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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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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만날까 불안했던 기나긴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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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전 스님의 아프가니스탄 순례기

2편. 교전(交戰)의 현장을 피해 우회하다



청전22청전2지프차.jpg 


저 멀리 아랄해 까지 2,400km를 흘러가는 중앙아시아의 젖줄이자 역사적으로 박트리아 지방의 그리스인을 통해서 헬레니즘 문화를 꽃피우게 한 옥서스(아무다리아) 강의 최상류에 위치한 조그만 쇠다리를 건너 드디어 아프가니스탄 땅에 발을 디뎠다.

국경의 출입국 관리소 직원은 오랜만에 지나는 외국인이라선지 이것저것 많이도 물었다. 아프가니스탄 비자에 입국 도장을 찍으며 하는 말이라니,

“지난 6년 동안 여기 있었는데 한국인이 통과한 것은 처음이다.”

 
외국인 등기부를 보니 지금까지 이곳을 지나간 외국인은 총 135명이었다. 약 6km를 더 가야 이쉬카심이라고 해서 차편을 물으니 그냥 걸어가라고. 조금 걷다가 노새 두 마리를 끌고 오는 부자를 만나 배낭을 노새 등에 얹을 수 있었다. 30분 즈음 걷다가 차 소리에 돌아보니 무장군인 지프였다. 손을 드니 차를 세우며 내 짐을 만져보며 어설픈 영어로 ‘폭발물이 있느냐?’고 물었다. 무임승차, 뽀얀 흙먼지를 꼬리에 붙인 채 흔들흔들, 발품을 팔지 않고 이쉬카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중심으로 국경 무역이 열리는 이쉬카심이라지만 양철 지붕을 한 집 몇 채와 시장의 좌판을 벌리기 위한 임시 천막 몇 개만 서 있었다. 상품은 구호물인지 재고품인지 죄다 헌 옷가지, 헌 신발과 야채 과일 등 어설픈 생필품 가게가 전부였다.

 

청전22청전2좌판.jpg


무장 군인 지프가 내려준 곳은 경찰서, 짐 검사부터 입국 등록증, 여행 허가서, 특정 지역 통과서 등의 서류 작성을 하는데 총 세 종류에 넉 장씩, 모두 손으로 써야 했다. 사진을 네 장이나 달라고, 그래도 컴퓨터는 있었다. 정전 때문에 쓸모가 없어서 문제였지! 통역사 역할을 하던 현지의 젊은이가 서툰 영어로, “터머로우 어게인(내일 다시 하자).”

그는 시장에서 좀 떨어진 간판도 없는 집까지 데려다 주고는 내일 아침 8시에 다시 오겠다고. 이 집이 자고 먹어야 할 여관이었으니 앞으로 진행될 나그네 발길이 쉽지는 않겠다고 느껴진다.


해발 3,090m의 파미르 고원 한가운데의 한밤의 냉기는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풍경은 그만, 저 멀리 힌두쿠시 산맥의 설산자락이 커튼처럼 둘러져 있고 이른 봄 나무들은 푸르스름한 연두 빛 잎을 빛냈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곳이 바로 하이 파미르 또는 바다크샨 지구(Badakhshan Area)로 아프가니스탄, 타지크스탄, 중국, 파키스탄에 걸친 파미르 고원의 한가운데 위치한 풍광 좋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이튿날 다시 찾아간 경찰서, “빅 프로블럼(큰 문제가 생겼다)!”

 
다음 목적지는 버스로 9시간 걸려 가야하는 북부 아프가니스탄의 중심지인 화이자바드(Faizabad)인데 간밤에 정부군과 탈레반이 전투를 벌여 차들이 다닐 수 없다고. 그래도 끝없이 이어지는 서류 작성, 별의별 군부대와 알지도 못하는 사무실을 들러 도장과 사인을 받았다. 몸수색은 또 왜 그렇게 심한 지, 막상 서류를 모두 마쳤으나 이제 떠날 방법이 문제였다. 이런 교전이 벌어지면 대중교통은 며칠이나 두절된다고.

 
탈레반이 활동하는 주요 위험지역으로 남부 칸다하르(Kandahar)를 중심으로 한 지역과 산 너머가 파키스탄의 서북 변경구인 바로 이곳임을 이후에 알았다. 비록 국경선이 그어져 있으나 이곳이나 그곳이나 모두 탈레반들의 주요 활동지역으로 아직도 파키스탄의 서북 변경구는 정부군이 통제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이 교전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고? 기다린다 해도 제대로 차량이 왕래할 때까지 언제까지. 여행 중에 무료하게 한자리에서 앉아 기다리는 것보다 재미없는 경우가 어디 있을까. 남은 방법은 전투 지역을 우회하는, 즉 걸어서 빠져나가는 방법인데 처음 간 놈이 어디가 어딘지 알고 빠져나간단 말인가?

 
‘통역사’ 젊은이에게 길을 물으니 일곱 여덟 시간 정도지만 고개 하나를 넘으면 된다고. 다시 경찰서에 가서 걸어가겠다고 하니 따로 별지 서류 하나를 더 적어 주었다. 마침내 지프 한 대를 대절하여 출발, 한 시간 정도 인적 없는 길을 달리니 검문소가 나타났는데 그 별지 서류를 보여주었더니 서류만 챙기고 그냥 가라고 했다.

 
다시 좀 더 들어가니 흙집 일곱 채가 띄엄띄엄 서 있는 조그만 전형적인 산악 마을이 나타났다. 내 배낭을 지고 길 안내까지 같이 하기로 중년의 현지인과 흥정이 이루어졌다. 이 동네는 구글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곳으로 현지인들은 야시테우라고 불렀다. 고개 너머 동네는 야시취로 거기까지만 가면 화이자바드로 나갈 차를 구할 수 있다고. 처음 보는 외국인 때문인지 동네 사람들이 다 몰려나오며 손님 대접을 하는데 마른 난(평평한 큰빵)과 ‘소금 차’가 전부였다.

 
지금까지 동행했던 ‘통역사’ 젊은이마저 떠나니 갑자기 긴장감이 밀려왔다. 잠시 후 안내인이 긴 지팡이를 챙겨 오면서 좀 더 젊은이랑 들어오는데 형제라고 했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인도에 오래 살면서 주워들은 우르두(Urdu)어가 이곳에서도 그럭저럭 통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새벽 세시에 출발해야 된다고.  과연 이 안내인만 믿고 가도 될까? 탈레반이라도 만나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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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새벽 세 시 전에 안내인이 깨웠다. 조그만 어깨 가방 하나 메고 그 형제의 걸음을 따라나서는데 컴컴한 어둠 속 하늘의 별빛만 보였다. 가끔은 바위에 앉아 쉬곤 했지만 불안과 긴장이 계속 뒤따랐다. 어둠 속에서 탈레반들이 총이라도 들고 나타났다가는 금생 하직할 판이었다.

 
다행히 네 시 반 정도가 되니 주위를 식별할 수가 있을 정도로 환해졌다. 여섯시 무렵에 길을 왼쪽으로 꺽어 개울물을 건너니 큰 바위 밑에 유목민 텐트가 나왔다. 안내인 형제와 안면이 있는지 뜨거운 소금 차와 난이 손님 대접으로 나왔다. 이쉬카심에서 사온 비스켓, 마른 과일, 사탕 등을 내놓자 안주인은 사탕을 잘게 잘라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는 한 옆으로 챙겨 놓는다. 손톱깍이 하나를 내놨다. 메이드인 꼬레아 제품이 이곳 산중 유목민 텐트에서 오랫동안 유용하게 쓰여 질 게다.

  
다시 출발, 10시 경 고개를 넘었는데 햇볕으로 눈이 녹아 있어 험한 길이 아니었다. 지도상에 나와 있지도 않아 고개 이름이 무엇이고 높이는 얼마나 되는지도 모른 고개를 넘은 것이다. 평지가 3,000m 인 동네라 최소한 4,000-4500m 는 넘었을 것이다.

 

내려가는 길은 응달 쪽 아직 눈이 녹지 않고 있었다. 걸음마다 눈 속에 빠지는데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앞서 난 두 형제의 발자국만 따라 가는 것도 아주 힘든 곤욕이었다. 마침내 내려온 푸른 초원, 2시 경에 불을 피워 소금 차 만들고 난으로 점심 요기를 했다. 아니 배낭에 든 먹거리는 죄다 먹어치웠다. 야시취 마을까지 가면 저녁을 먹을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다음 공양을 할 수 없을 것이기에.

 

5시 경에 파란 보리밭 속에 사람 사는 온기가 배인 야시취 마을에 도착했다. 30분 정도의 식사 시간을 빼고는 줄곧 걸어 붙였으니 14시간 동안 줄기차게 걸은 셈이었다. 길 안내를 해준 그 형제가 다음날 다시 그 고개를 넘어갈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짠했다. 배낭을 건네받고 정한 금액에다 덤은 물론이고 신고 오던 고급 운동화 신발을 벗어주고 갈 길에 필요 없을 물건 내복과 양말 등을 다 챙겨 주었다.


청전22청전2젊은형제.jpg

 


화이자바드까지 간다고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더니 30분도 안 되어 택시 한 대가 나타났다. 흥정이 되자마자 비포장 먼지 길을 ‘총알 택시’처럼 달리니 화이자바드까지 3시간도 안 걸렸다.  9시간 버스길이 막혀 17시간 동안 이동한 날로 지금까지 여행해본 곳 가운데 가장 긴 하루를 보낸 날이었다. 눈 쌓인 힌두쿠시 산맥의 북쪽 끝자락, 파미르 고원의 남쪽 아프가니스탄이라는 곳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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