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한 손엔 성경을 들고 다른 한 손엔 신문을 들어야 한다. 어떻게 기도해야하는가는 성경에 있고, 무엇을 기도해야하는 가는 신문에 있다.’ 신학을 접해본 사람이라면 아니 교회를 웬만큼 발을 디뎌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격언이다. 그러나 이 격언을 얼마만큼이나 우리가 지켜가고 있는가라고 물었을 때는 대답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성경에만 너무 치중하고 있고, 반대로 어떤 사람은 신문을 통해 세상일에만 온통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신학을 공부하는 신학생에게 적용해보면 어떨까? 한 손에는 분명 신학서적이 들려있겠지만, 다른 한 손에는 무엇이 들려있을까? 솔직히 말해서 무엇이 들려있을지 잘 모르겠다. 잘해야 교회경영을 위한 경영학일까?
성경을 신학으로 전제할 때, 세상을 읽는 눈은 구체적 학문으로 경제학, 사회학, 교육학 정도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경제의 문제는 한국사회를 읽는 키워드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지난 MB 정권을 출범시킨 국민이 가지고 있는 경제성장의 환상을 투표로 보여줌으로 알 수 있다. 또한 지난 대선의 가장 중요한 이슈였던 경제민주화만 보더라고 국민이 가지고 있는 큰 관심이 경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언제나 한 손에는 신학서적을 한 손에는 세상을 읽을 수 있는 전문서적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간학문적인 바탕이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인 우리가 세상을 바르게 섬길 수 있는 방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정모 교수의 '욕구와 시장, 그리고 신학'은 신학이란 궁극적으로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하는지 보여준 좋은 예이다. 저자는 책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어떤 욕구를 가지고 살아가며, 그 허황된 욕구를 부추기는 신자유주의라는 가치가 보여주는 현 체제의 악마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성정모 교수의 <욕구와 시장, 그리고 신학>
특별히 이 책에서 주목해야할 부분은 신자유주의라는 경제체제 안에 신학적 토대가 깔려있다는 사실이다.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신학이 말하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은 말한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출20:4)'지금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경제적 종교의 우상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주입시켜 화려한 미래와 끝없는 진보에 대한 약속을 보여줌으로 믿고 섬기게 만든다. 이러한 현자본주의의 종교성은 구체적으로 신학의 낙원에 대한 약속과 원죄의 개념, 세상에서 고통과 죄의 근본적 원인에 대한 설명,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길이나 치러야할 희생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 종교의 낙원은 시장체제를 통한 부의 무한정한 축적을 가능케 한다는 신화적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낙원에 대한 약속이 사회적․경제적 문제로 인해 현실과 부딪치게 될 때도 있는데, 그때 현실문제 해결을 위해 시장에 대한 개입을 자본주의 종교는 거부한다. 대신 겸손하게 시장에 굴복하고 시장의 메커니즘으로 하여금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게 내버려둠으로써 우리의 사회적 문제를 무의식적으로 해결하도록 하는 것을 요구한다. 그들에게 원죄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선을 행하는 것이며, 그런 방법으로 시장에 간섭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시장경제체제는 언제나 시장이 무의식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발생시킨다. 왜냐하면 시장의 논리는 경쟁에서 도태된 무능력한 자(가난한 자)들과 자본의 축적 과정에서 필요 없는 사람들에 대한 배척을 당연시하기 때문이다. 그들에 대한 고통과 죽음은 경제의 발전, 진보라는 낙원을 위해 '필연적 희생'이 되어버리고 만다. "희생 없이는 구원이 없다."라는 기독교의 개념처럼 "희생 없이는 경제발전은 없다."라는 개념을 우리에게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믿음은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재와 비슷하면서도 동시에 박정희 대통령시절의 경제성장의 기억이 강하게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에 우리나라 국민들은 "잘 살아보세."라는 하나의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낙원'을 건설하기 위해 전진 또 전진하였다. 경제발전을 위해 독재정권이 주도하는 경제개발프로젝트가 지속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와중에 정부가 시행하는 모든 일은 선이 되었고 그 선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는 것은 죄악에 해당되었다. '원죄'란 국가가 하는 일에 의심을 가지고 참견하려는 것이었다. 당시 경제발전이란 환상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농민들, 공단의 근로자들, 경제발전 때문에 일어나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 의의를 제기한 사람들 등. 그러나 그들의 희생은 경제발전을 위해서 일어나는 정당한 일이었고 그래야만 한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심지어 당시의 시대 속에서 불의한 경우를 당한 사람들 마저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낙원을 향한 믿음은 가난한 소시민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낙원은 정부와 결탁하여 기업을 운영하는 소수에게만 허락된 '가나안 땅'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믿음은 하나님은 항상 승리자 편에, 소수에게만 허락된 낙원에 서 있다는 개념을 토대로 하지 않는다. 다만 나사렛 예수가 부활했다는 고백에 근거를 둔다. 로마 제국과 당시의 유대종교권력으로부터 패배하여 심판을 받고 죽임을 당한 예수가 부활했다는 고백은 승리자(로마제국과 유대종교권력)와 함께 하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경쟁체제에서 다른 사람들을 쓰러뜨리고 승리자가 된 사람과 함께 하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이 부활의 소식은 승리자들과 힘 있는 자들의 부활이 아니라, 정치적․종교적․경제적으로 패배한 자들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에는 거룩하고 의로운 자들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이와 같은 성정모 교수의 현대 신자유주의 경제를 신학적으로 통찰해나가는 과정은 신랄하다 못해 통쾌하기까지 하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인간의 믿음이 투영된 경제체제의 우상과 우상의 그늘 아래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거시적으로 때로는 미시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저자의 신학과, 경제를 신학적으로 해석해가는 그의 관점이야말로 신학이 추구해야할 방향성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신학은 신에 대한 공부이며 신은 신의 형상으로 빚은 인간의 모습 안에 있기에, 결국 신학이란 인간에 대한 공부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해가 없이는 신이해도 불가하고, 인간이해는 인간이 처해있는 상황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경제를 이해하는 것은 한 개인의 실존적 상황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라고 말할 수 있겠다.
'욕구와 시장, 그리고 신학'을 읽고 나니 저자의 다른 글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것은 저자가 글이 내가 속한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고 바로 내가 속한 오늘을 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향한 질문으로 돌아온다. "너의 신학은 어떤 신학이며, 누구를 위한 신학이냐?"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