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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수천년 이전에 하느님이 하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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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준의 고대 근동 신화의 풍경
5회 알파벳의 탄생



1. 들어가며
 지난 글까지 글자를 다루는 최초의 직업, 고대 근동의 서기관을 보았다. 이번에는 그들이 다룬 글자의 변천사를 간략히 들여다 볼 것이다. 흔히, 글자는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그릇을 만든 것은 결국 생각이다. 글자가 발전하는 변곡점마다, 우리는 생각이 얼마나 도약했는지 관찰할 수 있다.


2. 최초의 문자, 수메르의 물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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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우룩 등지에서 발견된 고대 수메르의 물표(token). 루브르 박물관 소장.© Marie-Lan Nguyen / Wikimedia Commons


 수메르의 서기관이 출현하기 이전에 이미 인류는 상당히 오랫동안 문자 생활을 시작했다. 최초의 문자는 점토로 만든, 1-3센티 정도 크기의 작은 물표(token)였다. [그림1]의 다양한 물표에 그려진 기호는 대개 가축의 숫자, 곡식이나 액체(술, 기름 등)의 단위와 양, 인간 노동력(남녀 노예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들은 재화나 노동력을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환’되는 증서의 역할도 했을 것이다. 교환의 목적은 다양하고 중층적이었을 것이다. 무릇 재화의 교환이란 순수한 경제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메르인들이 유통했던 이 물표에는 삶의 다양한 의도와 종교적 염원이 덕지덕지 묻어있을 것이다.
 물표는 본격적인 문자활동의 선단계(forerunner)로 볼 수 있고, 영수증과 문서와 화폐 등 모든 기록 문헌의 공통조상이라고 할 수 있다. 대략 기원전 8천년경 부터 이런 물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수메르 문명이 출현하여 본격적인 문자생활이 시작된 시기를 가늠해 보면, 물표는 거의 5천년간이나 지속된 시스템이다. 곧, 물표는 인류의 어떤 기록매체 보다도 오랜 세월 사용된 매체다. 이 물표에 기록된 원초적 문자는 직접적으로 수메르 문자의 조상이다.
 본디 물표는 원뿔, 접시형, 달걀형, 마름모꼴, 실린더형 등이 있는데, 그 표면에 기록되는 선과 기호 등의 종류가 시대가 지날 수록 다양해졌다. 그리고 후대로 갈 수록 물표 자체가 넓적해지는 변화를 보인다. 분명히 글자를 더 쉽고 더 많이 싣기 좋게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상당히 먼 거리의 도시국가들의 유적에서 거의 같은 형태의 물표와 똑같은 글자들이 출토된 것을 볼 때, 이런 물표를 제작하고 보관하고 유통하는 과정은 태초부터 분명 정치적 권력을 요구했음이 분명하다. 이 물표들이 이미 어엿한 ‘문헌’과 ‘서류’의 역할을 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참고로, 인류 최초의 문자가 가축이나 곡식 등의 양을 선과 기호 등 추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점은, 수학적 기호 그 자체가 얼마나 오래된 것이지 깨닫게 한다. 수학적 기호로 경제생활의 변화를 표현하고 기록하는 일은 상당히 유서깊은 일이었고, 태초부터 종교나 정치권력과 밀접했다.


3. 기호문자에서

 음절문자로 물표는 점차 넓적한 점토판으로 진화했다. 기원전 33세기경 메소포타미아 지역 도시들을 중심으로 점토판에 철필(stylus)로 쓰는 방법이 정착되었다. 이 때는 사물의 모양을 거의 그대로 그려 넣는 방법을 썼는데, 이를 기호문자(logogram)라고 부른다. 인류의 문자는 기호문자에서 음절문자(syllabary)로, 그리고 알파벳(alphabet)으로 발전했다. 이 각각의 발전 단계마다 인류는 큰 창의성을 실현했다. 

 기호문자에서 음절문자로 발전하는 단계는, ‘물’을 뜻하는 쐐기문자 ‘아’[a]의 변천사에서 대략적으로 볼 수 있다. [그림2]의 왼쪽부터 첫째 글자와 둘재 글자는 가장 오래된 형태로서, 물이 흐르는 모양을 그대로 묘사했다. 물이 흐르는 방향도 문헌마다 제각각이다. 이 글자를 맨 오른쪽의 한문과 비교해 보자. 기호문자는 일종의 표의문자(ideograph)임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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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2: 쐐기문자의 발전과 한문의 비교 


 이어서 왼쪽에서 세번째 글짜는 기원전 2500-2350년경의 토판에 드러난 쐐기문자 형태다. 네 번째 글짜는 세 번째 글자와 거의 같은 시기에 나온 것인데, 토판이 아니라 돌이나 쇠에 새겼기 때문에 ‘쐐기’의 머리와 꼬리가 확실히 드러나지 않았다(이 때문에 고대의 원초적 형태와 거의 같아 보인다). 그 옆으로 기원전 2350-2000년 경의 문자 두 개가(다섯째와 여섯째) 있는데, 이 당시는 이미 이 글자의 형태가 고정되었다. 그 오른쪽의 일곱째와 여덟째 글자는 2000-1000년대의 형태인데,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이 글자는 후대에도 ‘물’이라는 의미를 잃지 않았지만, 사람의 가장 원초적 모음인 ‘아’[a]를 표현하는데 무척 자주 쓰였다.
 이 글자는 뜻으로 ‘물’로 읽을 수도 있지만, 그저 음절로 ‘아’(a)로 읽을 수 있었다. 이렇게 음절로만 읽는 용법은 외국 고유명사 표기라든지 특별한 문법적 특징을 표시하기 위해서 쓰였다. 본디 뜻글자(ideograph)를 의미(idea)에서 분리하여 이렇게 단순한 음절로만 사용한 것은 언어생활의 큰 도약이었다. 의미에 따라 새로운 글자를 계속 만들어 내기보다 단순한 ‘음절 맞추기’를 통해 새로운 낱말을 무한히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완전한 음절문자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찌보면 이 단계의 쐐기문자는 현대 일본어 문자와 비슷할 것이다. 어떤 한자는 음으로 읽고(오도꾸, 音讀), 어떤 한자는 뜻으로 읽는데(쿤도꾸, 訓讀), 이따금 음절만을 표시하는 글자도(가나) 있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그림3]은 역시 수메르어로 하늘, 또는 하늘신 ‘안’(dAN)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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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자는 일종의 상형문자다. 저 멀리 아득하고 먼 하늘을 형상화한 것이다. 마치 인간의 시선 너머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의 소실점을 묘사한 듯하다. 수메르어 문자는 쐐기문자 발전사에서 가장 오래된 형태로, 중국의 갑골문자처럼 사물의 모습을 본 뜬 문자들이 많다.
그런데 이 문자를 ‘딩기르’(dingir)라고 읽으면 ‘신’(神)을 의미한다. 이 문자는 단수로 쓰이는데, 두 번 겹쳐 쓰면 ‘신들’이라는 뜻이다. 이 글자 자체가 특정한 이름 앞에서 ‘신의 이름’을 알려 주는 표지(‘한정사’)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수메르어 문자는 한 글자를 두세 가지 방법으로 읽을 수 있다. 이 문자는 하늘을 뜻하는 최초의 문자이자 신을 뜻하는 최초의 문자다. 인류 최초의 문명은 ‘신은 하늘’이라고 고백했다.

   - 졸저, 『구약성경과 신들』(2012) 34쪽

 

 수메르어는 이렇게 한 글자가 뜻과 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치 한자를 익히듯이 공부할 수 있다. 천자문을 배울 때 ‘하늘 천, 따 지’ 하듯이, 이 글자를 ‘하늘 안’ 하는 식으로 외울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한국인을 위한 초급용 수메르어 천자문’ 같은 것을 만들면 어떨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무릇 학문이 뿌리 내리려면 그 학습 ‘방법’도 함께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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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4: 아카드어 ‘아누’ © 주원준


 수메르 문명이 지고 아카드 문명이 들어서는 복잡한 역사는 생략하겠다. 아카드어 쐐기문자는 한마디로 수메르어를 글자를 발전시켜 더욱 간편하게 양식화한 것이다. [그림4]의 글자는 아카드어로 ‘하늘’ 뜻하는데, 이 글자를 ‘아누’(’anu)로 읽을 수도 있고, 아카드어로 ‘샤무’(šamû)로 읽을 수도 있다. 물론 그저 음절문자로 읽을 수도 있다.


4. 요충지에서 탄생한 두 가지 알파벳
 고대 근동 문명의 두 축인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모두 풍요로운 삼각주를 보유하였고, 고유한 문자체계를 바탕으로 독자적 문화를 향유했다. 지난 글에서 거듭 언급했듯이, 두 지역에서 사용한 매체(media)가 근본적으로 차이났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점토판에 철필로 꾹꾹 눌러 쓰는 쐐기문자를, 이집트에서는 파피루스 종이 위에 선을 그리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반면에 이 두 지역 문자의 공통점도 있었으니, 글자 수가 많고 익히기가 비교적 까다롭다는 것이다.  
 지중해의 동부 해변가, 곧 레반트 지역은 땅이 협소하고 산물이 풍부하지 못해 많은 인구를 거느릴 수 없었다. 역사상 대제국을 배출한 적이 없고, 애초부터 교역에 큰 비중을 둘 수 밖에 없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가 균형을 이루거나 각자 내분이 일어나 약체일 때, 레반트 지역의 도시국가들은 교역으로 번영하였다. 하지만 어느 한 쪽이 확장할 때, 레반트 지역은 제일 먼저 선점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의 운명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레반트 지역에서는 실용적이고 간편한 문자를 발전시켰다. 특이하게도 두 문자 체계를 모두 알파벳으로 발전시켰다. 도시국가 우가릿인들은 쐐기문자 계열의 알파벳을, 해상 교역을 주름잡던 페니키아인들은 선형문자 계열의 알파벳을 발전시켰다. 우가릿인들은 자신들의 바알 신화를 쐐기문자 알파벳으로 남겼고, 이스라엘인들은 선형문자 계열의 알파벳으로 자신들의 야훼 신앙을 기록하였다.


5. 원시나이 문자에서 페니키아 문자로
 가장 오래된 선형문자 알파벳은 시나이 반도 남서쪽의 ‘세라빗 엘-카딤’(Serabit el-Khadim) 고원에 위치한 하토르(Hathor) 신전에서 발견된 스핑크스 상에 새겨져 있다. 기원전 1700년경 문자로 추정되는 이 문자를 시나이 반도에서 발견되었다 하여 ‘원原시나이’(Proto-Sinaitic) 문자라고도 하고, 가장 오래된 셈어 문자라고 하여 ‘원原셈어’(Proto-semitic) 알파벳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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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5: 세라빗 엘 카딤에 위치한 하토르 신전의 모습 © E. Gass
 
 세라빗 엘 카딤의 하토르 신전은 [그림5]에서 보듯, 높은 고원에 자리잡고 있다. 변변한 도로도 없고 상당히 오랫동안 척박한 바위산을 올라야 하기 때문에 지금도 찾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솔직히 말해 찾아 올라가는 일 자체가 고역이다. 이런 천혜의 조건 때문에 오랜 세월 이 신전이 보존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잠시 여담을 하나 보태야되겠다. 2004년에 독일 대학의 학술답사단과 함께 뙤악볕에 이 바위산을 오르며, 내가 시나이 반도 출신이라면 최초의 알파벳을 만든 이의 후손으로서 큰 자부심을 지녔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비단 알파벳 뿐이랴. 고대 근동 문명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문명이다. 이집트는 그 중에서도 찬란한 정점이었다. 독일어를 유창하게 하는 이집트인 가이드는 알고보니 독일에서 박사 공부를 한 사람이었다. 그는 무척 겸손한 성품이었는데, 조국의 현실을 부끄러워했지만(무바라크 시절이었다), 자신의 문화적 자긍심을 알아주는 한국인 학생의 두 손을 꼭 쥐며 무척 고마워했다. 부디 한국의 다양한 순례객들이 이들의 상처난 마음을 자극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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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6: 세라빗 엘 카딤에 위치한 하토르 신전 입구 © 주원준

 하토르 여신은 사랑과 기쁨의 여신이고,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다. 이 신전에서 발견된 스핑스크는 현재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있는데, 그 표면에 [그림7]과 같은 세 무리의 글자들이 있으니, 모두 같은 뜻으로서 “l b‘lt”, 곧 “바알라트님께” 라는 의미다. ‘바알라트’는 ‘바알’의 여성형으로 ‘여신’ 또는 ‘여주인님’의 뜻이니, 이는 하토르여신을 의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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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7: 하토르 신전에서 발견된 문자열


 이 문자에 대해 조금 자세히 들여다 보자. 원시나이 문자는 일종의 ‘그래피티’(graffiti)로서, 사물의 형사을 본딴 것이 많다. 원초적 그림문자(pictograph)라고 할 수 있는데, 지리적으로 가깝고, 문화적으로도 친근한 이집트의 신성문자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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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원셈어의 알푸주원준그림8-1.jpg

 

 이 문자들 가운데 [그림8]처럼 암소의 머리 모양을 묘사한 글자가 있다. 원셈어에서 암소는 ‘알푸’(’alpu)라고 하기에 이 글자를 알푸라고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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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원셈어의 비투 주원준그림9-2.jpg
  


 한편 [그림9]처럼 네모 칸 같은 문자가 있다. 집을 형상화한 것으로 원셈어로 ‘집’ ‘비투’(bītu)라고 하므로, 이 글자를 비투라고 읽는다(히브리어

베트에 해당한다). 그림에서 보듯, 이 문자는 비교적 변형이 심한 편이다.


6. 본격적인 알파벳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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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시나이 문자는 페니키아 문자로 계승된다. 알푸는 페니키아어(또는 고대 가나안어) 계통의 문헌에서 [그림10]처럼 변한다. 대체로 점점 단순하고 쓰기 쉽게 정형화되는 것이다. 점점 소의 머리 모양을 연상하기는 힘들어지겠지만, 원시나이 문자가 간략화되는 과정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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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1]처럼 비투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알푸나 비투나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변형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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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대가 지남에 따라 모든 글자가 [그림12]와 [그림13]처럼  정형화되는 단계를 밟는다. 결국 알파벳의 모든 글자들이 두세획으로 그릴 수 있게  고정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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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리스 알파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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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4: 그리스어 알파


 지중해 전역에서 활동한 페니키아인의 문자는 지중해 지역의 문자 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고대 그리스어 문자 체계에도 여기서 시작되었다. 페니키아어에서 양식화된 알푸 글자를 시계방향으로 90도 돌리면 [그림14]처럼 그리스어 문자의 첫글자 ‘알파’의 대문자가 된다. 또한 그리스어 소문자 알파는 페니키아 문자가 양식화 되기 이전의 형태와 더 닮았다.
 유럽 문명의 뿌리인 고대 그리스어 문자는 이렇게 셈어에서 나왔다. 이 점은 고대 근동어학계에서는 널리 알려지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아직 일반인들에게는 낯설지도 모른다. 아래의 두 가지 점을 생각해 보면, ‘셈어 문자의 계승’을 조금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고대 그리스어 문자의 이름이다. 그리스어 문자의 이름 ‘알파’와 ‘베타’는 원셈어 알파벳의 ‘알푸’와 ‘비투’에서 나왔다. 이 어미모음 '-아’(-a)는 그리스어 글자들에 흔하게 붙는다(베타, 감마, 에타 등을 떠올려 보라).
 둘째 근거는 문자의 순서다. 이미 고대 그리스에서 이 글자를 ‘알파-베타’순으로 가르쳤다. 이 글자 순서는 라틴어에 전승되었고, 서유럽 알파벳에 뿌리내렸다. 그래서 오늘날 거의 모든 유럽어의 글자 순서가 이를 따른다. 그런데 이 ‘알파-베타’ 순서는 이미 원셈어에 확립되어 있었다. 아래의 [그림15]에서 보듯, 쐐기문자 계열의 알파벳인 우가릿어 글자 순서도 이 ‘알파-베타’ 순서를 따른다.
 고대 그리스 알파벳이 셈어 글자의 모양과 순서 등을 대폭 수용했다고 해서 그리스 문명이 셈족 문명의 아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셈어와 근본적으로 다른 인도-유럽어의 독특함을 표현하기 위해서 상당한 변형도 이루어 내었다. 여기서 보듯, 글자의 방향이 바뀌거나 형태를 대폭 손질한 것도 있고, 아예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그리스인들도 인류사의 거의 모든 독창성이 나온 ‘흔한 방식’, 곧 ‘주체적 수용’을 통해 거대한 창의성을 이루어낸 것이다.
 잠시 두 번째 여담을 하나 하고 넘어가자. 그리스도교의 성경은 셈어(구약성경)와 그리스어(신약성경)로 쓰였다. 그런데 두 글자가 이렇게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으니, 초급 단계에서 두 언어의 알파벳을 익힐 때, 그 모양의 변천사 등을 함께 가르치면 더 재밌지 않을까? 이해와 암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게다가 성경의 언어가 이런 배경을 지니고 있음을 초급 단계에서 알게 되면, 자연히 성경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문서가 아니라, 인류의 오래되고 진한 체험이 농축된 문헌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줄 것이다. 이는 단순한 공상이 아니다. 이미 그런 초급용 교재가 독일에는 나와 있다. 글자의 모양을 중심으로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의 대응관계를 한 글자씩 꼼꼼히 알려주는 이런 교재는 어린 신학도들에게 초급 단계에서 성경의 문화적/역사적 맥락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기에, 필자도 즐겨 사용한다.

J. Kramer, S. Kowalik, Einführung in die hebräische Schrift (2006, Hamburg)


8. 우가릿의 쐐기문자 알파벳
 선형문자 알파벳이 이런 발전을 이뤄가던 시대에, 레반트의 한쪽 구석 우가릿에서는 쐐기문자 알파벳이 자라나고 있었다. 현대의 시리아의 지중해변 항구도시인 고대 우가릿은 이스라엘에서 멀지도 않고, 바알신화와 구약성경의 수많은 병행구를 볼 때, 예루살렘은 분명 우가릿을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가릿어 쐐기문자로 쓰인 토판 가운데, 이른바 ‘알파벳 토판’(abecedarium)이란 것이 있다. 희한하게도 우가릿어 알파벳의 첫글자에서  마지막 글자까지 딱 한 번씩만 쓴 토판이다. 흥미를 끄는 것은 알파벳의 순서다. 이 순서는 ‘알파-베타’ 순서를 따르며, 현대 유럽어의 ‘ABC...’ 순서와 거의 같다. 이 글자의 순서는 우가릿에서 발명된 것이 아니라 더 오래된 전승에 기반한 것이다.
 사실 ‘알파벳’(alphabet)이라는 낱말 자체가 ‘알파-베타’ 순서로 시작되는 문자열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한글’이란 이름이 확립되기 전에, 우리 글을 ‘가가거겨’로 일컬었던 경험을 떠올리면 이 이름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저 글자를 순서대로 나열한 토판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학자들은 이런 토판이 알파벳 교육용 토판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학교에서 글자를 익히던 토판이었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히브리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기 이전에 이미 학생들은 ‘ABC...’ 순서로 알파벳을 외고 있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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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5: 우가릿어 알파벳 © 주원준


[그림15]는 현대의 우가릿어 교재에서 사용하는, 이른바 ‘표준 서체’를 정리한 것이다. 한편 우리말로 우가릿어를 배울 수 있는 교재와 사전이 있다. 히브리어나 셈어에 익숙한 독자라면 한 두달 만에 바알 신화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우가릿어 문법』(한님성서연구소 2010): J. Tropper, Ugaritisch Kurzgefasste Grammatik mit Ubungstexten und Glossar, ELO 1, Münster, 2002.
『우가릿어 사전』(한님성서연구소 2010): J. Tropper, Ugaritic Lexicon


9. 아람 문자를 거쳐 히브리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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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6: 아람 문자 알푸

 한편 원셈어의 알푸 문자(그림10, 그림12)는 고대 가나안어나 페니키아어와는 달리, 아람어 계통에서는 [그림16]처럼 모양이 약간 바뀐다. 구약성경 시대에 이스라엘인들은 아람인들과 이웃이었지만, 이 문자를 즐겨 사용하지는 않고, 위에서 본 페니키아어 계열의 문자를 더 널리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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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7: 쿰란의 알레프

 그러나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가 고대 근동을 통일하자 아람어가 고대 근동의 국제 통용어(lingua franca)가 되었고, 히브리어는 이제 구어로서 역할을 다했다. 이런 상황에서 문헌으로 전하는 글자의 형태가 아람어의 스타일로 바뀐다. [그림17]은 쿰란 문서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문자로서, 이미 상당히 아람어화가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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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8: 히브리어 알레프

 이렇게 아람어화된 히브리어 문자는 고대와 중세를 거쳐 현대 현대 히브리어에 이르게 된다. [그림18]은 현대에 널리 사용되는 히브리어 문자다. 아람어 문자 계열에서 진화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자의 이름은 ‘알레프’이고, 히브리어로 그 뜻은 ‘암소’다.


10. 나가며
 알파벳의 탄생은 인류 문화사에 혁신적 사건이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와 이집트의 신성문자를 자유자재로 쓰려면 고도의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알파벳은 서른개가 안되는 글자만 외우면 되었다. 문자생활이 퍽 쉬워졌고, 더 많은 사람이 문자생활에 참여할 수 있었다. 단순한 글자는 추상적인 생각을 기록하고 널리 전파하는 일을 도왔다.
 히브리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인류는 이미 알파벳을 사용했다. 가장 쉽고 단순한 글자로 깊은  체험과 고백을 기록하는 고도의 문화를 발전시켜 놓았다. 인문학적 눈으로 보면, 알파벳의 탄생은 구약성경 탄생의 결정적 전제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신학적 눈으로 보면, 하느님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가난한 백성을 해방시키기 이전에도 이미 인류를 보살피고 계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 이전에 수천년 이상의 ‘준비기’가 존재한 것이다. 준비기를 모르고 그 결과물을 어찌 잘 알 수 있으랴.



글을 마치며 두 가지 말씀을 덧붙이고 싶다. 우선 그동안 연재가 지지부진해서 죄송하다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 둘째, 이 글은 <제11차 한민족국제학술대회>(세계사이버대학과 한민학교 주최. 2012년 5월 5일)에 발표한 필자의 논문 “고대 근동어로서 히브리어 - 알파벳, 특징, 그리고 친족어”의 원고 일부를 대중적으로 쉽게 풀어쓴 것이다. 각주, 참고문헌, 전문적 설명 등을 일부 덜어냈고, 그림과 보충설명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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