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아는 것 위주로 재차 확인하는 것을 배움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신의 공고한 도그마를 더 단단하게 굳혀주는 앎을 창조적인 앎의 지평으로 볼 수 있을까. 아무리 ‘진영’의 논리가 견고하고 제 팔이 안으로 굽는 식의 편파적 ‘파당주의’가 그만그만한 인간들이 얽매여 사는 실존의 수렁이라 할지라도 진지한 앎과 배움은 무엇보다 모험의 열정으로 가열차게 탐구하는 저 너머를 지향하며 꾸준히 도전하는 법 아닌가.
성서에 대한 앎과 공부 역시 마찬가지다. 성서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고백되어온 오래된 전통의 관록을 인정하더라도 그 말씀이 수많은 해석의 잔가지를 치면서 수천 년의 역사를 이어온 엄연한 사실은 무시할 수 없다. 흔히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그 대안으로 제시하는 모범 답안인 “성서로 돌아가자!”는 구호는 지당한 듯하면서도 하품 나오게 하는 동어반복이다. 그 성서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수많은 전통들이 합류하고 길항하면서 다채로운 만화경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도 성서의 어떤 전통과 어떤 신학적 지향에 우리 내부 개혁의 안테나를 맞추어야 할지, 그것이 이 시대정신의 계시와 신앙적 가치에 합치되는지 꼼꼼히 따져보는 자기 계몽적 공력을 키워나가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그리하여 성서의 진리가 그 진리성의 동어반복적인 복창 속에 몽매한 우민을 양산하길 그치는 데서 우리는 자기 비판적 성찰의 계기를 얻어야 한다. 이로부터 산출되는 참신한 재해석으로 성서의 전통적 의미체계와 그 유산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역동적으로 발전시키는 지속 가능한 해석학의 지평이 절실하다.
왜 하느님은 자신의 ‘발아래’를 보게 하셨을까
▲ <하느님 몸 보기 만지기 느끼기>, 곽건용, 꽃자리, 2014 |
이러한 점에서 곽건용의 저서 <하느님 몸 보기 만지기 느끼기>는 해석의 모험을 향한 그 도발적인 발상만으로도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다. 기실 외부인이 보기에 도발적이지 구약성서 학계에서는 그가 펼쳐놓는 여러 해석과 주장들이 충분히 토론되고 공유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의 빌미가 된 것은 그가 LA 근교의 캠퍼스 책방에서 발견하여 충격적으로 읽고 계몽적 각성의 계기를 얻은 <하느님의 생식기(God’s Phallus)>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이 책은 저자가 품어온 질문의 화약고를 폭파시키듯, 지당하면서도 오랫동안 망각의 창고 속에 묵혀온 궁금증을 한꺼번에 발화시키는 위력을 품고 있다.
하느님은 왜,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장면에서 보듯, 인간의 모습으로 지상을 활보하는 것처럼 등장한 것일까. 그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하느님의 초상은 단순히 은유이며 상징일 뿐인가. 아니면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의인화 레토릭을 뛰어넘는 신의 물질성과 육체성을 생생하게 재발견할 수 있는가. 하느님은 왜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다고 경고했는데도 실제로 이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죽지 않고 하느님이 지칭한 ‘우리들’ 가운데 하나처럼 지혜로운 자로서 용인되었는가. 그들은 왜 자신의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며 그 하체를 가리고자 했는가. 이러한 수상한 행태가 혹여 하느님의 신체적 ‘형상’대로 그들이 지음 받은 존재라서 뭔가 하느님의 버릇을 모방하는 본성이 그러한 구체적인 동작으로 표출된 것은 아닐까. 아울러, 이러한 이야기 가운데는 하느님이 모세에게 나타난 방식대로 자신의 앞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뒷모습만 살짝 보여준 것과 관련된 공통의 모티프가 잠복되어 있는 건 아닐까.
특히 그 야훼가 자신의 ‘발아래’를 보게 한 것은 그 발 위에 감추고 싶은 생식기를 민감하게 의식한 쉬쉬하는 금기적 의도의 발로였을까. 그렇지만 자신을 본 자는 죽으리라는 극단적 경고에도 불구하고 정작 야훼의 얼굴을 대면하여 본 모세가 즉각 죽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그에 앞서 야곱도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보고서도 목숨이 붙어 있게 된 걸 그 자신이 의아하게 여기지 않았던가.
이와 같이 그 금기가 일회성 엄포인 양 제대로 약발을 발휘하지 못한 증거는 적지 않다. 이사야 역시 마찬가지의 경험을 했다. 다니엘은 야훼의 머리카락을 보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러한 하느님의 신체 부위 묘사와 74명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하느님을 보면서 그 앞에서, 그와 더불어 먹고 마셨다는 기록은 단순히 은유적인 표현으로 돌려버리기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게 사실이다.
이러한 질문들은 하나의 꼭짓점으로 수렴되어 다음과 같은 종합적 의문을 야기한다. ‘이처럼 다양하고 풍성하게 구약성서는 야훼를 물질적 존재로 인식하면서, 또 그걸 언어로 표현하는 걸 막지 않으면서, 왜 그의 외모를 구체적인 형상으로 묘사하고 제작하는 걸 극도로 경계하고 꺼려한 걸까.’
이는 다시 야훼가 직접 자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령한 십계명의 제2계명의 배후적 의도와 직결되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저자는 회심의 해석적 일격을 예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워낙 보수적인 한국의 그리스도교 독자들에게 매우 충격적으로 들릴 걸 의식했음인지 그 핵심 주장은 앞서 거론한 <하느님의 생식기>란 책의 주요 논지를 풀어 소개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다.
그것은 요컨대 인간의 형상이 발원한 창조주 야훼의 앞모습, 특히 생식기가 달린 그 몸의 특정 부위를 상상하지 말라는 금기적 동기가 깔려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는 하느님이 남성으로 자신의 남근을 드러냄으로써 신적 체통과 권위가 손상되는 걸 미연에 방지하고자 배려한 결과였다. 구약성서의 저자들이 바로 이 점을 감안하여 하느님의 물성과 함께 그 물성을 넘어서는 영성을 병존시키기 위해 다양한 신학적 상상력의 장치를 동원한 흔적도 뚜렷하다. 언약궤의 다양한 전승과 성전 건축 전후의 이야기는 이와 같이 야훼의 물성과 영성을 조화롭게 이해하며 그 균형을 잡아주기 위한 후대의 신학적 작업의 일환으로 재해석된다. 아울러, 신명기 전승에서 고안해낸 하느님의 ‘이름 신학’과 사제 전승의 ‘카보드’ 신학 역시 야훼의 몸을 인간과 동물의 그것과 구별하여 그 차이점을 부각시키는 방편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이와 같이 야훼의 남성적 심벌을 가리기 위해 고안된 여러 가지 금기적 수사와 경고성 발언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는 그 경고를 겉만 요란한 엄포로 간주한 그 백성들의 대담한 상상과 모험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1975~1976년 시나이 반도 북동쪽 쿤틸레트 앗주르드에서 발굴된 것은 우리의 통념을 거스르는 불편한 유물이었다. 거기에서 드러난 야훼 상의 거대한 남근과 그 옆에 그 부인으로 만들어진 아세라 신상은 당대의 혼합주의 종교가 만들어낸 탈선의 결과로 보기보다 야훼의 물질적 존재에 대한 보편적 공감이 이런 식의 작품으로 드러난 것으로 재해석될 수 있으리라는 암시적 여운을 남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자신의 벗은 몸에 대한 자의식을 가지게 된 연후 아랫도리를 가리려 한 것은 창조주 야훼의 형상을 닮은 모습대로 행동한 부전자전의 사례가 되고, 노아 역시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은 자신의 하체를 자식들 앞에 드러내는 것과 관련하여 함에 대한 저주로 극단적 응답을 한 이야기 역시 야훼의 형상과 몸 금기로 소급되는 잔영으로 읽힐 수 있다. 반대로 이처럼 야훼의 남성 생식기를 그의 자녀들에게 드러내는 뻘쭘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해 야훼와 그 대변자들이 그토록 연막을 치면서 여러 금기의 수사학과 함께 신학적 방어 장치를 마련했으리라는 추론도 가능해진다.
▲ “하느님은 왜 인간의 모습으로 지상을 활보하는 것처럼 등장한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의인화 레토릭을 뛰어넘는 신의 물질성과 육체성을 생생하게 재발견할 수 있는가.” (그림은 미켈란젤로의 ‘이브의 창조’) |
하느님의 물질성 · 인간적 체취 지우려는 노력은 반쪽 신앙
야훼의 생식기-남근-자지 토론에서 정점에 달한 듯한 이 책의 논지를 곡해하여 이 책을 성서 해석의 선정적인 ‘플레이보이’ 수준으로 낙인찍고 던져버리는 것은 신중하지 못한 판단이다. 이 책의 진가는 그 정점 이후의 차분한 뒤집기와 성찰하기를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저자는 이 책에서 구약성서의 하느님에 대해 ‘영적인’ 꼬리표를 붙여 그 당대의 생동하는 하느님의 물질성과 인간적인 체취를 사장시켜 버리려는 이 시대 그리스도교인의 안이한 통념에 담대하게 도전한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느님의 인상에 익숙한 신자들에게 고대 히브리인들의 상상력이 진하게 개입된 야훼 하느님의 적나라한 생짜배기 신체는 충격적이며 도전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그 당대에 그들이 하느님을 만나 대화하고 그의 존재 의미를 되새기며 우리에게 전해준 정직한 전통이라면 어쩌겠는가. 구약성서의 야훼가 지닌 이러한 신체적인 성격과 물질성의 세계를 마냥 의인론적 상징이나 은유로 치부함으로써 오히려 성서의 신관이 물려준 소중한 전통의 반쪽을 우리가 통째로 잃어버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저자의 문제의식은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이처럼 물성과 영성을 넘나드는 하느님의 역동적인 이미지가 장구한 세월을 거쳐 진화해온 신론의 귀결이었다고 볼 때 그 야훼의 물질성과 형이하학에 대한 발견이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 또는 도전적 메시지는 무엇일까. 저자는 야훼를 치열하게 알고 싶어 한 그의 백성들, 동시에 자신을 그토록 적나라하게 온몸으로 알리고 싶어 한 야훼의 질투 어린 열정에서 찾는다.
‘앎’ 또는 ‘야훼의 지식’ 등에 해당되는 히브리어가 지시하듯, 하느님은 그의 백성과 갑-을 관계를 뒤집는 듯한 어조로 맹렬하게 자신의 생동하는 존재를 알리려 몸부림치며 그의 백성들에게 말씀해 오신 분이다. 이는 거꾸로 해석하면 그 야훼의 종들이 야훼를 애타게 부르고 찾고 만나며 그의 말씀을 내면에서 들어온 찐득한 관계의 체험에서 발원한 역사적 사건과 실존적 경험의 결과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성관계의 어휘에서 발원한 것으로 보이는 ‘야훼를 아는 지식’이란 말의 함의이다. 구약성서적 앎의 세계는 단순히 객관화된 인지의 결과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앎의 진정성은 구체적인 관계를 통해 야훼의 관심 대상인 이 세상의 현실 깊숙이 개입하고 그 고난의 현장에 치열하게 참여하는 주체적 경험 속에 본격적으로 개화한다.
그렇지 못한 성서적 앎의 현실을 성찰하면서 저자의 결론은 이 시대에 왜곡된 신앙생활의 현장에 대한 비판적 일갈로 압축된다.
“야웨를 아는 것을 성관계 갖듯이 그렇게 원초적으로, 뜨겁게, 몸과 몸을 부딪히면서 해야 하는 것이라면 사회정의의 실천도 그렇게 원초적이고 뜨겁고 몸으로 부딪치면서 해야 하는 게 아닐까? …… 정의의 실천을 마치 섹스하듯이 적나라하게 맨몸으로 미친 듯이 황홀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우리네 사는 모양이 이 꼴이 아닐까.” (345쪽)
이렇게 물성과 영성을 들락거리는 하느님이 우리의 심장 속으로 부활하여 우리는 이 잔인한 계절 4월의 고비를 야훼 하느님과의 황홀한 육감적 교류와 소통 속에 씩씩하게 넘어설 수 있을까. 하느님을 찬미하는 목소리는 곳곳에 무성하고 우렁찬데, 하느님의 뜻이 구체적으로 이 땅의 삶의 자리에 성육하지 못하는 까닭의 저변엔 필시 우리가 잘못 이해하거나 반쪽만 편리하게 취하여 왜곡해온 하느님 신앙의 병든 환부가 자리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 병증을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이 책은 반드시 읽어야 할 치유제이다. 실실 쪼개면서 독자들 눈치 보는 저자의 어지럽고 음흉스런 탐정화법도 독자들을 감질나게 하면서 가독성을 높여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널려놓은 질문들이 산만하게 흩어져 때로 길을 잃고 미로에 빠질 위험도 없지 않다. 아쉽게도 나는 그 미로를 벗어날 좋은 지도 한 장을 구비하지 못하고 있다. 좌충우돌 각자가 부대끼면서 어둠 속에서 무언가 물컹거리는 느낌의 ‘거시기’를 붙잡는다면 단단히 한 건 건진 거다. 눈을 떠야 할지, 감고 있어야 할지는 각자 알아서 하시길 바란다.
차정식
한일장신대학교 신학부 교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