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슬림 영웅 살라딘
이스라엘 공습으로 부상 당한 팔레스타인 아이들. 사진 <한겨레> 자료.
지난 8일 이후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으로 팔레스타인인 1천명 이상이 사망했다. 사망자의 80% 이상이 아이들과 여성 등 민간인들이다. 이스라엘 유대인들의 무차별적인 폭격에 미처 꽃도 못 피우고 죽어간 아이들을 둔 부모, 갈가리 찢겨버린 아빠·엄마·형제의 주검을 맞이한 아이들의 가슴이 무엇으로 차오를 것인가. 그 분노의 도미노가 팔레스타인 지역의 미래까지 핏빛 잿빛을 예약할 것만 같아 더욱 안타깝다. 인류사에서 예수나 붓다 같은 성인이 아닌 전사이면서도 분노를 자비로 돌려준 살라딘(1137~1193)이 다시 돌아온다면 모를까.
800여년 전 가톨릭 교황의 지시에 따라 프랑크족들로 이뤄진 십자군들이 이스라엘 성지 탈환을 목표로 예루살렘 침공을 감행했을 때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에서 평화롭게 공존하던 유대인과 무슬림을 처참하게 학살했다. 이 땅을 십자군으로부터 빼앗은 건 쿠르드족 출신의 독실한 무슬림인 술탄 살라딘이었다. 그는 두려움에 떠는 십자군과 그 가족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당신네 선조들이 처음 이 도시를 점령했을 때 우리를 대접한 것처럼 당신들을 대접하지 않을 거요. 당신네 선조들은 무슬림과 유대인 어린아이들의 머리를 창끝에 꽂아 놓았소. 노인과 여자들은 고문하고 불태웠소. 이 거리는 피로 넘쳤소. 당신들은 우리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믿는 사람들 아니냐고 하오. 그러나 그렇지 않소. 만약 우리 병사들이 그리스도인 여인을 범하거나 그리스도인들의 성전을 더럽히거든 나를 찾아와 말하시오. 나는 그런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오.”
이 내용은 영국의 무슬림 작가 타리크 알리가 쓴 <술탄 살라딘>의 한 대목이다. 당시 무슬림 왕 살라딘의 가신 가운데 70%가 유대인이었다. 살라딘은 유대인 시너고그 재건을 적극 지원해주었다. 잔혹한 십자군이 떠나간 뒤 예루살렘은 평화로운 다종교 도시가 되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1948년 유대인 우익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에 돌아와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기 전까지는.
살라딘은 유럽 기독교권에서도 여러 시 등에서 자비로운 영웅으로 등장할 정도로 인기다. 단테의 <신곡>에서도 ‘지옥에서 가장 적은 죄를 지은 자’로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함께 살라딘을 꼽았을 정도다.
그러나 지금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영웅 살라딘을 원망할지 모른다. 왜 유대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느냐고. 그런 자비가 자비를 낳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세계의 지성과 양심들뿐 아니라 유럽 등 세계 곳곳에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 학살을 규탄하는 시위가 번지고 있다. 나치로부터 그토록 참담한 학살을 당한 그들이 나치와 같은 짓을 서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등의 우익들만이 득세할 경우 나치와 같은 유대 혐오즘이 재등장해 언젠가 죄과를 치르게 되지 않을지 우려될 정도다.
“천국의 가장 위대한 속성은 자비다. 자비야말로 정의와 영광의 절정이다.”
독실한 무슬림 신앙인이자 무소유자였던 살라딘의 말이다. 팔레스타인 땅에서 살육의 핑퐁을 끝낼 살라딘 같은 인물이 그토록 머리 좋은 유대인 가운데는 없단 말인가.
종교전문기자 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