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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사라지면 '하느님 뜻'은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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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뜻은 어디에?

 -문창극의 기독교 역사관에 대한 몇가지 비판-
                                                       

 변 호 사  김 형 태



마당 목련나무 아래 돌 절구통을 하나 얻어다 놓고 물을 찰랑찰랑 채워 넣었다. 늙으신 어머니는 모기가 알을 낳으니 물을 담아두지 말라 하신다. “온 종일 찾아오는 참새들이며 산비둘기가 목을 축여야 해요.” 대답은 그리 했는데 며칠 뒤 들여다보니 정말 장구벌레들이 물속에서 꾸불텅 꾸불텅 헤엄을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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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등 주변에 몰려든 하루살이. 김명진 기자


잠시 고민을 하다가 절구를 쓰러뜨려 물을 쏟아 버렸다. 새까만 장구벌레들은 졸지에 흙 속으로 잦아드는 물 위에서 삶의 마지막을 맞았다.
나는 그저 참새들 생각해서 물 채우고, 또 별 부담없이 절구를 자빠뜨리지만 저 모기 유충에게는 전 우주가 사라지는 것일 터.
만일 저 장구벌레가 자신을 창조한 신에게 ‘왜 저를 이런 죽음에 몰아 넣으셨나요’ 하고 항의한다면. 장구벌레를 죽인 범인인 내게는 금방 이런 답이 떠오른다. “네 죽음은 그저 내 피를 빨아야 알을 낳아 종족을 보존할 수 있는 너희 모기들의 삶의 조건과 모기에게 피를 빨리지 않으려는 나의 생존본능과 참새에게 물을 먹이려는 나의 알량한 측은지심이 서로 어우러져 만들어낸 사건일 뿐이란다.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겠니. 40억년 전 저 아마득한 옛날, 너희 모기와 저 참새와 나의 공통 조상인 최초의 단세포 생명체에게 의미란 게 있었을까, 아니, 의미란 게 필요했을까.’


지난 봄 몇 달 동안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물었을 게다. 왜 저 꽃다운 어린 청춘들이 수백명씩이나 아무 잘못도 없이 남해 바다 속에서 스러져갔는지. 대관절 이 세상에 ‘의미’란 게 있기나 한 것인지.
사람들은 늘 자신을 중심으로 모든 사물이나 사건들의 의미를 만들어내 왔다. 이 우주나 신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거나, 바깥 세상은 나를 위해 있다거나.
기독교에서는 사람이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위의 모든 짐승을 다스릴 권한이 있다한다. 불교에서도 축생은 못된 업을 지은 사람이 인과응보로 떨어지는 나락에 불과하다.
하지만 진화론에서는 현세에 존재하는 모든 종들은 어느 종이 다른 종보다 우월한 게 아니고, 각각의 종들은 저마다가 처한 환경에 가장 적합하게 진화해 온 거라 한다. 깊은 바다 밑에 사는 넙치는 그 무거운 수압에 맞게, 100도 가까운 뜨거운 화산지대에 사는 박테리아는 뜨거운 온도에 견딜 수 있게, 별 재주가 없는 인간은 머리를 발달시켜....


47억년이라는 기나긴 지구 나이에 비추어 불과 수십만년의 짧은 역사를 지닌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 현생인류는 종교, 과학을 통해 스스로가 가장 우월한 종이라고 자부한다. 하지만 우리가 내세우는 이성이나 생각하는 능력이란 것도 그렇다. 지금 이 환경에서 이성이나 지능은 다른 종들을 지배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능력임에 틀림없지만 대기 산소농도가 절반으로 떨어지면 지능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게 된다. 산소가 부족해도 살 수 있도록 진화해 온 박테리아가 인류의 자리를 대신할 거다. 공룡들은 지능 대신 수백톤이나 나가는 덩치로 지구를 2억년이나 주름잡았다.
때로는 단세포 생물의 이분법이라는 왕성한 생식수단이, 때로는 공룡의 커다란 덩치가, 그리고 지금은 인간의 지능이 각 시대가 처한 외부환경에 가장 잘 적응할 수 있는 무기였다. 이걸 연기(緣起)의 화법으로 이야기하면 주관과 객관이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고 서로 기대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거다.


그러니 지능을 진보의 유일한 척도로 삼는 건 우물 안 개구리 짓으로 보인다. 우리 인간만이 이성을 통해 이 우주의 모습을 알아내고 그 의미를 이해한다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가시광선으로 사물을 분별해 내지만, 박쥐는 빛이 아니라 초음파로 세상을 인식하니 박쥐의 우주와 인간의 우주는 그 느끼고 이해한 인식의 내용이나 질이 전혀 다르다. 우리는 초음파로 느끼는 박쥐의 세상을 짐작 조차도 할 수가 없다.
내가 이성으로 알아낸  수학이나 물리 법칙을 통해, 저 마당의 목련이나 모기보다 세상을 더 잘 이해한다고 하는 건 그저 사람 중심의 생각일 뿐. 눈이 안 보이는 사람과 귀가 안들리는 사람이 서로 자기가 더 세상을 잘 안다고 우기는 거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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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문창극 총리 후보자가 교회에서 했다는 강연 때문에 국회청문회 자리에 가보지도 못하고 물러났다. 일본의 식민지배는 이조 5백년을 허송세월한 우리민족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단련을 시키려는 하느님의 뜻이었다고 했다가 여론의 몰매를 맞았다. 본인은 자신이 친일파가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면서 매우 억울해 했다. 그로서는 억울할 것 같기도 하다.
함석헌 옹도 <뜻으로 본 한국 역사>란 책에서 이리 말했다. “우리가 길러내고 우리가 업신여기던 일본한테 나라를 빼앗겼으니 마치 행랑머슴한테 안주인이 정절을 잃은 셈이다. 하나님은 이 민족이 반발이 일어날 때까지 하실 작정이었다.”
문씨나 함 옹이 식민지배나 남북분단 같은 고난의 역사에서 하느님의 뜻을 묻는 것은 개신교 역사관에서는 익숙한 사고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 뜻을 잘 헤아려 행동하면 영광이 돌아온다는 역사인식 구조다.


이 세상은 본래 고통스럽다. 한 끼라도 굶으면 배가 고프니 쌀이며 밀이며 생선이며 고기 같은 남의 생명을 먹여야 이 한 목숨 부지할 수 있다. 또 그래야 내 분신인 자식을 통해 나를 영원히 이어갈 수 있다. 그래서 고통은 이 세상에 주어진 전제조건이다. 남을 먹으려고, 남에게 먹히느라. 이게 다 고통이니, 여기서 의미를 찾아야 그 고통을 겨우 견뎌낼 수 있다.
함석헌 옹은 우리 역사를 가만히 돌아보니 온통 고난이더라, 그래서 기독교의 진리인 예수의 고난과 그를 통한 세상의 구원을 우리 역사에 적용해 보았다 했다.
일제 식민 통치나 남북분단과 6.25전쟁이 하느님이 주신 시련이라는 데는 문 씨나 함 옹이 같은 생각이다. 그런데 그 ‘시련’뒤에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이 무엇이냐에 관해 두 사람은 극과 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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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옹


문씨는 남북분단이나 6. 25전쟁의 고난은 공산화를 막고 미국을 이 땅에 붙잡아두기 위한 하느님의 뜻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함 옹은 미국의 바지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려 공산주의를 말살하는 게 하느님 뜻이 아니라며, 요즈음 표현으로 하자면 ‘상생’을 이야기한다.
“6.25가 분명히 증언한 것은 미·소의 대립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대립으로 인류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이 이유가 있다면 소련도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 비폭력주의, 평화주의, 세계국가주의, 우주통일주의에 길이 있다. 생명이란 곧 우주적인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문씨의 역사관은 기독교 구약성서의 출애굽기를  못 벗어난 듯 하다. 그 하느님은 우주의 하느님이 아니라, 뭇별 중에서도 겨우 지구, 그 중에서도 인간, 인간 중에서도 유대인만의 하느님이다. 유대인을 이집트에서 고향인 가나안으로 데려오기까지 수많은 이집트의 맏아이들과 심지어는 짐승들

의 첫 배들까지도 다 죽이고, 가나안에 살던 부족들도 모조리 멸해 버리는 하느님.
그래서 이런 하느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늘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고향에서 내쫓고 폭격하고, 애 어른 할 것 없이 무차별 잡아가고 사살한다.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의 부시 전 대통령이나 문창극, 그리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죽음의 고난 속에 몰아넣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는 기독교 역사관은 극단의 자기중심적 사고다. 그리고 그들이 믿는 하느님은 ‘그들만의 하느님’, 부족신일 뿐.
문씨 말대로 하느님이 게으르고 ‘무상급식’이나 바라는 조선 민족을 정신 차리게 하려고 일제에 식민지배를 허락했다면, 그 악역을 맡은 일본사람들은 어찌되는 걸까. 하느님은 일본 사람들의 하느님은 아닌 건가.


미국과 한국의 일부 개신교 근본주의 교단을 빼고 로마 카톨릭이나 유럽 대부분의 개신교는 우주 창조와 관련해서 물리학의 빅뱅이론을, 생명과 관련해서 진화론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 이론들에 따르면 ‘하느님’은 진흙을 빚어 사람을 만들고 이 세상 일에 일일이 간섭하고 개입하는, 마치 사람 같은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이 어떤 존재라면, 존재는 어차피 유한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하느님을 종교적으로 정의하자면 어떤 ‘존재’가 아닌, 사물이나 사건들의 관계 속에 머무는 ‘사랑’. 또는 ‘상생’이라는 관계 그 자체다. 
그러므로 종교의 존재 의미는 사물이나 사건이 어디에서 유래하고 어떤 힘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지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다. 이건 과학이 할 일이다. 종교는 그저 사랑을 실천하고, 상생하는 데 있다. 사랑이나 상생을 실천하는 데  그 의미가 있으니, 이 개체 나의 구원이나 해탈을 말할 게제도 아니다.


나를 포함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서로에 대해, 다른 종에 대해, 그리고 지구에 대해 벌이는 행패를 생각해 보면  인류라는 종이 다만 몇 백년이라도 더 존속할 수 있을지 매우 의심스럽다.
137억년 우주 역사와 40억년 지구 위 생명의 나이에 비추면 인간은 정말 티끌이요 하루살이에 불과하다. 그런 인간들이 마치 온 우주가 자신들을 위해 있는 것처럼, 온갖 의미며 하느님의 뜻을 제게다 끌어 부치며 으스대는 모습이 참으로 측은하다.
그러다 인류, 제가 사라지면 ‘하느님 뜻’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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