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보다 사람이 되고 싶었던 ‘판자촌 예수’
*1995년 충북 괴산군 삼송리 솔뫼농장에서 열린 환갑잔칫날 정일우(가운데) 신부가 공동체 식구들과 춤을 추며 놀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가신이의 발자취
‘빈민의 대부’ 정일우 신부
지난 2일 저녁, 정일우(미국 이름 존 데일리) 신부님께서 갑자기 상체를 조금 일으키셨다. 눈을 크게 뜨시며, 무엇인가 말씀하시려는 듯 안간힘을 쓰셨다. 그렇게 신부님은 반세기가 넘는 이땅에서의 삶을 마감하셨다. 신부님은 무엇을 말씀하려 하셨을까?
“죽기 전에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은 아니었을까. 1973년 천주교 예수회 신부로 건너와 청계천 판자촌에 들어간 이후, 도시빈민들과 함께 18년을 동고동락한 당신. 사람들은 그를 ‘도시빈민의 대부’로 부르곤 하지만, 막상 본인은 속으로 웃고 마셨다, 한 일이 없다며, 그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지내며, 함께 ‘노는’ 것이었다면서. 하지만 아무일도 하지 않았는데도, 신부님이 있는 곳에서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양평동 판자촌 주민들을 시작으로 77년부터 85년까지 소래 신천리 벌판에 ‘복음자리마을’(202가구), ‘한독마을’(164가구), ‘목화마을’(105가구)이 생겼다. 천주교도시빈민회와 도시빈민사목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신부님은 예수회원으로서 누구보다도 예수를 닮고자 하셨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고 싶어 생겨난 존재인 예수는 또한 인간이 되는 길이기도 하다. 하여, 신부님은 사람이 되는 길이 바로 예수께서 함께 하셨던 ‘가난뱅이, 민중, 일반 사람들’의 삶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 순간이 바로 “생명의 강물 속”이었다.
94년엔 소외된 농민 속으로
농사짓고 함께 어울려 놀면
‘찐한’ 공동체가 생겨났지요
94년 가을, 신부님은 도시의 삶을 접고 농촌으로 들어가셨다. 이제 도시빈민보다도 농민이 더 소외된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충북 괴산의 삼송리에서 유기농업을 하는 농부들의 공동체, 솔뫼농장이 새로운 일터가 되었다. 그곳에서 생명의 강물을 새로 발견하고 몸을 담은 것이다.
신부님은 농부들과 함께 농작물을 심고 기르고, 먹고 마시고, 울고 웃었다. 유기농으로 정성들여 키운 배추나 수박을 인근 성당에 내어 파는 날은 바로 잔칫날이었다. 온종일, 신부님과 농부들은 신자들과 함께 막걸리를 마셨다, 배추와 수박을 안주삼아. 그러는 사이, 배추와 수박은 팔려나가기 마련이었다. 이 모든 것이 농부들과 함께 하는 신명난 놀이였다. 그렇게 솔뫼농장은 점점 기틀이 잡혀갔다.
당신의 꿈은 ‘찐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신부님이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놀면, 거기에 공동체가 생겨났고, 기왕의 공동체는 더 튼실해졌다. 무엇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던 신부님께서 유일하게 의도한 것은 사람들을 엮어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었다.
95년 10월, 복음자리마을 공터에서 열린 신부님의 회갑잔치는 그야말로 밥과 술과 풍물이 어우러진 대동놀이였다. 김수환 추기경님을 비롯해 2천여 명이 밥과 술을 나누고 춤을 추었다. 솔뫼농장 식구들이 올라와 복음자리 식구들과 어울려 밤을 밝혔다. 일주일 뒤에는 삼송리에서 또 회갑잔치가 열려 복음자리 식구들이 내려와 함께 했다.
정 신부님은 어찌 그리 사람들과 잘 어울렸을까? 이 의문은 97년 연말, 고향인 미국 일리노이주의 형님 댁에 머물고 있던 신부님을 방문하고 나서 조금 풀렸다. 새해 첫날, 아침을 먹고 나니, 삼십 명 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모두 신부님의 조카와 손주들이었다. 온집안이 사람으로 “우글우글”했다. 한때는 식구가 75명이나 됐단다. 신부님은 어릴 때부터 ‘함께 하는 삶’ 속에서 자란 것이다.
현존, 또는 함께 있음! 정 신부님의 삶의 간결한 표현이다. 10여년 가까이 아프신 동안에도 신부님은 늘 우리를 “함께 있음”의 삶으로 초대하셨다. 이제는 신부님을 쉬게 해드릴 때가 왔다, 잠시의 작별 인사와 함께.
“정일우 신부님, 그동안 함께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또 뵐게요.”
조현철 예수회 신부·서강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