수의 자손을 낳는데 이 자손들 가운데 성체로까지 생존할 수 있는 개체 수는 극소수이어서, 과잉 생산된 개체들 사이에는 생존경쟁이 필연이다. 또한 개체사이에는 유전적 변이에 따른 형질의 차이가 있어, 환경에 보다 잘 적용할 수 있는 형질을 갖춘 개체일수록 생존이 유리하다. 즉 적자생존을 통하여 생물은 진화한다.”는 이론이 린 마굴리스에 의해 수정되기 시작했다.
생물은 무기질만으로는 생존이 불가능한(무기질과 유기질의 에너지 응축양이 1:100이다) 존재로서 생물은 자신이 존재이면서 다른 생물의 먹이인 숙명적인 물질이기 때문에 - 광합성을 하는 독립영양생물 식물조차도 무기질 비료(N, P, K등)와 유기질 비료(동식물이 분해된 양분이며 퇴비, 깻묵, 닭똥, 외양간 거름 등이 있다.)가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 - 치열한 생존경쟁이 필연이라 생각하지만 생태계 먹이 사슬은 하부구조가 넓고 상부구조가 좁아 치열한 생존경쟁이 아니라 땀 흘리는 노동이 필요한 곳이다.
피리미드의 먹이사슬의 형성은 性의 분화와 임신기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고등생물로 진화함에 따라 性의 분화가 개체 수의 조절에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만약 호랑이나 사자가 수억 개의 포자를 날리는 버섯이 아니더라도 토끼나 개의 번식력이라면 생태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자연선택’에서 ‘선택’은 기존 질서에 순응하는 의미보다 - 길은 항상 어디나 있고, 길은 결국 아무데도 없는 - 바다에서 항로를 ‘찾는 일’ 즉 시행착오(試行錯誤)의 반복이라는 의미가 크다.
헤겔과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철학자들의 사고에서 인간의 사회상이 자연과 생물환경의 연속성임을 올바르게 인식하였지만 그들 자신이 생물학자가 아니었으며, 근대 사회학자 정치, 경제학자들이 ‘자연선택’을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해석함으로써 생물진화의 본질을 몹시 왜곡해온 것이다. 생물진화의 올바른 인식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무엇인가?”를 옳게 해석하는 지름길이다.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의 말은 개체(種) 차원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권에서 진화를 바라보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린 마굴리스의 '내부 공생설'과 라마르크의 ‘용불용설’로 생물의 진화양상을 모두 설명 할 수는 없지만 이런 의미에서 선택에 가까워 오늘날 진화론에 주류로 자리 잡고 있다.
생물의 개체는 풍선처럼 한 개의 단체(單體)가 부풀어 성장하는 구조가 아니라 구조와 기능이 같은 작은 풍선(세포)이 모여, 하나의 보다 큰 풍선(조직)을 이루고 다시 보다 큰 풍선(기관)과 가장 큰 풍선(개체)이 되는 단체(團體)로서 오늘날 물리학에서 말하는 프렉털 구조이다. 위 원조식물의 출현에서 보았듯이 엽록체와 미토콘드리아의 독립된 기능은 식물 전체와 함께 성장하고 소멸되며 식물이라는 통일된 하나의 개체로 통합하고 조정되는 동질성이며 동시성이다. 세포 한 개와 개체가 동격이나 단지 역할이 다를 뿐이다. 우리는 생물키메라를 통래 전체와 부분과의 관계현상의 본질 - 독립성, 동질성, 동시성을 쉽게 알아듣기 시작했으며 샤르댕은 이 구조를 양파구조라 하여 진화와 생명권으로 확대 인식하였다.
*키메라. 영화 <타이탄의 분노> 중에서
키메라는 진화의 평면인식 즉 현상인식이며, 프렉털은 키메라의 입체인식이며 축적된 시간인식으로서 생물진화의 양상과 개체의 성장단계 인식이다. 독일의 생물학자 헤켈(Haeckel)은 이런 현상을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반복 발생설’로 주장하였다. 즉 고등생물은 축적된 하등생물의 진화상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개체(種)의 진화는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적자생존’이 아니라 개체(種)간 생명권 정보의 공유와 협력에 의한 새로운 種의 출현, DNA-생명권 공진화이다.
샤르댕은 현대 분자생물학이 발생하기 이전에 생명권에서 생물의 진화를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그의 사상을 온전히 알아듣지 못했었다. ‘생명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생태환경 이상의 공간 즉 암석권과 수권이 내재된 생명에너지 권역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물질은 ‘생성’이고 에너지는 ‘소멸’이라는 인식에 익숙해져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소멸’은 물질이고 ‘생성’은 에너지로 사고의 전환을 해보자. 그렇다고 물질 - 에너지 순환현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빅뱅’ 직후 에너지, 무기질 에너지, 유기질 에너지, 생명 에너지, 정신 에너지에서, 에너지의 응축량(력)이 다르다. 식물이 광합성에 이용되는 빛에너지는 ‘빅뱅’ 직후 에너지가 아니라 응축된 수소 에너지이다. 여기에서 생성된 탄수화물은 수소 에너지와의 에너지 응축량이 100:1이다.
그에게 있어서 생명권은 새로운 에너지의 응축력은 새로운 물질로 인식되며, 현상에서 소나무와 강아지의 키메라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에너지 정보로 인식하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한 개가 아니라 하나로 인식되는 공통점 - 수렴하는 것이다.
씨앗은 복제되고 압축된 개체이다. 상온에서 무기질에 압축을 가하면 상태변화가 일어나지만 유기질은 파괴된다. 씨앗은 물질의 압축현상이 아니라 생명 에너지의 덧붙임으로 즉 단백질의 구조변화이다. 생물학에서는 이 현상을 질적재조정작용이라 하며 샤르댕은 ‘똬리틀기’라 인식했다. 이것이 압축현상과 생명권을 형성하는 생명에너지의 본질이며 샤르댕이 인식하는 진화이다. 이것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장에서 샤르댕의 저서 ‘물질의 심장’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생성과 소멸’이라는 말이나 ‘소멸과 생성’이라는 말은 같은 의미이면서 현상을 이해하는 다른 방향임을 인식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고대 이집트인은 스핑크스 외에 '성스러운 황소'로 알려진 '아피스', 머리가 개나 자갈 같은 '아누비스', 머리가 독수리 형상인 '호루스'등 키메라가 많이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는 봉황, 청룡, 천마, 해태, 삼족오, 천록 등 상상의 동물은 전해오나 키메라는 거의 없고, 불교의 사천왕 도깨비 상이나 머리는 사람이고 몸은 새인 극락조 '가릉빈가'가 유일하게 알려져 있다. 이들 키메라의 기원에 관하여 스위스 태생의 유사 고고학자 ‘에리히 폰 대니켄’등은 수 천 년 전 지구를 방문한 고도의 지능을 갖춘 외계인이 만든 유전체 형상이라고 주장하였다.
오늘날 대부분의 종교학자들은 이집트의 키메라 신상에 관하여 인류의 토테미즘 연장선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에서 먹이사슬구조와 키메라 연상이 우연인 것만은 아니다. - 그 이상 우주의 본질을 나타내는 상징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샤르댕은 스핑크스의 얼굴이 남성이 아니라 여성임에 주목했다. 가톨릭의 ‘성모 공경’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생물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兩性(양성)이 종족 번식에 절대 필요조건이라는 인식이 얇아진다. 특히 인간에게는 더욱 그렇다
머리는 사람이고 몸은 사자인 이집트의 스핑크스를 보고 고대 이집트 미신 신앙의 한 단면을 보듯 웃곤 하지만, 웃고 있는 우리 인간이 바로 키메라임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