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의 인생 1막
*가정폭력을 겪는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도희야> 중에서
내 이름은 이현지. 나이는 현재 18세다.
나는 사람을 진심으로 대한 적이 없다. 지금까지 학교에서 만난 선생님, 친구들에게 계속 나를 감추며 살았다. 학교를 졸업하면 그것으로 끝나고 우린 안 볼 사이, 평생 나랑 상관없이 살 사람들. 이제부터 난 나를 모르는 사람을 만나야지 했다. 하지만 그 사람들한테도 나는 여전히 진실을 보여주는 게 너무 쪽팔리고 너무 내가 작아 보여서 계속 나를 그럴듯하게 포장했다. 아, 우리 엄마 아빠는 이렇고 그렇고 하면서……. 그게 들통 났을 때는 정말 어디라도 숨고 싶고, 죽고 싶고 창피해서 누굴 만나기도 싫었다.
오늘은 진짜 나를 말하고 싶다. 이렇게 내가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 가족은 엄마, 아빠, 나, 오빠 네 식구였다. 부모님은 내가 여덟 살 때 이혼했다.
아빠는 알코올 중독에 정신질병으로 약을 복용해야 했는데 하지 않았다. 평생 직업도 없었고 주변에 친구도 없었다. 어쩌면 많이 외로웠는지도 모른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우리 집은 사슴 농장을 했다. 사슴을 130마리나 키웠다. 할아버지가 마련해 준 것이다. 엄마가 계실 적에는 넓은 우리 집에서 동네잔치도 하고 사람들도 많이 몰려왔다. 아빠는 그 농장을 술로 다 망해 먹었다. 할아버지는 또 땅을 사서 아버지에게 인삼밭을 해 보라고 했으나 마찬가지로 술로 말아 먹었다.
내가 갓난아이 때 땅에만 내려놓으면 우니까 엄마가 늘 안고 다녔단다. 조금 커서는 방글 웃기도 잘 하고 자주 울었다고 한다. 기억나지 않지만 항상 강하고 웃음도 별로 없었던 아빠는 내가 우는 모습이 꼴보기 싫다며 울 때마다 때렸다고 한다. 나는 점점 친구들이 다 웃어도 혼자서만 웃지 않는 아이, 표정이 어둡고 감정이 메마른 아이가 되었다.
아빠에게 맞았던 첫 기억은 초등학교 1학년 때다. 저녁밥을 먹다가 급체를 해서 화장실에 달려가 먹은 음식을 다 토했다. 그때 우는 나를 아빠가 엄청 때렸다. 아이에게 그러지 말라고 말리는 엄마도 때렸다. 그날, 엄마와 나는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아빠에게 엄청 맞았다. 어느 때는 아빠를 피해 엄마가 오빠와 나를 데리고 집 뒤에 있는 산에 숨어 있던 적도 많았다. 그래도 엄마가 집에 있을 때는 나를 품어주어서 괜찮았는데 엄마가 떠나니 따뜻하게 해 준 사람이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우리는 여주에서도 한참 들어가는 시골에서 살았다. 어느 날 아빠는 검은 봉지 안에서 주사기 세 개를 꺼내어 나랑 오빠한테 들이대면서
“누가 먼저 맞을래.”
하면서 핸드폰을 내 앞에 던졌다.
“빨리 할아버지에게 전화해. 우리 식구 다 죽어버린다고.”
나는 흐느껴 울면서 떨리는 손가락으로 폰 번호를 간신히 눌렀다.
“할아버지, 우리 식구 다 죽어요.”
전화를 받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오셨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 주사를 맞으면 온 몸에 신경이 다 죽는다고 했다. 아빠는 그날 할아버지 앞에서 신문지에 불을 붙였다. 집을 불태우겠다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간신히 할아버지가 그 불을 껐다. 그런 아빠의 행동은 할아버지에게 뭔가 또 내놓으라는 의도였다. 보다 못한 할아버지는 아빠에게 편의점을 차려 주었다. 그러나 아빠는 장사를 한 게 아니라 편의점에 있는 술을 다 마시고 돌아다녔다.
*영화 <도희야> 중에서
할아버지는 마지막 결단을 내렸다. 나랑 오빠 둘을 차라리 고아원에 보내자고. 며칠 후 낯선 차가 우리 집 앞까지 왔었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할아버지에게 아이들을 보낼 것이면 확실하게 결단을 내리시라고 딱 잘라 얘기하시라 했다. 그 사이 할아버지는 마음이 변하여 아이들 나이가 두 세 살 된 것도 아니고 저렇게 다 컸는데 나중에 자기들을 버렸다고 기억하지 않겠느냐 하면서 그냥 그들을 돌려보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엄마 없는 집안에서 나는 딸이 아니라 가정부라고 느낄 만큼 집안 일만 했고 아빠의 심부름꾼이었다. 또 오빠와 나는 감히 다가갈 수 없을 만큼 어렵고 무서운 아빠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했다. 잠든 아빠가 행여나 깰까봐 까치발을 들고 다녀야 했다. 만약 아빠가 깨는 날은 죽도록 맞았다. 사소한 일에도 크게 윽박지르고 때리지 않는 적이 없었다. 나는 자기 전에 침대 위에서 소리 없이 울기도 많이 했다. 그러다 중학교 1학년 말에 전학을 가게 되었는데 그곳은 어릴 적 살던 시골동네와는 아이들도 학교생활도 너무나 달랐다. 도시 얘들이라 그런지 불량스러운 아이들이 많았다. 난 그 얘들과 어울리면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남의 돈도 뜯고 애들 때리고 다니면서 패거리를 만들어 학교 내에서 감히 나를 누가 건들이지도 못하게 겁을 주곤 했다. 폭력적인 아빠에게 시달렸던 나는, 그렇게 닮고 싶지 않았던 아빠의 폭력을 그대로 닮아 아이들을 때리고 있었다. 일부러 싸우려고 욕하고, 내가 이 애랑 싸우면 내가 이기겠네? 감이 잡히면 만만하게 보고 바로 폭력을 썼다. 남은 무시하고 깎아 내리면서 나는 높였다. 학업엔 관심이 없었다. 수업 시간 때는 아예 들어가기조차 안했다.
아버지는 날이 갈수록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어느 날 술에 취해 새벽에 들어오신 아빠는 나를 무섭게 쳐다보더니 내가 엄마를 많이 닮았다며 내 머리채를 잡아끌어 벽에 세워 놓고 나무방망이로 사정없이 머리를 내리쳤다. 다음 날 나는 도망치듯 짐을 다 싸가지고 집을 나와 학교에 갔다. 피멍이 든 내 얼굴을 보신 선생님은 아동 보호기관으로 연결하여 나를 쉼터로 보내주었다. 15살 그때부터 나는 집 없는 떠돌이 생활을 이어왔다. 무려 2년 동안이나.
따뜻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나는 타인의 친절이나 칭찬에도 늘 빗나가고 엇나갔다.
“현지 너 옷 참 이쁘다.”
“근데 어쩌라고? 시발 샘나 샘나.”
“너 성격 고칠 필요가 있어.”
“니가 뭔데 나한테 지적질이야.”
나중에는 아이들이 다 떠났다. 쉼터에서도 한 곳에 오래 있지 못하고 지역별로 안 가본 곳이 없다. 한 곳에 못 있었던 것은 여러 사람과 지내는 게 불편하고 규칙도 안 지키고 쉼터에서도 맘에 안 들면 아이들 때리고 시비도 많이 붙고……. 그렇게 나는 분노했다. 학교는 결석으로 유예되었다.
나는 세상이 싫고 모든 사람이 싫었다. 내가 뭘 못해도 항상 환경 탓 주변 사람 탓으로 돌렸다. 내가 환경만 이러지 않았어도 이런 일 없었을 거야. 내가 이렇게 삐뚤어진 것은 다 엄마, 아빠 때문이야. 아빠가 날 잘 돌봐줬으면 내가 혼자 있지 않았겠고, 혼자 있지 않았으면 나쁜 친구들이랑 어울리지도 않았을 거 아니야 했다. 법원에서 나에게 5-6호 처분 재판이 내려졌을 때도 내가 왜 이런 걸 받아야 해. 내가 뭘 잘못했길래. 재판 받을 만큼 잘못한 게 뭔데. 억울했다. 그래서 울었다.
이렇게 나의 과거를 늘어놓는 것은 예전과는 달리 솔직하게 변한 나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때는 철이 없어 몰랐는데 그때는 그게 도움인 줄 몰랐는데, 고비 고비를 넘어 갈 적마다 나를 살려주던 분들이 있었다는 걸 이제 알았다.
15살 때의 일이다. 학교는 가야 하는데 교통비가 없었다. 나는 그날 아침 지름길로 간다 해도 학교까지 2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담임선생님이 나를 발견하고선 당신 차를 태워주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그랬다. 아들이 한 명 있는 여자 담임선생님은 조그만 반찬통에 진미채, 볶은 김치, 햄 볶음, 어묵볶음, 고기볶음, 계란말이 등을 담아 나에게 자주 건넸다. 그 반찬들은 내 입맛에 꼭 맞았다. 아침이면 선생님은 나를 깨우러 오셨다. 그때 내 생각은 나는 선생님이 이렇게 도와주시니까 앞으로 열심히 살아야 되겠다가 아니었다. 선생님이 나에게 반찬도 주고 그러네? 앞으로 아부 더 떨어서 반찬도 더 얻어먹고 용돈도 받아야지? 이랬다. 또 선생님이 이래 봤자지 뭐. 나 학교 끝나면 선생님도 안 볼 건데 뭐,하고 넘겼다.
또 생각나는 분이 있다. 그때가 언제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으나 아빠가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당시였다. 아빠는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폭력으로 경찰서와 교도소, 정신병원을 들락날락거렸다. 그날 교도소에 있던 아빠가 집행유예로 갑자기 나온 것이다. 집 안에서 놀고 있는데 벨이 울리고 현관 인터폰에 아빠 얼굴이 찍힌 것이다. 나는 순간 가슴이 무너진 줄 알았다. 문을 열고 들이닥친 아빠는 나를 보자마자 죽일 듯이 때렸다. 나는 맞으면서 신발도 못 신고 맨발로 옥상으로 도망쳤다. 밖으로 뛰쳐나가면 아빠가 차로 쫓아오고 나는 금방 잡힐 거였다. 빌라 옥상 위에서 나는 살려주세요,살려주세요,하고 무조건 외쳤다. 주변에 살던 빌라 사람들은 우리 집 상황을 다 알았다. 그때 4층 아줌마가 이불을 널러 나왔다가 나를 보았다. 그분은 자기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밥을 먹이고 경찰에 신고를 하여 보호 기관에 연결시켜 주었다. 그 아줌마는 나에게 자기 딸 옷을 입히고 신발도 챙겨주었다. 보호기관에 간 후에도 나에게 전화도 해주고 용돈도 챙겨주었다. 문제집도 사다주고 교과서도 갖다 주고 그랬는데 나는 노는 데에 빠져 고마움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동네 경찰의 도움을 받는 도희. 영화 <도희야> 중에서
15살부터 아빠만이 아니라 그 딸인 나도 동네 파출소를 수시로 들락거렸다. 어느 날이었다. 아이들과 크게 사고를 쳐서 경찰서에 붙잡혔다. 주소를 대라고 해서 말했더니
“아, 너 그 202호 이규영씨 딸이냐?”
하고 물었다. 나는
“맞는데요.”
하면서 아빠한테 절대 말하지 말아 달라 사정했다. 그런데 나랑 사이가 안 좋은 오빠가 내가 파출소에 들어간 걸 보고 아빠한테 일러바친 것이다. 아빠는 진짜 이만한 나무 방망이를 들고 나타났는데 파출소를 부술 기세였다. 경찰관들은 파출소 문을 걸어 잠그고 나를 급히 화장실에 숨겼다.
아빠는 저녁 늦게까지 파출소 주위를 계속 맴돌았다. 경찰관 아저씨들은 경찰차에 나를 태워 그 인근에 있는 찜질방에 보내어 그곳에서 잠을 자게 했다. 다음날 아침에는 나를 다시 차에 태워 보호기관으로 가게 해주었다.
교회 도움도 많이 받았다. 여름 성경학교를 다녔는데 배고프면 교회에서 점심을 먹었다. 목사님도 우리 집에 찾아오시곤 했다.
아, 고마운 친구가 한 명 있다. 이름은 고은정. 나에게 진정한 친구는 은정이 뿐이 없는 것 같다. 안 본지가 꽤 오래 되었다. 그 얘도 나랑 같이 어울려 다녔던 아이들 중의 한 명이었는데 유일하게 술 담배를 안 했다. 그런데 내가 참 나쁜 게 담배를 그 애와 같이 피우고 싶어서 나는 그 애 입에 억지로 담배를 물리고 술도 권했다. 하지만 은정이는 절대 안 했다. 가출도 한 적이 있었는데 며칠 만에 들어가서 그 후로는 한 번도 안 했다. 나중에 집안 사정을 알고 보니 할머니 할아버지랑 같이 살아서 그런지 마음이 참 여리고 착하고 성숙한 아이였다.
은정이는 내가 시골에서 경기도 광주로 전학을 와서 처음 만난 나와 같은 학급 친구였다. 나는 은정이에게 정말 처음으로 우리 집 얘기를 했는데 친구는 진심으로 마음 아파했다. 딱 한 번 은정이가 우리 집에 놀러왔는데 하필 그날 아빠가 들어오신 것이다. 소에 아빠는 술을 마시러 나가면 한 2~3일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날 아침에 학교 갈 때 즈음 아빠가 말했다.
“아빠, 오늘 안 들어온다.”
“왜요?”
“아빠 술 마시러 간다.”
나는 속으로 무척 기뻤다. ‘아, 그럼 오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 은정이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놀아야지?’ 해서 데리고 왔는데 갑자기 아빠가 나타난 것이다. 아빠가 집에 들어오시면 오빠와 나는 반드시 인사를 해야 했다. 안 하면 맞았다.
“아빠 오셨어요. 쉬셔야죠.”
아빠가 방에 들어가신 다음에는
“아빠, 문 닫아 드릴게요.”
하고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아 드린 나는 친구 신발을 일단 숨기고 은정이를 책상 밑으로 숨게 했다. 이때 건너 방에서 아빠가 내 이름을 크게 불렀다.
“이현지-.”
나는 언제나 아빠 방을 깨끗이 치워 놔야 했다. 그런데 재떨이 비우는 걸 그만 잊고 말았던 거였다. 이제 날 아빠가 때릴 것은 분명한데 친한 친구 앞에서 맞는다는 게 너무나 자존심이 상했다. 친구를 보내긴 해야 하는데 그럴 상황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방에서 나온 아빠는 욕을 하면서 나를 계속 때렸는데 친구 은정이가 나와서 말렸다.
“아저씨 그러지 마세요.”
“누구야 넌, 어디서 나왔어. 뭐 이런 년이.”
“현지 친구에요.”
아빠는 말리는 은정이도 때렸다. 나는 친구에게 감동했다. 자기 집에 그냥 가 버릴 수도 있었는데, 자기가 맞을 상황인데도 나를 말려 주었다. 엄청 고마웠다. 집으로 돌아간 은정이는 자기 할머니에게 내 얘기를 했고 할머니는 아빠가 충동적으로 때릴 적마다 자기 집으로 오라 했다. 그 후 은정이 집으로 도망 간 적도 많다. 내 친구 은정이. 센터 들어오기 전까지 연락했다. 지금은 의정부에서 미용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다. 아직도 여전히 착하다.
나는 센터 아이들에게서도 정말 감동을 받았다. 처음 센터에 왔을 때 아이들이 다가와도 나는 위아래로 훑고, 씹고, 정도 주기 싫었다. 어느 날 선생님께 난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나갈 때까지 마스크 쓰고 모자 쓰고 살고 싶다고. 여기 사람들이랑 눈도 마주치기 싫고 사람냄새도 맡기 싫다고. 한 달 동안 그렇게 살았다. 내가 계속 매번 차갑게 했는데도 센터 아이들은 현지야! 현지야! 하면서 한결같이 나에게 문을 두드렸다. 나처럼 그 아이들도 밖에서 한가락들 다 했었고, 나처럼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사람들을 차갑게 대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사랑받고 존중받고 있다는 체험을 하고 난 후 자신이 사랑 받은 만큼 나에게 애쓰는 것이었다. 그것이 감동이었다. 소년원 같으면 첫 입소자를 ‘족당’이라고 하면서 신발장 정리시킨다. 빨래도 시키고 간식도 뺏어먹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는 나를 위한 수호천사까지 배당되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치고 박고 싸우는 아이들이 센터에도 있다.
선생님들이 현주야, 적응이 되니? 물으면 초점 없는 눈으로 쳐다보고 창밖만 바라봤다. 나는 이런 센터 선생님과 아이들을 어떻게 대할 지 서툴렀고 싸울까봐 겁이 났다. 내 성격대로 막 소리를 지르고 주변 물건 다 던지고 욕부터 하고 심하면 화를 못 이겨 내 몸을 학대하는 내 성격이 나오는 게 싫어 그런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 그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