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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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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갉아먹는 두려움을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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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의 실체는 무엇인가?

풍랑을 멈추게 하시다(마태 8,23~27)


예수님 기적의 성격들은 악령 추방(驅魔), 병자를 낫게하심(治癒), 그리고 자연법을 초월하심(빵과 포도주의 기적, 바다를 걸으심) 등 세 가지로 대분할 수 있습니다. 기적을 베푸신 의도는 인간의 건강성을 파손하고 삶을 위협하는 현상, 즉 고통과 혼돈의 상황을 하느님 나라의 창조성에로 복구시키고자 하는 겁니다.


가난한 이들과 감옥에 갇힌 이들,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치료받을 돈이 없는 사람들, 좌절과 고통으로 미쳐버릴 것 같은 사람들이 많은 갈릴래아의 시대 상황은 예수 기적이야기의 배경이 됩니다. 그 가운데 풍랑을 멈추신 기적은 두려움에 떨고 있던 갈릴래아 민중들의 사회적 상황과 확실한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 사후에서 복음서가 작성되던 35~80년대의 초대교회는 종교적으로 유다교의 탄압과 정치적으로 로마의 통치로 인한 공안선풍이 폭풍처럼 몰아치던 시기로서 예수님을 추종하는 집회들은 체포 투옥 처형되기 일수였습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행위였습니다. 그래도 종말의 심판에서, 구원받는데 가장 분명한 확증은 순교 이상의 것이 없었기 때문에 죽음도 불사할 수 있게 했습니다. 두려움을 넘어선 것이지만 그래도, 죽음 앞에 아직 살아있는 목숨은 죽음이 두렵습니다. 많은 신도 대중이 두려움 속에 떨고 위축되어 있음은 자명합니다. 


편집영화노아2.jpg

*홍수를 만난 사람들. 영화 <노아> 중에서


사도들과 그 제자들은 자신들의 공동체 집회에 나온 신도들에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풍랑이 넘실대는 바다의 일엽편주같은 위기 속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 우리의 주님은 그런 자연의 질서까지 복종시킬 수 있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 두려움이란 믿음이 부족한 현상일 뿐, 신앙 앞에는 실체가 아니라는 것, 어떤 살벌한 공안정국도 주님의 한마디면 모두 제압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설교했고 그것이 복음서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두려움은 겁을 먹이고 기를 죽이고 그래서 생의 신명을 억압합니다. 숨거나 도망가거나 행동을 감추게 합니다.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정말 ‘두려움’이란 무엇일까요? 미래에 다가오는 불투명한 어떤 것인데, 구체적으로는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자유와 생명에 대한 파괴력입니다. 그것은 객관적 경험적 가능성일 수도 있고 심리적 상상일 수도 있고 그렇겠지요.


두려움이란 현실이 아니라 ‘미래의 무엇’이라는 시간성의 형상입니다.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나타날 것 같은’ 대상일 뿐입니다. 가장 두려운 것이 죽음일진데 죽음이란 부딪히면 순간이어서 그것이 정말 두려운 것인지 겪어본 사람이 없는 이유로 검증이 되지 않은 진리입니다.

“주님, 살려주십시오. 우리가 다 죽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풍랑이 두려웠습니다.

순교시대 신자들은 공안정국이 두려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무엇이 두려울까요?

몸을 쓰는 노동이 두렵습니다.

우리는 함께 사는 가족들과의 갈등이 두렵습니다.

자녀의 미래를 생각하니 왠지 안쓰럽고 두렵습니다.   

곁에 계신 예수님께서 잠에서 깨어나 “잠잠해 져라!” 하시니 나룻배를 집어삼킬 것 같던 풍랑은 사라졌습니다. 하느님께서 내 곁에 함께 계시고, 권능의 예수님께 결합되어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두려움은 없습니다.


영화노아4.jpg

*가족과 대화하는 노아. 영화 <노아> 중에서


노동이 내 몸을 정상적 기능체로 만들고 건강을 주고 노동하는 삶에 영성과 인간성이 있다는 믿음이 있으면 두려워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 마을에서 노동을 열심히 한 이유로 건강을 잃은 가족이 아직까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믿음을 가지면 왜 두렵겠습니까? 스스로 겁을 먹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가족과의 관계가 조화롭지 못해 두렵지만 그것은 내가 가부장적 전통과 예의범절을 학습하지 못했고 학교 교육에서 대화법도 토의법도 관계의 교육도 받아본 경험이 없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서로의 소통이 미숙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고 수행해 나가겠다는 다짐을 가지면 두려울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마을 아이들이 가족들의 전폭적인 사랑과 관심과 배려 속에서 성장하고 있고 대한민국 또래 아이들 가운데 가장 잘 성장하는 100명 안에 드는 아이들이란 믿음을 가진다면 자녀의 미래가 두려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래도 출세와 성공에 필요한 교육이 못된다고 생각함에서 오는 것이겠지요. 그런 것은 우리가 버리고 온 삶인데도...

두려움은 마음의 어둠이고 혼돈입니다. ‘빛이 생겨라!’ 하시면 혼돈에 질서가 나타납니다. 어둠이란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빛이 없는 상태를 이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두려움은 믿음이 켜지고 밝혀지는 순간에 사라집니다. ‘두렵다’는 것은 참된 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중심으로 이해하는 감정입니다. 두려움은 ‘믿음이 없는 상태’를 비유하는 언어이지 명사(名辭)도 동사(動詞)도 아닙니다.

공동체 생활에서의 관계적 갈등이 심한 것은 대체적으로 초심자들에게서 나타나는데 세상에 살 때에 지닌 불신과 불확실성을 아직도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두려워할 대상이 사라졌다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그런 두려움을 순교로 뚫고 나갔습니다. ‘나를 죽인다고 해도 너희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믿음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공포도 가로막지 못했던 것입니다.

농업노동이 두려워서 물러서는 사람은 있었지만 노동 때문에 건강이 망가진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웃과의 갈등으로 공동생활을 포기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겸손과 비움의 생활 때문에 무시당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자녀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도시로 떠난 사람은 있었지만 마을에서 성장한 아이들이 도시 아이들보다 불행하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용돈을 마음대로 쓸 수 없다는 것이 불만인 사람은 있었지만 무소유의 생활이 삶의 품위를 망가뜨린 모습을 본적은 없습니다.


오직 믿음의 문제입니다. 공동체 영성에 대한 믿음이 분명하고 신념화 되면 그런 모든 것, 마음의 어둠도 두려움도 불안도 근심도 절망도 들어설 틈이 없게 됩니다. 우리 마을의 주인이신 분께서 우리의 삶과 자녀들의 미래와 삶을 직접 인도하신다는 믿음과 신탁을 가져야 합니다.


내 마음에 평화가 없다면 마을 생활에 두려움이 느껴진다면 그 실체가 무엇인지 발견해야 합니다. 공동체 성찰은 그런 것을 찾아내는 기술에서 최고의 학교입니다. *

(2014.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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