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을 알현하는 구속자 부인 엄경희씨
엄경희씨의 호소를 들은 뒤 축복 기도를 해주는 프란치스코 교황
“교황님이 끝까지 들어주셨어요, 내란음모 억울함 호소를”
바티칸 방문 구속자 가족 엄경희씨
구속자들 이름·사건 편지도 전달
“제손 잡고 축복기도도 해주셨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문둥이로 취급받은 저희의 이야기를 그렇게 귀담아 들어주리라곤 기대하지 못했지요. 그런데 발검음을 멈추고 눈을 맞춘 채로 내 말이 끝날 때까지 들어 주셨어요.”
‘이석기 의원(통합진보당)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구속된 7명 가운데 한명인 조양원 사회동향연구소 대표의 부인 엄경희씨(47)는 17일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났을 때처럼 눈물을 훔쳤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가 교우이자 가족대책위원장을 맡은 구속자 홍순석씨의 부인 박사옥씨와 함께 로마로 간 것은 지난 5월7일이었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장 이용훈 주교가 써준 편지 한장을 들고서였다.
바티칸은 치솟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자취나마 엿보려는 이들로 인산인해였다. 교황의 개인알현은 꿈도 꾸기 어렵고, 일반알현도 최근 너무 많은 지원자가 몰려 5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어렵게 온 로마행이 헛걸음이 될 것같아 앞이 캄캄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곳에서 길이 열렸다.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 사무총장 마리오 토소 주교의 안내로 정의평화위원장 피터 턱슨 추기경을 만났다. 턱슨 추기경은 “박근혜 대통령이 국가정보원의 댓글 조작이 드러나 시위가 가장 많아지는 시점인 지난해 8월 저희 남편 등 7명을 종북으로 모는 사건을 터트려 구속시켰다”는 설명을 경청했다. 그러나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국정원의 대선개입에 대해 비판하는 가톨릭 사제와 수도자들까지 종북으로 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 “설마 그럴리가?”라며 크게 놀라워했다. 그러면서 “교황청 국무성에 보고해 이 문제를 상의하겠다”고 했다. 그 때 프란치스코 교황의 비서가 다른 일로 추기경 방을 찾아와 잠깐 대화를 들었다. 그러더니 둘의 이름을 적고 교황 일반알현에 참석할 수 있게 하겠다고 해주었다.
드디어 14일 교황 일반 알현식엔 먼발치에서나마 교황을 보려는 수십만의 인파가 바티칸광장에 몰려 들었다. 교황 바로 앞엔 장애인과 아이들이 초청돼 앉아 있었고, 그는 좌우 100명씩이 배치된 소위 ‘1번자리’에 섰다.
“교황님이 대중들 사이로 오자 미리 외운 이태리어로 “아유타미, 아유타미(도와줘요, 도와줘요)를 외쳤어요. 그러자 교황님이 멈춰섰어요. 이탈이아어로 “제 남편이 한국에서 부당하게 감옥에 갇혀있다”는 말이 다 끝나도록 발길을 옮기지 않은 채 자비로운 눈길로 쳐다보고 계셨어요. 믿어지지 않았어요.”
엄씨는 “지난해 여름 어느날 딸과 단둘이 있던 집으로 국정원 수사관들이 온 동네가 떠나갈 듯이 요란하게 들이닥친 이래 온가족이 ‘뿔 달린 도깨비’가 되고만 악몽 같은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눈물이 솟구쳤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 영어로 설명을 했어요. 교황님은 손을 꼭 잡은 채 어눌한 설명을 다 들어주었어요. 그리고 우는 제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기도까지 해주었어요. 그 때 박사옥씨가 구속자들 이름과 사건 사연을 적은 편지를 전해주자 교황님은 이를 꼭 쥐었죠. 교황의 비서도 ‘접수했다’는 신호를 보내주더군요.”
가톨릭 성가정에서 태어난 엄씨는 경기도 성남에서 사목위원, 중고등부 주일학교 교사를 했다. 베네딕도수도회 산하 만남의집에서는 남편이 노동사목을 하는 동안 그는 한글교실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이석기 의원을 비롯해 구속자와 가족들 상당수가 가톨릭신자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지듯 한 억울함을 호소해도 귀를 기울여주지않던 신의 응답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눈길과 손길을 통해 이루어진 것 같았다. 이탈리아어로 통역해주던 한국인 신부도 “기적이다”고 축하해주었다.
교황을 만나고 온 뒤 어둠 속에서 서광이 비치는 듯했다. 물론 북한과 연루된 듯이 잡아들인 검찰이 1차공판에서 ‘북한과 아무 관계가 없어 더 위험하다’며 ‘북과 무관함’을 공인해주었고, ‘내란음모’ 증거물이란 녹취록이 1심에서 1천곳 이상 고쳐진 것으로 드러난데 이어 2심 재판에서도 400여곳이 고쳐졌다는게 추가로 밝혀지면서부터였다. 실제 강연발언중 ‘절두산’이 ‘결전 성지’로, ‘천안’이 ‘청와대’로 둔갑한 것등이 드러나자 주위에서도 ‘국정원의 또 하나의 조작 시도’라며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지난 12일 서울 경운동 수운회관에서 ‘이겨라 진실, 힘내라 진실’ 석방희망문화제엔 무려 2천여명이 찾아 힘을 보태주었다.
최근엔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김영주 목사, 천주교 종교간대화위원장 김희중 대주교에 이어 서울대교구 염수정 추기경이 자필로 ‘우리 사회의 화해와 통합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며 재판부에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엄씨는 “국정원이 국정원 댓글사건이 드러나 정부가 가장 위기에 몰려있을 때 언론을 무기로 삼아 자기들이 마음대로 고친 녹취록을 공개해 순식간에 제 남편 등을 경거망동한 문둥병 환자를 만들어버렸는데, 인권재단 사람 박래군 소장이 손을 내밀어 ‘아무도 우리 소리를 들어주지 않았네’라는 인권보고회를 열어주고, 성염 전 교황청 대사가 여러모로 도와주고, 드디어 교황님께서도 귀를 열어주셨다”면서 “희망이 현실이 되게 날마나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