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 당하기 전 토마스 안중근
안중근의 쓴 유묵 독립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통령궁 앞엔 산마르틴광장과 대성당이 마주 보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추기경으로 머물던 이 대성당 안에선 호세 데 산마르틴(1778~1850)의 무덤이 가장 인기다. 15~16세기 십자가와 선교사들을 앞세우고 라틴아메리카를 정복한 스페인군을 아르헨티나와 칠레, 페루에서까지 몰아낸 해방 영웅의 묘다. 점령군의 목을 날린 산마르틴 무덤 앞에 모여드는 수많은 참배객은 산마르틴을 새 구원자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에서 가톨릭인으로서 우리 민족의 구원자로 추앙할 만한 인물이 있을까. 단연 안중근(1879~1910)이다. 그러나 그는 한국 가톨릭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였다. 그가 더 큰 살상을 저지르지 못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을 때 조선 가톨릭교구장이던 프랑스인 뮈텔 주교(1854~1933)는 안중근을 살인자라며, 신자임도 부인하고 사제의 면회도 방해했다. 그러나 안중근은 사형 직전 장남 분도(베네딕도)를 사제로 만들어 달라고 유언했다. 뮈텔 주교의 배신에 안중근은 믿음으로 응답한 것이다.
뮈텔의 배신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명근의 고해성사를 받은 빌렘 신부의 정보보고를 일본 총독부 아카시 장군에게 밀고했다. 이로 인해 신민회 회원 600명 등 독립운동가들이 일망타진됐다.
9년 뒤 3·1 독립운동에 여타 모든 종교가 앞장섰지만 가톨릭만 빠졌다. 뮈텔은 전 국민이 부른 만세를 함께 불렀다고 해서 신학교 학생들을 퇴학시켰다
안중근 100주기인 2010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안중근 추도 미사에서 가톨릭은 안중근의 신자 자격을 복권시켰다. 쓰면 뱉고 달면 삼켰다는 소리를 들을 만하다. 하지만 그조차 다 삼키지 못했다. 미사를 집전한 정진석 추기경은 “뮈텔 주교가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옹호했다.
다음달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한다. 16일 서울 광화문에서 조선 말 순교자 123위를 포함한 124위 시복식을 집전한다. 광화문은 무더위에 무방비인 아스팔트 위인데다 경호도 어렵다는 우려에도 염수정 추기경이 밀어붙였다고 한다. 순교 터들이 광화문과 가깝다는 게 이유다. 순교 시대를 보면 김대건과 황사영 등 초기 가톨릭 지도자들은 프랑스 군함이 조선 정부를 제압해서라도 신앙의 자유를 얻기를 바랐다. 그것이 더 큰 박해를 초래했다. 염 추기경은 조선의 상징인 광화문이야말로 150여년 전 조선의 국가적 박해에 희생된 순교자들을 기리고, 지금의 가톨릭이 당시 노론 못지않은 기득권을 갖게 됐음을 선포할 적임지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물을 수밖에 없다. 120년 전 동학 30여만명이 죽어갈 때, 안중근이 사형당할 때, 3·1운동으로 5만여명이 검거되고 7500여명이 살해당할 때, 일제강점기 학살과 고문, 인체실험, 위안부 동원, 징병, 수탈로 동포들이 신음할 때, 다른 종교인들이 동포와 함께하며 숱한 고난을 겪을 때 가톨릭은 어디에 있었는가. 처참한 집단학살까지 당하며 평등의 새바람을 바란다던 초기 선구자의 명분은 어디로 갔던가. 자발적으로 서학을 받아들인 자생종교라는 자부심대로 고난 받는 민중 속으로 들어갔어야 할 가톨릭은 어디를 바라보았던가. 일제와 기득권자가 아니라 피울음 울던 동포를 껴안은 가톨릭이 이 땅에 있었던가.
한국 가톨릭은 광화문에서 순교자들을 현양하는 것 이상으로 먼저 안중근과 민족 동포에게 참회해야 마땅하다. 그나마 1970년 이후 지학순 주교와 그 뒤를 이은 정의구현사제단 사제들, 민주화를 지지한 김수환 추기경, 약자들과 함께 산 두봉·정일우 등 선교사들, 밀양과 강정과 용산과 광화문 등에서 약자들을 껴안고, 함께 매 맞고 운 사제·수도자들이 없었다면 어쩔 뻔했는가.
그러나 정·염 두 추기경은 한국 가톨릭을 민초의 현장 속에 투신시키는 사제·수도자들을 멀리하고 박해했다. 그들까지 내쳐버리고 무슨 면목으로 동포들 앞에 서려는 것인가.
조현 종교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wel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