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간음한 여인의 일화(요한 8,1~11)”
삶에는 좋은 일 궂은 일, 아주 다양하고 요상한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부대낌의 공동생활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나로서는 여전한 일상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것으로 인해서 갈등으로 문제화 될 때가 나타납니다. 내 삶의 내용이나 태도가 상대에 따라서 아니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니 본래 사람 형상이란 제각각이기 때문에 당연합니다.
그런데 내 형상은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지어졌기 때문에 나와 관련하여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세속인들은 사건이 발생하면 문제의 인과를 추적하고 책임을 따지는데 익숙합니다. 하느님께서 나와 너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 이들은 그 사건 안에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들으려고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러게요. 하느님의 뜻을 보려면 예수님께 배우면 좋지요. “심판과 복수심의 돌을 들고 가쁜 숨 몰아쉬며 씩씩거리지
말고, 먼저 호흡을 고르고 默靜하라. 다음에 자기 모습을 보라. 심판은 그 다음에도 늦지 않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 앞에서 땅에 앉아 묵묵히 무엇인가를 쓰고 계셨는데 아마도 사람 얼굴을 그렸을 것입니다. 바리사이들과 간음한 여인 모두 잠시 침묵 속에서 호흡을 고르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일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시오!”
돌을 들어 심판하려던 이들도 여인도 모두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간음한 여인과 그리스도(1565). 피테르 브뤼헐
“간음은 남녀가 하는 것인데 왜 저 여인만 끌고 와야 하지? 나도 남자인데 그런 책임에서 자유로운가?”
“언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어요.”
“그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시니 우리 없었던 일로 합시다. 그러나 다시 죄짓지 마시오!”
공동생활에서의 사건들이 일어나면 비로소 내가 누군가가 드러납니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고 살아왔던 드러나지 않은 내 모습이 드러납니다. 생에 도전받아 보지 못한 가족은 내가 누군지 알지 못합니다. 일이 터지고 사건이 발생함에서야 비로소 알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도 고집이 강하고 내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구나! 내게도 비겁한 모습이 있었구나! 내게 가족에 대한 편견과 편애와 차별적 감정이 있었구나! 또 배신감이란 이런 거구나! 내게 우월의식이 있었고 명예심과 지배의 욕구가 강했구나! 타인의 모습에 대해 습관적으로 지적하고 지시하고 비판하고 가르치고 살아왔던 내 안에 그 모든 것들이 있었구나. 다만 여태 아무도 건드리질 않아서 터지지 않았을 뿐!
사건에서 그 뜻을 보려면 평소에 기도하지 못했더라도 주님 앞에 나가 자기를 내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 시간이 늘어나게 됩니다. 어떤 이는 반대로 평소에는 기도를 하다가도 사건에 말리면 씩씩거리며 분개하며 보복심에 장작을 올립니다. 기도를 안합니다. 평소의 기도란 이런 때 기능하는 것인데 거꾸로 이니 참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내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 속에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보여주고 싶은 뜻이 있습니다. 믿음과 묵정과 의식성찰로 그것을 발견합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靈性입니다. 내가 공동체인의 영성으로 수행하고 있는가? 영성이란 무엇이고 수행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영성이란 사물의 이면에 있는 것을 보고, 내면의 소리를 듣고 사물을 초월하여 오는 영적 파동을 느낄 수 있는 감성’입니다. ‘수행이란 자기 성찰
능력’입니다.
오늘 그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거든 성질부리고 분개하고 적개심으로 증오하며 씩씩거리지 말고 호흡을 가다듬고 잠시 묵정 속에서 질문하세요. “무엇을 보라고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리고 마음을 열게 해주시라고, 그것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세요.*
기초공사 철근과 콘크리트가 지진에도 끄떡없을 것이다. 다만 돈이 많이 들어. (2014.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