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재성지 성당에서 정호영씨. 그 옆 조각상은 정약종-철상 부자.
경기도 양평군 조안면 다산로 팔당댐변 마재는 정약전(1758~1816)·약종(1760~1801)·약용(1762~1836) 는 조선후기 세 천재 형제가 태어나 자란 곳이다. 세형제의 아버지 정재현이 광주 목사로 부임하면서 잡은 터가 ‘말이 쉬어가는 언덕’이란 뜻의 마재다. 천주교 초기 세례를 받은 3형제 가운데 약전과 약용은 박해 시대 천주교와 인연을 끊고, 전라도 강진과 흑산도로 유배를 가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이와 달리 약종은 천주교 신앙을 고수하다가 부인 유소사와 철상·하상·정혜 등 세 자식이 모두 순교 당해 집안의 대가 끊겼다. 약종이 오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집전으로 광화문에서 봉헌되는 시복식에서 복자로 추존되는 124위중 한명이다.
30일 천주교 마재성지에서 정약용의 7대손인 정호영(56)씨를 만났다. 마재가 고향인 정씨는 교육방송 정책기획센터장을 맡고 있다. 이번에 시복되는 정약종은 후손이 끊겼기에 그가 후손을 대표해 시복식에 참석한다. 신유박해 때 순교한 정약종-철상 부자의 조각상 옆에서 나주정씨 족보를 들고 선 6대 독자 정씨는 오늘날의 화려한 가문과 달리 사연 많았던 가문의 역사를 들려주었다.
“신유박해로 약종 할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려 돌아가신 뒤 저희 집안의 벼슬길이 끊겨 어렵게 살아야했고, 주위로부터 천주학쟁이란 따돌림까지 당해야했다. 그래서 약종 할아버지는 아예 족보에서도 빼버렸다. 화를 입을까봐 한지를 물에 빨아 그 부분을 삭제해버렸다. 약종 할아버지가 족보에 다시 실릴 수 있게 된 건 1961년이 되어서였다.”
그런데도 천주교 세례교인인 정씨는 자신의 직계 할아버지로 실학의 집대성자인 정약용 이상으로 정약종의 삶에 주목했다고 한다. 젊은날 정약종이 천주교 교리를 한글로 알기 쉽게 쓴 주교요지(主敎要旨)를 보고서였다.
“애초 도교에 심취했다가 형제 중 가장 늦게 천주교를 받아들였지만 초기 평신도모임인 명도회를 만들어 이 땅에 천주교를 창립하한 주역이었다. 감옥의 고난 중에도 얼굴은 기쁨으로 차있었다고 한다. 양반들은 한문만 쓰던 때에 여성과 양민도 알아보게 한글로 쓴 것부터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최초의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 신부가 보고 감탄했다는 주교요지엔 ‘왜 사는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명쾌히 써놓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정씨는 논란이 많은 다산의 천주교 신앙 여부와 관련해선 “다산이 강진에 18년 유배를 갔다가 돌아와 쓴 자서전에서 ‘귀양 간 게 억울하다’, ‘나는 천주교인이 아니다’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다시 천주교를 신앙했다고 보긴 어렵다”면서 “그러나 할아버지 때부터는 집안이 다시 천주교를 믿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어른들이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보지 못해 이상하게 여겨 여쭤보면 어른들은 조상들이 ‘간소하게 하라고 했다’는 말씀만 했다”고 전했다.
그는 “생물학적으로 저희 집안 조상이지만, 이제라도 신앙의 희망을 준 정약종 할아버지를 새롭게 조명해 천주교 차원에서 성인으로 추존해 감개무량하다”고 말했다.
팔당/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