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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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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 많았던 중세 교황선출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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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콘크라베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교황이 죽었다. 그러면 바티칸의 담당 시종이 교황의 이름을 부르며 은망치로 머리를 두들긴다. 망치로 머리를 두들긴다? 묘한 분위길 자아 내지만 사실은 죽음을 확인 하기 위해 살짝 건드려 본다는 거다. 이때 반응이 없으면 일단 죽은 걸로 간주하고 교황이 끼고 있는 반지를 빼서는 부셔 버린다. 온 로마에 교황의 서거 소식을 종으로 알리고 추기경들은 죽은 교황의 발에 입맞춤을 한다. 장례식을 끝나면 당연히 들어가는 길은 교황선출이다. 이 교황선출은 오늘날에 콘크라베(Konklave)로 한국에도 원어로 잘 알려져 있다. 중세의 콘크라베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콘크라베 동안 이들이 제공 받은 음식은 어떠했을까?


당시의 교황선출은 오늘날처럼 평화롭게 성사된 것은 아니고, 말 많고 탈 많은 콘크라베도 더러 있었다. 1179년 부터는 새 교황이 당선되기 위해서는 3분의2가 찬성 해야만 했다. 이 정족수에 못 미치면 교황자리는 늘 빈 채 있었다. 이런 공위(空位)기간은 일주일에서부터 한달 어떤 때는 몇 년까지 갈 때도 있었다. 1241년 8월 22일 그레고르 9세 (1227~1241)가 서거했으니 추기경들이 당연히 새 교황을 뽑아야 한다. 당시의 교황권은 로마의 원로원 손아귀에 있었다. 당시 득세하던 오르시니 귀족 가문이 특히 날 뛰었다. 이 오르시니가 새 교황을 뽑기 위해 10명의 추기경들을 소집했다. 당시를 묘사한 피셔박사의 자료를 보자; 그는 한 추기경을 머리채를 잡고 바닥에 내치는가 하면, 어떤 추기경들은 그에게 맞기까지 했다. 그 이유는 적혀 있지 않다. 짐작하건 데 아마도 추기경들이 오르시니에게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는지? 오늘날에 비기면 정말 상상이 안가는 전경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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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들을 모았던 곳도 세프티쪼니움(Septizonium)인데 203년경에 지은 허름하게 기울어져가는 건물로 한때는 감옥으로 사용하다가 다시 수녀원의 일부로 흡수 되었던 곳이다. 오르시니는 투표권이 있는 추기경들을 여기에 감금 시키곤 갖은 푸대접을 일삼는다. 일부러 지붕을 뚫어 빗물이 아래로 떨어지게 만들지를 않나, 지붕 위의 지킴이들이 급하게 쏱아 내는 오줌까지 합해지는 날은 지린내 풍기는 빗물을 고스란히 맞이 해야 했다. 반대로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날씨도 문제다. 쉽게 전염병이 돌았다 보니 추기경들이 병이 들기도 했다. 일단 옆방으로 옮기지만 치료목적이 아니다. 이들의 생사는 오직 운명에 맡긴다면서 모퉁이 방에 그냥 모셔(?) 버리는 처사다.


이들 중 한 명이 거의 죽음 문턱에 다다랐다. 감시인들이 작은 공간으로 이 추기경을 끌고 가서는 침까지 탁 뱉고선 석궁으로 된 공봉으로 때리기까지 했다고 피셔 박사가 밝혔다. 더 심한 짓은 이들이 죽을 때 성사 받는 것까지도 허용 하지 않고 외면해 버린다는 사실이다. 톨레도 출신의 요한 이라는 추기경은 이런 처사에 대해 한마디 던지길; 이럴 바에야 차라리 성령이 지붕을 타고 내려와 교황을 선택함이 나으리라 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1241년 10월 말에 드디어 교황이 뽑혔는데 바로 쾰레스틴 4세(Cloelestin; 1241 10.25~11.10) 다. 열악한 환경에서 귀족들로부터 갖은 무시를 다 당하면서 선거를 치렀던 추기경들은 새 교황이 선출 되자 마자 만세를 부르며 이 곳을 떠났다. 근데 새 교황 쾰레스틴4세가 그만 죽어버렸다. 그것도 17일 만에! 이번에도 오르시니가 새 교황선출을 위해 추기경들에게 다시 소집장을 보냈지만 추기경들은 그 곳에 다시 그곳에 들어 가기를 무지 꺼리면서 거부했다. 그 결과로 당시는 거의 2년간 교황이 없이 지내는 시기가 도래했다. 그 다음 교황인 이노젠트 4세(Innozenz)가 1243년 6월 25일 선출되었던 것을 보면 공위(空位) 기간이 2년이었다는 것이 명백하게 증명된다.


오늘날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런 일들이 어찌해서 당시는 일어날 수 있었을까? 13세기의 교황권은 바닥에서 기는 시기였다. 모든 권한은 로마 귀족들이 장악했다. 정치적이고 종교적으로 얽혔던 당시의 문화사는 너무 길기에 생략한다. 다만 서로 적대관계에 있는 귀족가문들이 서로들 자기편의 교황을 뽑기 위해 발버둥 치는 시기였다는 사실만 기억하자. 당시 오르시니와 적대 관계에 놓인 가문은 콜론나(Colonna)였는데 이 두 가문이 자기들이 원하는 교황을 배출 하겠다는 권력싸움을 일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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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 예다. 니콜라우스 4세(1288~1292)가 죽고 나서 새 교황 뽑는데 두 가문이 싸움질만 하다가 2년 만에 새 교황 쾰레스틴 5세(1294~1294.12)가 1294년 당선 되었다. 하지만 그는 7개월 재직하고선 죽었다. 이들은 다시 자기가문이 원하는 교황을 뽑기 위해서 싸움질에 들어가고, 지붕을 뜯어내는 처사나, 추기경들에 대한 모독은 각자 가문이 원하는 교황을 뽑아라! 그리고 빨리 뽑아라! 라는 함묵적인 지시가 내포 된 거다.


클레멘스 4세(1265-1268)가 죽었을 때도 새 교황을 뽑지 못했는데 이번엔 로마귀족들의 간섭 때문이 아니라, 한 장소에 모인 19명의 추기경들이 교황선출을 두고 서로 간에 갈등을 겪었기 때문이다. 다시 3년간 교황 없이 지냈던 공위 시대가 온다. 1271년 9월1일 드디어 그레고르 10세가 새 교황으로 당선되었다. 이런 문제점을 직면했던 그레고르 10세는 보다 엄격한 콘크라베를 1274년 6월7일 반포했다. 콘크라베(,Konklave,: ’열쇠 하나를 가지고’)의 뜻으로, 외부의 영향을 전연 받지 않고! 오직 각자 소신대로! 새 교황을 뽑는다는 의미다. 그가 내린 규정은; 교황이 죽으면 10일 후에는, 그것도 교황이 죽었던 장소에서, 닫혀진 공간에서 교황선출을 해야 한다. 이 공간에서 들어선 이는 교황당선이 확정 될 때까지 어느 누구도 떠날 수도 없고, 들어 올 수도 없다는 규칙이다. 이를 어긴 자는 당장 파문 당하게 된다. 또 여기 모인 추기경들이 5일 이내에 새 교황 뽑지 못할 경우는 단지 두 끼 음식만을 공급받는다. 만약에 8일이 지났는데도 새 교황 결정을 못 내리면 추기경들은 빵과 물만 공급받는 신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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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3년에 이르러 콘크라베 규정이 보충 된다. 여기 집결한 추기경들의 시종은 3명으로 허락했다. 특이한 점은 이들이 머무는 공간엔 온통 검붉은색과 그린으로 치장 되었다. 죽은 교황의 덕을 입고 있다는 의미 표징으로 이들이 사용하는 침대, 방석, 수건, 등, 심지어 요강까지도 이색으로 덮였다. 누군가가 우연히 들려다 보았다면 혹 젊은이들의 방이 아닐까? 연상이 될 정도였다고 한다. 시종들도 바티칸직원들도 마찬가지로 같은 색을 입고 다녔다.


콘크라베에 참석한 추기경들도 일단은 먹어야 한다. 추기경들은 자기 종들이 가져온 음식만 먹었다. 혹시나 음식에 독이 들어 있을까 봐서다. 아주 엄중한 컨트롤하기 위해 4명의 주교가 문 앞에 서서 가져온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혹은 음식에 비밀스런 소식이라도 넣었는지를 검사한다. 투명하지 않는 병이나 단지 사용은 절대 금물이다. 특별히 금지된 음식은 닭요리 였는데 아마 닭 안에는 많은 것을 넣을 수 있었기에 그랬으리라. 우리가 닭 안에 대추 인삼 등을 많이 넣을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면 되겠다. 그래도 그릇 가장 밑바닥에 뾰족한 것으로 새긴 암호를 음식과 함께 들여보내기도 했단다. 음식을 다 먹고 나면 그릇 밑바닥에 새긴 글씨를 당연히 볼 수 있었으리라!


이런 엄한 규정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물렁해져 버린다. 이젠 각 귀족들이 보낸 첩자들과 감시인들까지 버젓이 등장했다. 추기경들은 규정을 어기고 세 사람의 수행원보다 더 많이 데리고 들어왔다. 호기심을 가진 귀족들도 은근슬쩍 끼어 들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추기경들이 동행한 인원이 많이 지다 보니 콘크라베 장소에 400명의 인원이 모인 적도 있었다고! 더 기이한 것은 규정 같은 것은 아예 내 동댕이치고선 벽에다가 구멍까지 내어 바깥과 교통했다. 편지를 이리저리 전달해 주기도 했는데, 이때 사용한 것은 가방이 아니라 장화였다. 전해 줄 편지를 장화에 가득 넣은 채 뒤뚱거리며 걷기도! 이렇게 산만하고 어지러운 콘크라베를 마치 잔칫집 분위기로 표현한 기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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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들이 교황선출 하러 들어가고 나면 바깥에선 무성한 소문이 난무한다; 기오반 마리아 델 몬테(Giovan Maria del Monte) 라는 추기경은 후에 율리우스 3세로 당선되었다. 그는 교황이 되자마자, 사랑하는 사람(?)을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사랑하니까 여자? 아니다 바로 17살 남자인데, 그가 데리고 있었던 원숭이트레이너이다. 젊었을 때 그는 10명이 아닌 100명이 넘은 아이들을 여인들을 통해서 생산(?) 했다고는 자료도 남아있다. 죽음에 임박한 그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제발 착하게 살라고 유언하자, 그는 죽어가는 엄마 앞에 무릎을 꿇고 앞으로 바르게 살겠노라고 맹세한다. 그의 맹세는 다른 것이 아니다. 이젠 여성들과 연애하지 않고 소년(Knabe)들과만 연애(?) 하겠다는 거다. 그 후 추기경이 된 그는 이 약속을 철저하게 잘 지켰다. 그는 더 이상 여자들과 사귀지 않고 소년 애인들(?) 을 수두룩하게 데리고 살았다고!


이런 콘크라베를 거쳐 교황이 된 이들의 식탐 얘기도 보자: 이들이 잘 먹었던 음식기록을 보면: 과자와 빵은 기본이고, 거세한 수탉, 공작새 요리, 꿩고기, 메추라기 요리, 두루미 요리, 와인에 절인 삶은 소 혀 요리, 와인에 절인 삶은 돼지궁둥이 요리, 거세한 수탉 요리, 비둘기 요리, 돼지배 요리, 토끼 튀긴 요리, 염소간 요리, 송아지발 요리, 개구리 요리, 심지어 곰 고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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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우스 3세(1277~1280)는 11명의 부엌 일꾼들을 두었다. 주방장을 중심으로 스프 요리사들과 소스요리사들을 따로 두었고, 일반 빵 굽는 이 따로, 달콤한 빵 굽는 이 따로, 웨이터와 교황이 먹을 음식을 먼저 시식해보는 자들이다. 보니파츠 8세(1294~1303)는 1303년 9월에 3일간 감옥에 갇혔는데, 이때 그는 밖에서 제공되었던 음식은 다 거부하고 오직 계란만 먹었다. 일반 음식을 받아 먹다가 독살될까 봐서다. 알렉산더 7세(1655~1667)는 늘 해골을 그려 넣은 은 컵만을 사용했다고! 피우스 6세(1775~1799)는 그의 유언장에 요리사들을 언급 할 정도로 요리사들에게 많은 혜택을 베풀었다. 당시는 요리사가 꽤나 높은 관직이 아니었을까? 하는 유추를 후세 학자들은 한다.


파울 2세(1464~1471)는 일상적으로 세 끼 먹는 방식이 좀 별났다. 그는 해가 지고 난 뒤 점심을 먹었는가 하면, 새벽이 되어야 저녁을 먹는 버릇을 가졌다고! 레오 10세(1513~1521)는 바티칸의 재산을 탕진할 정도로 많은 연회를 열었다. 1518년 4월 30일 날 연 한 연회에선 자그마치 1인당 80 소이디(Seudi) 넘었다고 임바흐 교수가 언급했다. 옛 화폐인 소이디의 가치를 잘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교황이 연 잔치이니 쩨쩨하게 일 인당 8만원은 분명 아닐 것이다. 80만원의 짜리 가치로? 아니면 800만원 가치로? 상상해 볼까? 이렇게 흥청망청 누렸던 이 교황은 전임자 교황이 남긴 재산은 물론 후임자 교황에게 물려줄 바티칸 재산까지 다 바닥내 버렸다고!


이들의 권력 다툼과 싸움질까지, 즐겨 먹었던 음식 등등 세세한 부분까지의 자료 보관은 높이 살만하다. 하지만 추기경에서부터 콘크라베를 거쳐 교황이 된 이들이 가난을 실천하고 이웃을 돌보라는 예수의 기본 정신에서 한 참 이탈한 변질된 모습들은 왠지 서글프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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